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자살, 애도하는 사회

떠나는 이와, 당신의 떠난 사랑과 사람 이야기

by 가랑비가람



1.
죽음은 나의 오랜 주제다.
어렸을 적부터 묘한 행운으로 죽음이 비껴간 경험이 많았다. 나무 위 오두막에서 놀다 간발의 차로 무너지는 순간을 피했다거나, 학교 앞 사거리 주차된 차 사이로 횡단보도를 건너다 코앞에서 차량이 쌩하니 지나간다거나, 한겨울 집 가는 길이 멀어 눈밭에서 잠든 것을 가까스로 구해진다거나, 낡은 연장에 손등이 깊게 패여 종일 피가 났다거나, 카페인 위험한 줄 모르고 핫식스 열댓 개를 부어 마시다 부하가 온다거나, 온종일 게임을 하다 일어난 순간 저혈당 저혈압이 겹쳐 그대로 기절한다거나.

막연히 죽음과 친숙해졌다. 간발의 차로 빗겨나간 죽음과, 그 순간의 전조도 없이 떠난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살아있다는 건 가까운 누군가를 먼저 보낼 의무를 진다는 것. 마음을 준 만큼 도려내지는 것이 죽음이라면 내 마음은 꽤 온전히 그 형태를 갖고 있겠으나, 한편으로 '운이 좋아 여즉 살아있구나'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죽음은 언제나 삶에 동반하고

존재의 위성이 되어 생의 곁에서 함께 공전할 것이라 수긍했다.
하지만 그것은 번쩍 존재를 드러내니

큰 소리에 놀라 몸을 돌아보는 인간의 본능처럼, 부모의 시선을 갈구하는 어린아이처럼

시선을 두어 관성을 빼앗기게 된다고.


한번 다녀온 길에는 반딱반딱 닦인 현수교가 깔린다 그 누가 말했더라.

나는 그 길 끝에 닿기 전 또다시 우연한 행운과 다정한 도움으로 이끌려 나왔지만,

한번 지나와 깨끗이 닦인 길은 이전 다다랐던 곳을 빤히 보이게 만들었다.

덤불숲에 치이고 나뭇가지에 가려 막연하고 희뿌옇던 것. 선명해진다. 살아가며 들려오는 허밍. 피부를 스치던 바람이 작은 속삭임이었다면. 이제 그것은 광풍처럼. 미치광이 노래처럼. 번복할 수 없는 과거 외면하지 못할 유혹이 되어 종종 모든 마디를 끊어 사고를 짓눌렀다.


2.
누구나 인정하는 죽음 만연한 사회.
태어나 곧 떠나는 아이가 많아, 첫돌을 기념하며 '이제 너를 주변에 공표한다' 존재의 지속을 알리고 안정을 깔았던 오늘도 이제는 옛날인지라. 아이는 의도적으로 방치하지 않는 한, 돌연 숨이 끊기지 않는 한 생이 이어질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생존한 아이는 살아가며 의식적으로 죽는다.

그러니까, 내가 느끼는 불평등은 이런 것이다.
이 나라 20대 인구 다섯 중 하나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던데. 왜 이 나라 이 사회에서 스물하고 몇 번의 해를 더 산 나는 스스로 떠난 이를 모르는가 하는 것.
스스로 향하는 죽음이 그토록 많다면, 만연하다면, 필연한 이치로 누구나가 그 죽음을 주변인으로 겪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 삶이 하나의 도시에, 작은 공간과 공동체에 길게 매여있었기 때문일까? 이 나라는 그토록 다른 정체성 사이에 거리와 분리가 멀고 심한 곳인가?

나는 '자살'이라는 이곳의 흔한 종말의 한 형태를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산다는 것이 어떠한 권력으로 느껴진다. 내가 얻지 않고, 노력하지 않았지만 태생적으로 주어져 인식하기 전까진 알 수 없는 기만적 권력 말이다.


3.
자살을 터놓고 말하는 것은 분명 도움이 된다.
친구를 만나러 간 북적이는 어느 역 근처 식당에서, 타코에 술 한 잔을 곁들이며 테이블이 네다섯밖에 없는 작은 식당에서도 자살이니 우울이니 정신과 약 이름을 말하고 소수자의 삶과 인권 이야기를 주변에 의식 않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순간이 곧, 되돌아 충만한 시간이 아닐까. 피자 한 판을 앞에 놓고 떠드는 그녀를 보며 생각한다. 그녀를 만날 때 나는 해방감을 느낀다. 톡 쏘는 알코올을 마시고 탁 트인 자유를 맛본다. 우리는 어떤 기성의 질서나 시선을 버리고, 말하고 싶던 것들을 쏟아낸다. 그것은 듣는 누군가에게 충격을 줄지언정 다른 이를 핍박하거나 해를 끼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충격이 필요합니다.' 어떤 가수의 노랫말처럼, 기도처럼. 가난한 이의 삶과 죽음, 널린 시체밭 위에 선 내가 들이쉬고 내뱉는 숨 하나하나에서 느끼는 혼탁한 쇠의 냄새, 비릿한 철의 맛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내가 있다.




<후기>

죽음이 친근하고,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죽음으로 떠난 이들을 곧 해방되었다 느끼기 때문일까요.


죽음을 터부시하는 시선이 싫습니다.

자신의 죄에서 비롯한 부끄러움에 도망친 죽음이 아니라면

함께 있는 자리에서 꺼내지 못할 주제는 아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정상적인 인간, 궤도에 안착한 사람들, 갓생을 살고 자기 계발 서적을 두루 탐닉하고 강연을 뛰는 사람들

쉬이 상상할 수 있고 많이 보아왔기에 그다지 흥미가 돋지 않습니다.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정상 궤도에서 벗어나 살며, 한번 혹은 두번... 몇 번이고 저 멀리 현수교를 끌어안고 사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고 싶습니다.


누구나 힘들고 더럽고 지난한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히. 당당히. 말할 수 있고

나도 그런 그들의 이야기를 여느 일상 속 대화처럼 호응하며 들을 수 있는.


세상은 참 크고. 넓고.

인간 군상 이토록 다양하고도 천편일률적인데.

마음 기전에 다를 것이 없다면

자그마한 오차로 달라지는 모든 비극과 희극.

그것만이 시선을 모을 이야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 그렇다면 나누지 못할 비극도, 희극도 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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