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꾼? 사냥감? 영웅? 악당?

영화 <23 아이덴티티>, <언브레이커블>

by 정주원




몇 년 전에도 휠체어를 타는 저런 미치광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름이 뭐였지?
미스터 글래스.


'미스터 글래스'라는 말과 함께 Dunn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바에 앉아 있는 브루스 윌리스. 이렇다 할 반전 없이 끝나겠다 싶은 순간, 이번에도 샤말란 감독의 영화를 보며 여지없이 뒤통수를 맞고 말았다. 항상 'Happily ever after'로 끝나려는 순간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그의 반전 공식 그대로였다. M.나이트 샤말란 감독은 이렇다 할 장치 없이 단순히 구도만 비틀어서 거대한 반전을 만들어 내는 데 뛰어나다. 사실 엄밀히 반전이라 말하기 쉽진 않다. 합리화일 수 있다. 하지만 16년 전 샤말란 감독이 만든 영화 <언브레이커블>을 본 사람이라면 분명 나와 같은 기분을 느꼈으리라 생각된다. <23 아이덴티티> 영화 자체만으로도 볼거리는 적지 않았다. 주인공 케빈 역의 제임스 맥어보이는 수준급의 다중 인격자 연기를 보였다. 넷플릭스 영화 <배리>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 안야 테일러 조이도 좋은 연기로 긴박한 영화의 호흡을 잘 소화해냈다. 하지만 이 영화를 <언브레이커블>의 연장 선상에서 본다면 더 풍성하게 즐길 수 있다.


1. Hunter vs Quarry

영화 <23 아이덴티티>의 주요 인물들인 케이시와 케빈은 기본적으로 사냥꾼(Hunter)과 사냥감(Quarry)의 관계다. 하지만 쉽게 누가 사냥꾼이고 누가 사냥감이라 말할 수는 없다. 케빈에 의해 다른 친구 두 명과 납치되어 알 수 없는 밀실에 갇힌 케이시. 누가 봐도 케빈은 그녀들을 사냥해 온 사냥꾼이고 케이시는 그의 사냥감이다. 하지만 영화 중간중간 드러나는 케이시의 어린 시절은 이 둘의 구도를 점차 바꾸어 놓는다. 케이시는 어린 시절 아빠와 삼촌과 함께 사냥을 다니며 사냥하는 법을 배운다. '총신으로 사냥감을 가리고 끝까지 따라가야 한다.', '사냥은 사냥꾼과 사냥감의 끝없는 두뇌싸움이다.' 등 사냥꾼으로서의 마인드를 어려서부터 배운 케이시. 그녀는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들에 따라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그녀에게 케빈은 숲에서 만난 큰 곰과 같았던 듯하다. 공포에 떨며 탈출하기 위해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다른 두 친구와는 달리 케이시는 침착하게 케빈을 사냥해 나간다. 케빈 속의 여러 인격들과 두뇌싸움을 해 나간다.


하지만 사냥꾼처럼 보였던 케빈은 오히려 사냥감이다. 해리성 인격장애 즉, 다중 인격의 정의는 고통스러운 경험과 갈등적인 상황에 대해 자아를 방어하는 일정의 정서적인 반응이다. 나약한 사냥감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사실 케빈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모진 학대를 받으며 자랐다. 침대 밑에 숨죽인 채 항상 엄마의 눈을 피해 숨어 있어야 했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케빈'이라는 본인의 이름이 불리기를 극히 꺼리는 것을 봐도 극명히 드러난다. 사실 케빈이 아니, 케빈 몸속의 데니스, 패트리샤, 헤드윅이 세 소녀를 납치한 이유는 케빈의 몸에 24번째 인격인 <비스트>의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다. 상처받지 않고 자란 존재는 순결하지 못한 더러운 존재라는 것이 비스트의 철학이다. 그런 불순한 존재는 <비스트>의 제물로 바쳐져야 마땅한 것이다. 케빈은 동물원에서 일하며 맹수들의 습성을 자주 보아왔다. 강력한 포식자들의 모습은 언제나 약자였던 케빈의 강해지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맹수의 모습으로 그들을 처단해 인생 내내 상처만 받아온 자신의 응어리진 마음을 풀고 싶었다.


사냥꾼과 사냥감의 위치에 번갈아가며 서던 케이시와 케빈. 중간 잠깐 등장한 케빈은 총과 총알의 위치를 케이시에게 가르쳐주며 나를 죽여달라고 말한다. 케빈의 입장에서 이 모든 것들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데니스와 패트리샤, 헤드윅 세 인격들은 비스트를 깨워내고 비스트는 케이시까지 해치울 수 있는 찬스를 잡는다. 총에 맞아도 죽지 않는 비스트는 철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케이시와 대치한다. 그런데 영화 내내 대척점에 서있던 케이시와 케빈은 절정에 이르러 함께가 된다. (이 부분이 관객들의 맥이 빠지게 만들었다.) 케이시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삼촌의 학대를 받으며 자란 존재였던 것이다. 케이시의 복부에 난 학대의 상처를 바라본 비스트는 "너는 순결하구나."라는 말만 남긴 채 케이시를 살려준다. 그 상처는 그들에겐 삶의 훈장이었던 것일까.


2. Hero vs Villan

대학 풋볼 경기장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는 던은 뉴욕에서 필라델피아로 동부선 열차를 타고 가던 중 열차 사고를 당한다. 131명이 죽은 대참사에서 던은 유일한 생존자가 된다. 온몸에 털끝 하나 상처도 남기지 않은 채.

필라델피아의 또 다른 곳. 이 곳엔 유전적 결함으로 단백질이 합성되지 않는 '골형성 부전증'을 앓고 태어난 엘리야 프라이스가 있다. 살짝만 부딪혀도 뼈가 으스러지고 부서지는 고통스러운 병이다. 친구들은 그를 '미스터 글래스'라고 놀려댄다. 상심해 방 안에서만 시간을 보내려는 어린 엘리야. 그의 어머니는 엘리야가 사회 부적응자가 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런 엘리야를 위해 어머니가 준비한 것은 슈퍼 히어로의 이야기가 담긴 '만화책'이다. 몸이 약한 엘리야는 병원과 집을 전전하며 만화책을 읽는 데 열중하고, 문득 생각한다. 자기와 같은 존재를 지켜줄 수 있는, 누구보다 강한 자기와 정 반대인 사람의 존재를.


그러던 중 열차 사고에서 아무런 부상도 당하지 않은 채 살아남은 던의 소식을 듣게 된 엘리야는 그를 만나고자 한다. 그를 그가 꿈꾸던 슈퍼히어로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그러하듯이 던은 엘리야를 미친 사람 취급한다. 하지만 '살면서 한 번이라도 다쳐 본 적이 있습니까?'라는 엘리야의 물음에 조금씩 빠져드는 던. 믿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그의 인생을 되돌아볼 때 자신의 모습이 정말 엘리야의 주장에 맞아 들어간다는 것을 확인해간다. 영화 후반부 자신이 실제로 몸만 닿아도 타인의 범죄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는 던은 처음으로 자신의 비범한 능력으로 위험에 빠진 아이들을 구출해내는 데 성공한다. 엘리야의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한다. 영웅은 있는데 악당은 언제 등장하는가. 겨우 마지막에 가택을 습격해 아이들을 결박했던 그 잡범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악당 수준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것이 영화의 반전이다. 던이 자신이 슈퍼히어로임을 자각할 수 있었던 것은 '미스터 글래스'라는 슈퍼 빌런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던이 본인의 정체성을 찾음과 동시에 '미스터 글래스'도 동시에 빌런으로써 자신의 본성을 자각한다. 슈퍼히어로를 찾기 위해 거대한 인명사고를 일부러 낸 것은 다름 아닌 '미스터 글래스'였던 것이다. <23 아이덴티티>에서 케이시와 케빈이 결국엔 동질감으로 마무리되었던 것과 달리, <언브레이커블>은 친구인 줄 알았던 던과 엘리야가 결국 영웅과 악당이라는 양 끝에 서게 된다.


3. 누가 이들을 사냥꾼과 사냥감으로, 영웅과 악당으로 만들었나

두 영화의 포스터. 깨진 금들이 묘하게 연결된다. 맥어보이는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있지만, 브루스 윌리스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 두 영화를 보며 이런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과연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느냐 하는 문제이다. 내 생각에 그것은 바로 '평범한 우리들'이다.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다원성을 표방하는 듯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상식과 평범함에 갇혀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대집단은 분명히 모두를 수용할 수 없다. 무리에서 소외되는 자들이 나타나기에 마련이다. 두 영화의 배경이 되는 필라델피아는 그 소외자들의 무대다.


평범한 우리가 '미스터 글래스'를 다원성의 마음으로 포용해 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가 굳이 슈퍼 히어로를 찾아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수많은 죄 없는 생명을 앗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었을까. 던의 입장에서도 그렇다. 그는 비범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다. 하지만 상식과 평범으로 점철된 우리의 생각은 그를 일개 경비원으로 살아가게 만든다. 순수한 궁금증에 내가 병가를 낸 적이 있는지 묻는 던의 질문에 반장은 그 말을 월급을 올리기 위한 꼼수로 꼬아 듣는다. 던 스스로도 자기 생각에 갇혀 본인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사실 우리는 이것을 정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엘리야가 하는 말처럼, 우리는 평범함과 상식적이라는 단어 속에서 우리 안에 담겨있는 무한한 능력을 평생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건 아닐까. 그들은 영웅도 악당도 아닌 이 세계에 속한 다양한 사람들 중 한 개체로 살아갈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이 다르듯이 그들도 저마다의 특성을 지닌 채로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우리가 그들을 영웅과 악당으로 만들었다.


영화 <23 아이덴티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평범한 어머니의 이름으로 스스럼없이 행해진 학대는 착한 어린아이를 몸속에 22명의 자아로 분열하도록 만들었다. 삼촌의 학대는 더 예쁘고 사랑스럽게 자랄 수 있었던 케이시를 어두운 아이로 만들었다. 그리고 또 평범한 우리들은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을 무리에서 나누고 이상하게 보았다. 그리고 케빈은 우리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비스트>라고 하는 괴물을 만들어냈다. 우리들의 세상을 보는 시각이 이 모든 것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 두 영화에서 던과 케빈을 각각 꺼내와 비교해 보면 큰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두 사람이 세상에 대처하는 모습의 차이점이다. 던은 부서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다. 애초에 평범한 이들보다 강인한 캐릭터이므로 더 굳건하게 세상의 죄악에 맞선다. 그러나 케빈은 다르다. 무서운 정글과도 같은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분열한다.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낸다. <23 아이덴티티>의 원작인 <SPLIT>과 <Unbreakable>이라는 제목만 봐도 잘 드러난다.

이 두 사람은 필라델피아 3부작을 완성할 마지막 영화에 등장한다. 아마 미스터 글래스와 케이시도 한 부분을 차지하지 않을까 기대된다. <23 아이덴티티>를 보면 케빈이 기차역 플랫폼에 꽃다발을 두고 추모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을 보고 혹자는 죽은 케빈의 아버지가 <언브레이커블>의 열차 사고의 희생자가 아니냐는 추측도 나온다. 믿거나 말거나 여러 추측들이 나올수록 앞으로 샤말란의 영화를 더 기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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