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이라는 소수성에 대하여

온전한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은 존재할까. 우리에 다다를 수 있을까.

by 가랑비가람


우리 모두는 더 넓은 세상에서 언제나 소수자의 모습을 품고 있다.

우리는 모두 약자이며, 강자이고, 발전하는 주체이며, 협력과 연대의 가능성을 가진 서로의 타인이다.

흑백논리를 벗어난 넓은 회색지대는 뚜렷한 장점이 될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믿어온 나의 가치이다. 이 믿음이 동시에 스스로에 강제성을 부여하고 삶을 이끌어왔다 나는 회고한다. 그 삶이 현재에 이르니, 어느샌가 나를 긍정하는 타인은 좀처럼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이 나라의 세계관, 인간관에서 벗어난 듯 보이고 마는 것이다.

모두의 스펙트럼을 한 데 놓고 각자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허용하는 것이 곧 어울림의 시작이라 믿었던 때가 있었다. 언제나 사람이 궁금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궁금했다. 너의 삶을 나에게 들려주기를, 그리고 나는 너를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기를. 사귐의 종점에서 오직 그것만을 바랐다. 조금의 인정도 바라지 않았다면, 그래, 그것은 거짓이 되겠으나 내 스스로가 놀라울 만큼 그 이전에 '이야기'에 대한 본연적 욕구가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스펙트럼을 꺼내놓고 보았을 때 서로에게 호감을 가질 수 있다는 건 당신의 핵심을 이루는 한 부분에 대한 긍정보다 회색지대에 대하 전반적 경향성 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 반대다. 이 문文을 내리며 깨닫는다.

나 자신이 회색지대로 두지 못한 흑백을 따르는 강한 암시와, 가치관의 중심부를 구성하는 당위에 대한 가치관이 곧 이를 긍정하는 이들을 더 편애하고 안식을 느끼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 너무나도 당연한 것. 이 세상과 타인을 대하는 어떤 가치관, 세계관, 이타성, 이기심, 배려, 사랑, 미련, 결핍. 이들을 긍정하지 않는 존재들. 이들에 부끄럼없이 혐오를 내뱉는 자들을 위해 회색지대를 넓히는 것이 괴롭기 때문이다.

이는 곧 방황이 된다. 나의 가장 소중한 가치마저 천칭에 올려 평형을 맞추고 공정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면. 중심을 흔들어 평행을 다시 세워야 한다면. 내 천칭을 세운 곳이 기울어진 경사면이 아니라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단언하고 판단할 통찰력은 충분히 갖추었는가? 홀로 세운 성벽에 갇혀 공허한 말을 내뱉고 있지는 않은가? 더 넓은 세상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충분히 닿고 있는가? 말을 전하는 발화자, 홍수에서 낱알을 거르고 조각조각 방직한 알고리즘에 편향은 없는가? 편파와 불균형을 알아볼 눈이 나에게 있던가? 너는 지금 새로운 것을 충분히 찾고 있나? 익숙한 것만을 찾아 쉬운 길을 가려하지 아니한가? 흔들리는 자의 방황은 원칙 없는 자의 나태욕과 무엇이 다르지?

삶을 가르는 선택의 기로에서 너는 어떤 가치를 우선하나. 무엇을 가장 앞에 두고 심판을 내릴 수 있을까. 절대로 절대적인 절대성. 감히 꺾일 수 없고 양보할 수도 없는 원칙이자 최후의 보루는 무엇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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