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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원 Aug 02. 2019

흔들리며 피운 꽃

영화 <김복동>



범인은 상상할 수도 없는 끔찍한 일을 당하고도 그것을 용서할 준비가 된 피해자와, 추악하고 더러운 탐욕으로 얼룩져 있는 명예도 명예랍시고 그것을 붙잡고 사과 한마디 하지 않으려는 가해자. 그 아이러니함의 크기만큼 이 세상은 꼬일 대로 꼬여버린 채로 흘러가고 있다. 사죄를 바라는 할머니의 마음은 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 묵혀둔 그 한스러운 마음을 풀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마음의 짐을 안고 있을 가해자들과 앞으로 이 땅의 여성들이 그런 일을 또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이 세상의 후손들을 향해 어느 평화운동가가 보여준 '궁극의 이타심'이었다. 앞으로 다시는 자신이 겪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가해자까지 용서할 수 있는 마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평화 운동'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金福童

 '복 복'자에 '아이 동'자. 김복동 할머니의 이름을 보며 처음 떠오른 건, 기쁨에 찬 표정으로 갓 태어난 예쁜 딸을 안아 올리는 어느 부모의 모습이었다. 김복동 할머니의 함자만 들어도 1926년 5월 1일 그 날, 할머니의 부모님이 얼마나 예쁘고 소중한 딸을 품에 안았을지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집안의 '복덩이'였던 소녀는 열여섯이 되던 해 아무것도 모른 채 앞으로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을 배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 후, 할머니의 함자 주변을 당연한 듯 따라다니는 '위안부 피해자'라는 말. '복동'이라는 이름 옆에 자리하기에 어색하기만 한 '피해자'라는 단어와, 그 어구가 만들어내는 불협 화음은 내게 그래서 더 가슴 아팠다.


 

 영화 <김복동>은 그런 할머니의 이야기다. 1992년부터 올해 2019년 1월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죄 없는 여성들을 군국주의의 노리개로 철저히 유린하며 사람의 일생에 가장 아름다워야 할 시기를 끔찍한 지옥으로 만든 일본의 사죄를 받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한 김복동 할머니의 그 '27년'의 기록이다. 영화는 배우 한지민의 가녀리지만 차분하고 힘 있는 목소리와 함께, '과거사 청산' 한 번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이 한심한 세상에서 그만큼 큰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또 그만큼 고단했을 할머니의 삶의 여정을 가만히 조명한다.  


 내 힘닿는 데까지, 끝까지 싸우다 갈 거야.

 

 영화가 엔딩 크레디트를 향해 갈 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된 김복동 할머니의 그 싸움은, 열정적이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했다. 젊은 사람들에게도 버거울 해외 일정을 소화해내며, 전 세계 방방곡곡을 누비며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며 일본 대사관을 향해, 아베 총리를 향해 목소리 높여 호통을 쳤다. 길원옥 할머니를 비롯한 자신보다 어린 동료들이 고령의 나이에 이곳저곳 몸이 아파 쓰러져 갔지만, 그럴수록 김복동 할머니는 더 씩씩하게, 더 활기차게 동분서주하셨다. 결장암으로 투병 생활을 이어가시면서도 수술한 지 5일 만에 성치도 않은 몸을 이끌고 다시 사람들 앞에 선 김복동 할머니. 할머니는 정말 말 그대로, 힘닿는데 까지 싸우셨다. 


 그런 김복동 할머니를 비롯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2015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갑작스럽게 발표된 한일 위안부 합의는, 정말이지 희대의 '삽질'이었다. 아직까지 일본 정부의 그 사과 한마디 듣기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싸워온 이들이 아침 뉴스를 통해 듣게 된 '사죄'가 아닌 '합의'. 위임한 적도 없는 그들의 '사과받을 권리'를 돈 10억 엔에 팔아 버린 우리 정부. 할머니들이 원한 건 돈이 아니라, 사과의 말 한마디였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현대사에서 우리가 일본과 행한 합의들은 '스리슬쩍'이나 '은근슬쩍'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건들이었다. 이미 1965년, 우리 정부는 경제 부흥을 목적으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추진했다. '왜놈과의 국교정상화는 제2의 을사조약이자 경술국치'라던 국민의 반발에도 아랑곳 않았다. 그리고 일제에 강제 징용을 당했던 피해자들의 이름으로 받은 보상금으로 영일만에 거대한 제철소를 세웠다. 그 보상금은 한반도 역사에 유례없는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당시 징용 피해자들을 '부역 매국노'라는 말로 몰아세우던 분위기 속에서, 국가를 향해 개인 피해 보상금을 청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히 피해자들이 받아야 할 그 보상금은 권력에 아첨하던 이들에게로 돌아갔고, 그들은 '경제 성장을 일군 구국의 영웅' 대접을 받았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눈부신 업적처럼만 보였던 우리의 경제 성장은, '결과'만 좋다면 '과정'은 어떻든 상관없다는 '결과 지상주의'와 '황금만능주의'로 썩어 있는 이 사회의 진짜 모습을 외면하도록 만드는 '눈가리개'일뿐이었다.

 

 

 그렇게 아직도 서슬 퍼렇게 기세 등등한, 그래서 더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투쟁. 이 싸움을 달갑지 않게 바라보는 이들은, 할머니들이 '세상 물정을 모른다'라고 말한다. 세계정세가 이제는 일본과 긴밀히 공조해야 하는 이런 시국에, 애써 묻어놓은 과거사를 끄집어내며 국익에 반하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야말로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는 '선각자'인 척하고 있다. 일본이 저렇게 사과 한마디 없이 기세 등등하게 나올 수 있는 이유는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아직도 존재하는, 우리의 아픈 역사조차 제대로 볼 줄 모르며 더러운 일제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책임이다. 유난스러우리만큼 '속도'와 '효율성'에 집착하며 '과정'을 철저히 무시하는 우리의 모습 때문에 이 땅의 수요일엔 무려 1398주째 기약 없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김복동 할머니는 그 중심에 서서 우리가 잃어버린 '과정'을 바로잡으려는 운동을 이끌고 계셨다. 그런데 내게 김복동 할머니가 이 영화에서 하신 많은 말들 중에 가장 또렷이 남은 것은, 조금 생뚱맞게도 이것이었다.


"일본 놈들이 우리한테 사과하겠나. 하려면 벌써 했겠지."

 

 이 말은 보는 내게 조금은 의외로 다가왔다. 사람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이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다. '희망'은 사람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니까. 하지만 김복동 할머니는 작금의 현실을 잔인할 만큼 직시하고 계셨다. 할머니는 일본이 절대 사과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다시 말하면, 김복동 할머니에게 이 싸움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었다. 그 앞에서 할머니는 힘이 닿는 데까지 싸우고 있었다. 할머니는 전혀 무기력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이뤄질 수 없다고 믿는 일을 향해 나아가는 그 심정을 도대체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할머니는 그럼에도 '희망을 잡고 산다'라고 말씀하셨다. 급격히 나빠지는 할머니의 시력처럼, 보이지 않는 희망을 어떻게든 부여잡으려는 할머니의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말을 듣고 난 어쩌면 일본에 맞서는 김복동 할머니의 마음은 '적개심'이나 '분노', 혹은 '증오'가 아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했다. 영화의 말미에도 나왔지만,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미안하다, 용서해달라'는 말 한마디만 한다면 이미 그들을 용서할 준비를 하고 계셨다. 그러자 '이 늙은이들 죽기 전에 사죄하라고' 말하는 할머니의 그 호통이 조금은 다르게 들렸다. 그 호통은 왠지 모르게 일부러 마음의 짐을 지고 그렇게 힘들게 살지 말고, 이 늙은이들이 살아있을 때 사죄하여 그 짐을 벗어버리라는 인자한 할머니의 말씀처럼 들려왔다. 

 또한 정작 치유받아야 할 피해자는 철저히 배제된 '화해 치유 재단'의 설립 기자회견장에 난입해 스크럼을 짜고 단호한 목소리로 위안부 문제 해결을 노력하겠다든 국회의원을 찾던 <평화나비 네트워크> 대학생들에게 김복동 할머니가 한 말도, 잡혀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우리 때문에 애써주는 것은 고맙지만, 어린 학생들이 자신의 인생과 삶 속에서 또 다른 '피해자'의 꼬리표를 붙이게 될까 봐 걱정하는 마음. 마치 물가에 내놓은 어린 손주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마음이었다. 일본 내에서 차별을 받으며 살고 있는 재일 조선인 학생들에게 손수 장학금을 전달하는 김복동 할머니의 마음도 그랬다.



 범인은 상상할 수도 없는 끔찍한 일을 당하고도 그것을 용서할 준비가 된 피해자와, 추악하고 더러운 탐욕으로 얼룩져 있는 명예도 명예랍시고 그것을 붙잡고 사과 한마디 하지 않으려는 가해자. 그 아이러니함의 크기만큼 이 세상은 꼬일 대로 꼬여버린 채로 흘러가고 있다. 사죄를 바라는 할머니의 마음은 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 묵혀 둔 그 한스러운 마음을 풀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마음의 짐을 안고 있을 가해자들과 앞으로 이 땅의 여성들이 그런 일을 또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이 세상의 후손들을 향해 어느 평화운동가가 보여준 '궁극의 이타심'은 아니었을까. 앞으로 다시는 자신이 겪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가해자까지 용서할 수 있는 마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평화 운동'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히 '사람의 인생은 이름을 따라간다'고들 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김복동'이라는 할머니의 이름을 보면서, 그 말의 예외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복이 많은 아이로 살기를 바랐던 부모의 바람과는 달리, 김복동 할머니의 인생은 가늠할 수도 없는 굴곡과 능선을 넘나드는, 고단한 삶이었다.


 영화 <허스토리>와 <아이 캔 스피크>에서도 잘 드러났지만,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임을 드러내는 것은 김복동 할머니에게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페미니즘'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여성의 인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지금과는 달리 그 당시는 나이 먹은 할머니들이 창피한 줄도 모른다며 혀를 끌끌 차던 세상이었다. 아이를 낳을 수 없기에 남편에게 죄스러운 마음을 안고 살아야만 했지만, 나름대로 부족하지 않은 삶이었다.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끔찍한 기억은 묻어두고, 여생을 그래도 마음만은 편하게 살 수도 있었다. 이 싸움에 뛰어든다는 것은, 피해자라는 자신의 과거를 외면하며 억척스럽게 쌓아온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만 하는 모험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흔들리고, 젖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세상을 향해 당당히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앞으로 이 땅에 살아갈 후손들에게, 다시는 같은 고통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할머니는 날카로운 칼날을 맨손으로 잡는 심정으로 그 끔찍한 기억을 27년간 한 번도 놓지 않았다. 그렇게 할머니는 세상이 주는 고통과 시련에 흔들리고, 젖어갔다.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처럼, 할머니는 그렇게 흔들리며 꽃이 되었다.


 물론 일생을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인생에 큰 복이다. 하지만 그것만 복이라면, 세상엔 행복한 삶보다 불행한 삶이 더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세상은 너무 편협하다고 느껴진다. 어쩌면 이 땅의 역사가 심하게 굴곡지고, 한이 많다 보니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도 그런 '안락함'으로 굳어져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는 것처럼, 흔들림 없고 젖음도 없는 걱정 없고 안락한 삶에는 '꽃'도 없을 것이다. 김복동 할머니의 인생은 복이라곤 없는 고단한 삶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삶을 세상에 드러내는 용기를 보여줌으로써, 같은 끔찍한 기억을 갖고 있는 피해자들과 앞으로 계속 이 세상을 살아갈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위로와 감동을 전했다. 세상을 향한 그 열정과 용기는 2주 뒤 8월 14일이면 1400회를 맞는 수요 집회가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을 북돋운, 우리들의 큰 '복'이었다. (2021년 7월 14일 기준으로 수요 집회는 1,500회를 넘겼다.) 혼자만 쓰는 '복'과 세상의 모든 이들과 나누는 '복'중 어느 것의 크기가 더 크겠는가. 그렇게 김복동 할머니는 복이 많은 분이셨다고 난 믿는다. 그렇기에 그녀는 세상에 '평화'라는 꽃을 피울 수 있었을 것이다. 확실히, 사람의 인생은 이름을 따라간다.


 

 지금도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는 주먹을 꼭 쥔 채 굳은 표정으로 그 건물을 바라보는 '평화의 소녀상'이 자리하고 있다. 그 소녀상은 꽃이 되기 위해 지금도 흔들리는 중이다. 물론, 김복동 할머니의 말처럼 끝까지 일본의 사과를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엔딩 크레디트를 장식한 윤미래의 노래 '꽃'의 노랫말처럼, 지금은 빈 들에 마른풀 같다 해도 꽃으로 다시 피어날 것이다. 김복동 할머니를 비롯한 피해자 할머니들의 그 아름다운 마음을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계속 기억하고 있는 한, 소녀는 계속 그 자리에 있을 테니까. 누군가에겐 그 소녀가 '가시'처럼 불편하기만 한 존재겠지만, 많은 이에게 그 소녀상은 그 모진 흔들림을 오롯이 견뎌낸 한 떨기 아름다운 '꽃'으로 보일 것이리라. 아무나 피울 수 없는 아름다운 꽃을 피운 '복 많은' 김복동 할머니의 다음 생은, 아지랑이 피는 화창한 봄녘의 들 판처럼 평안하고 따뜻한 봄이길 진심으로 바라 본다.

  

 


 김복동

1926.05.01 ~ 2019.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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