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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재 Feb 08. 2024

[북 리뷰] 위생의 시대 - 우리 같이 살아요


'Watery!'

대학 시절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간 적이 있다.

일하던 농장은 그야말로 광대해서 비행기로 농약을 살포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런 농장에서 일을 하고 돌아와 샤워를 하면 온몸에서 노란 농약 물이 한참을 흘러나왔다.

물 범벅이 된 샤워실을 본 숙소 매니저는 한국 사람들이 물을 너무 많이 쓴다며 "Watery!"라며 투덜거렸다.


유럽에서 온 친구들은 잘 씻지를 않았다. 설거지 법도 달랐다.

사용한 접시에 세제를 슥슥 바르고 물을 받아놓은 개수대에 접시를 몇 번 넣었다가 뺀다. 그리고 건조대에 척 꽂으면 설거지 끝이다.

설거지하는 동안 물을 계속 틀어 놓는 한국인들이 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런 모습을 보고 나를 비롯한 한국 친구들은 우리가 참 위생 의식이 높다며 우쭐댔었다.  


그런데 고미숙 작가의 '위생의 시대'를 읽고 이런 위생 의식과 우월감은 근대화되면서 이식된 습속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선의 산천이 비록 아름다우나 사람이 적어서 부강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도 사람과 짐승의 똥오줌이 길에 가득하니 이것이 더 두려운 일이다"
(본문 19 page)



똥이 무슨 죄인가?

급진적 개화파였던 김옥균의 '치도 약론'으로 한성순보에 실렸던 글이다.

근대적 시선으로 봤을 때 조선의 모습은 온통 수정의 대상이었다.

쓰기에 따라서는 필수적이고 요긴한 물건이었던 똥도 눈에 가시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신체 또한 마찬가지다.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서구적으로 크고 우람한 신체가 필요했다.

평범한 신체도 서구의 잣대로 봤을 때는 수정의 대상이었다.

병든 몸은 말할 것도 없었다.

병은 국력을 약화시키기에 최대한 빨리 없애는 것이 좋았다.

때 마침 19세기 파스퇴르와 결핵균의 발견자 코프에 의해 결핵의 원인을 특정할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건강한 신체는 병균의 제거를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인식론이 만들어졌다.

병과 몸이 분리된 것이다.


이는 병이란 몸의 조화가 깨어진 상태로 파악했던 히포크라테스나 동양적 사유 방법을 무너뜨렸다.

이런 식의 구분 짓기는 기독교와 맞물려 병과 몸의 구분을 넘어 병을 악으로 규정하는 지경에 도달하게 된다.

구분 짓기가 도덕의 문제가 된 것이다.

이것이 내의식에 있는 잘 씻는 것에 대한 우월감의 뿌리다.



죽음은 너의 것

저자는 위생을 위해 몸과 외부를 단절하는 촘촘한 장벽은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타인과의 거리 두기가 세련된 현대인의 삶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장벽은 나를 지켜주지만 동시에 흐름을 막는다. 

흐르지 않는다는 것은 또 다른 병의 생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생긴 병이 고독과 우울이다.

사회에서 격리되는 것보다 더 큰 형벌은 없다고 했다.

스스로를 가둔 죄로  죽음이 개인의 것이 된 것도 근대화의 커다란 아픔이다.



"권력은 더 이상 죽음을 모른다. 엄밀하게 말하면 권력은 죽음을 내팽개쳤다"
(푸코)



근대 이전의 전통 제의는 사람이 죽음으로 가는 길을 집단이 정한 형식으로 행하는 것이다.

죽는 길을 함께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통 제의는 비 이성적이고 비 합리적이라는 이유로 근대화의 길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그렇게 죽음은 집단의 의식이 아니라 개인의 사건이 되었다고 말았다


우리는 현대의 장례 문화로부터 어떤 영적 위로도 느끼지 못한다.

그나마 남아있는 제의는 상조회사의 몫이 되었다.

장례식장을 생각하면 향기가 전혀 나지 않는 조화가 떠오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뭉쳐야 살 수 있다

이런 근대화의 해법으로 저자는 공동체를 제안한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생리 기능을 조절하고, 이 과정에서 자기 자신도 조절을 받는다. 각자의 생리는 다른 사람이 있어야 완성될 수 있는 열린 고리' 구조이다"
(본문 p96.)

몸의 생리 작용이 타인을 통해서 조절된다는 것이 과학을 통해서 밝혀진 것이다.

과학에 기대지 않더라도

마음 맞는 사람과 같이 밥을 먹을 때 더 밥맛이 좋고,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운동을 할 때 더 강인해지고, 아파트 보다 산속에서 잠을 잘 때 더욱 잠이 잘 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저자는 또 하나를 주문한다.

유머다.

니체 또한 한 줌의 유머가 없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했다. 웃지 않는 사람들, 심각한 사람들을 경계하라고 했다.

그만큼 웃음은 생을 위한 강력한 도구이다.


용기가 필요해

근대화의 더 많은 앎은 더 많은 무지를 들춰낼 뿐이라 하겠다.

하지만 근대화는 이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알게 된 사실에 눈을 떼지 말 것을 강요하고 미지의 세계는 불안을 가져온다 협박한다.

우리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고 애써 외면하며 사는 동안 그만큼의 삶은 소외된다.


그렇게 봤을 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이다.

저자가 내세우는 공동체라는 것도 이 용기 있는 전진을 위해서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신적 영양실조 상태를 피하기 위해서는 타자와의 만남만이 유일한 해법이 될 것이다.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저자가 말하는 유머가 생성될 것이다.


유머가 끊이지 않는 공동체. 그것이 최고의 멀티비타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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