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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재 Feb 05. 2024

내 마음의 맛집은 어디인가?

나는 '힐링 여행'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힐링이라는 단어가 미디어를 통해 사골국처럼 우려 져 단어 자체가 오염된 것 같고 또 여행을 힐링이라고 지칭하는 순간 여행의 모든 행위가 치유를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리는 것 같아 좀 그렇다. 언덕 위에 핀 꽃도 지나가는 새도 맑은 공기도 모두 치유를 위한 도구들이라니 당사자들이 알면 조금 섭섭하지 않을까?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 또한 그러하다. 여행 며칠 전부터 어디를 많이 갔는지 평가는 어떤지 등을 알아내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결국 나는 치유가 되었는가? 몇 장의 사진과 물건들을 사서 돌아오지만 그 여흥이 1주일 채 유지될까 모르겠다. 더 많은 맛집을 돌아다니고 더 비싼 선물을 사들고 온다면 힐링이 될까? 그건 아닐 것이다. 뭔가가 채워진 여행이 아니라 계좌의 잔고가 빠져나가듯 욕망이 배설 돼버린 것이 우리가 '힐링 여행'이라고 부르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게 우리가 말하는 힐링 여행은 배설의 쾌락을 가슴에 품고 있다. 힐링 여행에 대한 거부감의 좀 더 근원적인 이유는 그 단어가 일상을 상처의 가해자로 지목하는 느낌 때문이다. 물론 한 사회가 개인에게 지우는 멍에가 없지 않다. 하지만 한 생명으로 태어나 받은 것이 얼마나 많은데 일상을 온통 가해자로 몰아가는 것은 너무 염치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일상은 가해자이지만 이색적인 여행지는 치유의 공간이다? 그곳도 현지인들에게는 일상의 공간일 뿐이지 않는가. 물론 색다른 공간이 잠시 마음을 환기시킬 수 있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의 본질을 '힐링'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여행지에서 받은 환상적 느낌이 일상을 더욱 소외시키는 효과를 주는 것은 아닐까?



힐링은 배경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이루어진다. 배경을 바꾸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는 '아'와 '피아'를 칼로 베듯 구분하는 이분법에서 시작된다. 이분법은 인간을 자연에서 떼어내는데 이때 자연은 향유와 지배의 대상이며 치유의 도구가 된다. 하지만 내가 사는 세상은 내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실현한 결과물이다.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나와 세상이 하나라는 개념은 종교적 차원에서 뿐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나는 영원히 상처받은 희생자의 신세를 벗어지나 못한다.



그렇다면 힐링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첫걸음은 내가 누군지 아는 것이다. 모두 스스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부모의 욕망을 욕망한다. 그렇게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여정이 시작된다. 아이들을 부모의 홈 파인 감정의 골을 메우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만든다. 또 성장하며 사회가 부여하는 수많은 가치 체계를 받아들인다. 인간이 이렇게 여러 겹 자기 것이 아닌 옷을 걸치고 살다 보면 살과 옷이 엉겨 붙어 어디서부터가 원래의 나인지를 알지 못하게 된다. 이런 몸과 마음이 일상의 수많은 문제를 낳는다. 그 문제들은 스스로를 삼키는 분노를 유발한다. 그런데 그 분노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쉽지 않다. 왜? 두려워서다. 스스로를 마주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치유해달라는 응석이 아니라 용기다. 나를 무너뜨릴 용기. 그래서 니체도 내 안에 나를 무너뜨릴 태풍이 있는지 물었다.



태풍은 모든 것을 드러낸다. 치부가 드러나야 비로소 빛나는 곳은 어디인지 보이기 시작한다. 그때가 나를 찾는 여행이 시작될 때다. 내비게이션을 켜자. 나에게서 폐업한 곳이 어디인지 맛집이 어디인지 탐험해 보자. 드디어 힐링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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