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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원 Aug 16. 2019

우리, 밥 먹자.

영화 <우리집>




어쩌면 아이들의 싸움은 '생계'로 인해 불안정했던 과거의 가정, 이제는 꿈꾸며 자란 부모 세대의 아직 이루지 못한 '꿈'과, 이로 인한 '감정'의 불화로 또 다른 불안정을 겪고 있는 현대의 가정 모두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쉽게 이사를 가고, 쉽게 이혼하려는 부모들에게 우리의 말을 그저 철없는 투정처럼 보지 말아 달라고, 함께 밥상에서 서로를 마주 보며 대화하고 싶다고 아이들은 말하고 있었다. 해결해 달라는 게 아니라, 그저 얘기하고 싶다고.


 HOUSE [haʊz] : 1. 집, 주택, 가옥   2. 식구들, 집안사람들


 '우리집'이라는 말처럼 안락하고, 편안한 단어가 또 있을까.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말이나 '이불 밖은 위험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산해진미와 진수성찬이 밖에 차려져 있다 해도 밥은 뭐니 뭐니 해도 '집밥'이 최고고, 내 '집 화장실'만큼 내 개인의 '대소사'(?)를 내려놓기 좋은 공간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비단 '집'이라는 것의 공간적인 특성에서만 기인한 것은 아닐 테다. '집'을 의미하는 영단어 'House'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그것에 대해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집'은 그저 건물로서의 '가옥'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식구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취 생활을 오래 해 본 사람이라면, 인기척 없이 불 꺼진 집에 들어서는 그 외로움에 대해 잘 알리라. '집'이라는 공간이 지구 상 다른 어느 곳보다 따뜻하고 안락한 이유는 그곳이 그냥 '집'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과 오손도손 함께 살아가는 '우리 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집>을 보고 나면, 이것은 '집'에 대한 지극히 내 개인적인 감상일 수도 있겠다고 느끼게 된다. 어쩌면 '우리집'을 이렇게 안락한 공간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지 않는 큰 행운으로 여겨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영화 <우리들>로 초등학생 여자 아이들 사이의 복잡 미묘한 친구 관계를 그려냈던 윤가은 감독은, 이번엔 <우리집>이라는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어린 여자 아이의 시선에서, '가족'과 '집'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의미심장한 물음을 던진다.

  


 영화 <우리집>은 전작 <우리들>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윤가은 감독 특유의 어린이의 시선으로 보는 상황과 장면에 대한 세밀하고 촘촘한 묘사가 눈에 띄는 작품이다. 영화의 첫 장면인 하나네 집의 아침 풍경부터 그 특징이 분명히 드러나는데, 카메라의 초점이 잡혀있는 곳은 서로 죽일 듯이 으르렁대는 하나의 부모가 아닌 그 싸움을 황당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모른 채 보고만 있는 하나의 얼굴이다. 대부분의 어른이 나오는 장면은 카메라가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구도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이들끼리 노는 장면들은 대사를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정말 어린 시절 친구를 만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고 떠들며 놀던 그 느낌을 주기 위한 노력이 엿보인다. 이는 영화 <우리집>이 얼마나 세심하고 예민하게 연출되었는지를 반증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두 가정, 하나(김나연)네 가족과 유미(김시아), 유진(주예림)네 가족은 모두 '불안정'한 가족이다. 하나네 가족은 구성원 간의 정서적인 불화로 인해 흔들린다. 부모님은 서로 마주치기만 하면 싸워대며, 이미 사춘기에 접어든 오빠 '찬'은 그런 집안 꼴이 그저 보기 싫을 뿐이다. 5학년 여름 방학을 맞게 된 하나는 이 기회를 통해 가족 여행을 계획해, 가족을 지키고자 고군분투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일 뿐이다. 유미, 유진네 가족의 '불안정'은 '생계'에서 기인한다. 도배 일을 하는 자매의 부모님은 일을 찾아 먼 지방으로 가서 일을 하고 있으며, 가끔씩 삼촌이 와서 자매를 봐준다고는 하지만 이들은 매일 대부분의 시간을 둘이서만 보낸다. 정상적이지 못한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아이들은 소외되어 간다.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된 세 아이는 서로의 결핍을 알아보고, 함께 놀고 어울리며 그 결핍을 보듬어가며 그것을 그들만의 즐거움으로 새롭게 채워나간다.


  영화가 으레 그렇듯, 이렇게 행복하고 즐거운 세 사람에게 하나의 위기를 선사한다. 유미와 유진이네 가족이 다른 곳으로 또 이사를 가야 할 처지에 놓인 것. 하나와 유미, 유진은 계속 함께 있기 위해 이사 가는 것을 막으려 하며 영화 <우리집>은 그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 영화가 두 가정에 각각 다른 불안정성의 결을 제공한 이유는, 아마도 영화 <우리집>이 비단 어느 한 세대의 가족만을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의지처럼 보인다. 유미, 유진네 가족의 모습은 우리 사회 속 가정의 '전통적 불안정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루하루 가정을 꾸려나가기 위해 돈을 벌기에 여념이 없던 시절, 그렇게 쉴 새 없이 일하는 부모님과 빈 집. 그리고 그곳에 남겨진 자녀. 유미, 유진네 집의 모습은 경제 성장의 시절 자녀들을 키우고 생계를 꾸리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시절의 우리 가정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하지만 하나네 집은, 그 불안정성이 '생계'에 있지 않다. 하나의 부모 역시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쁜 삶을 살지만 그것은 당장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부모 자신의 꿈과 이상을 향한 것에 가깝다. 유미, 유진 자매의 가정보다는 좀 더 요즘 세대 가정의 '불안정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독일 주재원으로 가서 자신의 커리어를 더 쌓고 싶은 엄마의 모습은 마치 80년대 말에서 90년대의 경제 호황을 맞았던 시기의, 처음으로 '꿈'을 품고 태어난 세대가 부모가 되어 꾸린 가정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아직까지 '부모'보다는 '나' 자신으로써 이루고 싶은 것이 더 많은 세대. 이렇게도 바쁜데, 가족 여행이라니 하나 엄마에게는 당치도 않은 이야기일 뿐이다. 하나 아빠에게 당신 때문에 한참 바쁜 때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푸념을 늘어놓는 하나 엄마와의 말다툼 장면은, 새로운 세대가 짊어진 새로운 가정의 '불안정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 영화가 관객들을 아이러니하게 만드는 지점은, 이런 불안정성 속에서 가정을 지키려는 주체가 어른이 아닌 '아이들'이라는 점이다. 하나가 학교에서 선행상을 받아 와서 부모님께 말하는 소원이 그 나이 때 아이들이 으레 원할만한 돈이나 선물이 아닌, '가족 여행'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때 역시 서로 죽일 듯 으르렁대던 엄마 아빠가 가족 여행을 통해 화해하고 가족 간의 화합을 돈독히 다졌던 즐거운 경험과, 그때를 담고 있는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유미 역시 어린 나이임에도 동생 유진을 잘 돌보며 장도 보고 하루하루 살림을 꾸리며 살아가며, 집을 오래 비우고 있는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한 동네에 살던 하나와 유미, 유진 자매는 우연하게 만나게 되고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쉽게 친구가 된다. 그리고 가족으로 인해 힘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세 사람 사이에는 점차 유대감이 형성되어 간다.


 

 영화는 그런 하나와 유미, 유진을 단순한 친구 관계가 아닌, 하나의 가족처럼 그려내며 진짜 가족이 무엇인지에 대해 묻는다. 하나와 유미, 유진 자매는 각자의 가족들에게서 벗어나 함께 장을 보고, 밥도 해 먹고, 뛰어놀며 점점 끈끈한 유대감을 쌓아간다. 영화가 이들을 가족처럼 느끼게 만드는 요소는 어떤 대단한 장치가 아니다. 그저 세 사람이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계속될 뿐이다. 하지만 이 별것 아닌 장면을, 하나네 가족과 유미, 유진네 가족은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영화 <우리집>은 밥 먹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우리에게 '가족'이란 무엇인지 가장 명료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진짜 가족보다 더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하나와 유미, 유진에게 없는 것은 그들을 안전하게 품어줄 '공간'으로서의 '집' 뿐이다. 세 사람이 영화 속에서 버려진 상자와 달걀판을 이용해 만드는 '종이상자 집'은 그들이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가족으로서의 유대감과, 지금의 이 아름다운 관계를 지속하고 싶은 세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상징한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종이상자 집'은 종국에 부서지는 운명을 맞는다. 유미, 유진 자매의 이사를 막기 위해 세 사람은 '보리 해변'이라고 하는 먼 지방의 호텔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자매의 부모님을 만나러 먼 길을 떠난다. 하지만 가장 연장자가 겨우 11살인 세 사람에게 그 먼 길은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결국 하나와 유미는 크게 싸우고 만다. 감정이 격해진 하나와 유미는 애지중지 서울에서 가져온 '종이상자 집'을 발로 짓밟고, 세 사람은 짓이겨진 '종이상자 집' 앞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마치 '한 여름밤의 꿈'과도 같았던 이 가족도, 결국은 현실 속에 파국을 맞게 된 것일까. 결국 '가정의 불안정성'은 '감정'과, '다툼' 앞에서 치유될 수 없다는, 디스토피아적인 결말을 말하려는 것일까.


 아마도 부서진 '종이상자 집'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 테다. 난 그 장면에서, 이 글 첫머리에서 말한 'HOUSE'의 본질을 관객에게 강력하게 어필하기 위한 윤가은 감독의 의지를 강력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나와 유미의 그 다툼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위한 것이 목적이라기보다, 서로의 힘든 점을 토로하고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대화의 장'과 같았다. 더 이상 또 다른 낯선 곳으로 이사를 가고 싶지 않은 유미의 마음과, 부모님이 이혼하지 않고 오손도손 같이 살아가기를 바라는 하나의 마음. 각자의 가정에서 안정감을 느끼며, 그 속에서 세 아이가 이룬 또 다른 '가정'도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두 아이의 마음은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감정을 매개로 이리저리 얽히며 둘은 이 싸움을 통해 서로를 한 층 더 이해했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기 위해 싸우는 하나의 부모의 싸움과는 또 다른 결을 지닌 싸움이었다.


 어쩌면 아이들의 싸움은 '생계'로 인해 불안정했던 과거의 가정, 이제는 꿈꾸며 자란 부모 세대의 아직 이루지 못한 '꿈'과, 이로 인한 '감정'의 불화로 또 다른 불안정을 겪고 있는 현대의 가정 모두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쉽게 이사를 가고, 쉽게 이혼하려는 부모들에게 우리의 말을 그저 철없는 투정처럼 보지 말아 달라고, 함께 밥상에서 서로를 마주 보며 대화하고 싶다고 아이들은 말하고 있었다. 해결해 달라는 게 아니라, 그저 얘기하고 싶다고.

 결국 부서진 종이상자 집은 그저 '공간'만 공유하고 있을 뿐 본질적으로 가정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는 우리의 위태로운 가정에 대한 날 선 질문이었고, 아이들의 싸움은 그 위태로움을 해결할 하나의 방법을 제안하고 있었다. 이 글의 첫머리에서 말한 'HOUSE'의 본질은 '가옥'이 아닌, 그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식구'임을 영화 <우리집>은 그렇게 관객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이들은 종이상자 집을 부수며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아니었을까. 영화 후반, 하나에게 '우리가 이사 가도, 언니는 계속 우리 언니 해줄 거지?'라고 묻는 유미의 말에 하나는 울먹이며 '당연하지'라고 말한다. 물리적인 거리보다, 서로가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임을 아는 그 마음을 더 중요히 여기게 된 아이들. 아이들은 그 사실은 이해한 만큼 철없는 어른들보다 성숙했다.

   

 물론,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아이들은 모르는 마치 '정글'과도 같은 세상을 어른들은 오늘 하루도 헤쳐나가며 살아간다. 하루하루 무거워져 가는 일과 가정에 대한 책임 덕에 어른들은 대화할 힘조차 없다. 이제는 '아이'보다 '어른'쪽에 더 가까운 나 역시 그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영화 초반에 하나가 장을 봐서 집에 가다 말고 유미 없이 혼자 다니는 유진이를 보고 노파심에 뒤를 따르는 장면을 보며, 장바구니 안에 담겼을 냉동 고기부터 얼른 녹기 전에 냉동실에 넣어야 한다는 걱정이 앞섰기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 <우리 집>은 분명 허울뿐인 이상을 우리에게 전하는, '몽상가적인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다분히 현실 속을 살아가며, 바람직한 가정이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보는 이에게 느끼게 해주고 있다. 위에서도 말했듯, 불안정한 가정을 어떻게든 버티고 잡아 지키고자 한 것은 '아이들'이었다. 정글처럼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이 '세상'이라는 범주에서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에 지나지 않을 수 있지만,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아이들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하나의 '구성원'임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어른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사는 게 바빠 애써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분명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이 맞는 걸 알지만 철없는 어른들은 너희가 아직 어려서 모른다는 말로 그 위태로움을 방관하고, 그 울타리를 무너뜨리는 것조차 쉽게 생각한다.


 이 영화의 처음과 끝장면에는 모두 하나의 클로즈업이 등장한다. 그리고 두 장면에서 하나가 가족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 또한 똑같다.


"밥 먹자"

 

 영화의 첫 장면에서 하나의 부모가 싸워대는 통에 하나의 이 말은 제대로 들리지조차 않는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유미, 유진을 데리고 먼 길을 떠나느라 하루 동안 '가출'을 감행했고, 동분서주했던 하나의 부모와 오빠는 하루 만에 하나의 얼굴을 봤다. 하나를 보고 놀라 벙어리가 된 세 사람 앞에서, 하나의 '밥 먹자'는 말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선명하게 들린다. 바쁘고 팍팍한 현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이 그렇게 바쁘고 팍팍한 이유는 돌이켜보면 결국 소중한 '가족' 때문이다.

 영화 <우리집>은 어쩌면 그 현실이 우리의 눈을 가려 자칫 정말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할 수 있음을,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함께 밥 먹고 이야기하며 그렇게 유대감을 쌓고 하나가 되는 안정적인 '가정'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도, 어른에게도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아이들이 원하는 '안정적인 가정'은 뭔가 대단한 것을 해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밥을 먹으며 나누는 그 일상적인 작은 대화로 충분히 이뤄갈 수 있음을.


 

 개인적으로 아이들을 좋아하는 내게는, 이 영화가 전해주는 큰 의미를 떠나 그저 귀여운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큰 위안을 얻을 수 있던 영화였다. 속이 안 좋은 유진이의 손을 따주는 하나와, 검은 피를 보자마자 묵혀왔던 트림을 한껏 뱉어내는 유진이의 모습을 보며 아빠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저렇게 힘든 현실 속에서도 티 없이 맑은, 예쁜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모쪼록 우리의 아이들이 '집에 있으면 개고생'이 아니라 '집 떠나면 개고생'임을 느끼게 되는, 우리 사회의 모든 가정이 '즐거운 우리집'이 되기를 내심 바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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