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부라더>
*이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에서 제공한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갔다. 배꼽이 빠지게 웃었다. 재미있었다. 그렇지만 '이동휘와 마동석, 두 배우가 만드는 환상적인 케미가 그대로 우러난 웰메이드 무비'같은 뻔한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두 배우의 케미가 분명히 강력한 웃음을 만들어 낸 것은 맞지만, 사실 그 외의 요소들은 그리 매력적이라 할 만한 부분을 찾기 힘들었다.
영화의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엄격한 유교 규율을 모두 지키며 살아가는 안동의 어느 종갓집에서 가족에 대한 사랑을 느끼지 못한 채 집을 떠난 두 형제 석봉(마동석)과 주봉(이동휘). 어느 날 형제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고, 형제는 아버지의 삼일상을 치르기 위해, 혹은 그 와중에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다시 안동을 다시 찾는다. 그 과정에서 펼쳐지는 두 형제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스토리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이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공포(?) 등 다양한 요소를 의욕적으로 첨가하다보니, 영화 전체적인 완성도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라더'는 누군가 어떤 영화인지 묻는다면, 나는 한 번 볼만한 영화라고 추천할 것이다. 그저 두 시간 정도 웃을 만한 '킬링타임' 용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영화다. 그리고 그 외에도 영화 <부라더>는 이 땅을 오랫동안 지배해 온 '유교 문화'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내가 '웃음' 외에 <부라더>가 좋았던 지점은 이 부분이었다. 영화 <부라더>에는 '유교'라는 제도에 대해 보내는 '통쾌함'이 담겨 있었다.
영화에서 석봉과 주봉은 '탕아'다. 뼈대있는 안동 종갓집의 종손이지만, 집안을 내팽개친 채 집을 박차고 나왔다. 집안의 지체높은 어르신들에게 두 사람은 골칫거리이고, 문제아일 뿐이다. 하지만 석봉과 주봉은 집안 어른들에게 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상복을 발로 차며, 또는 어른들의 말씀에 비아냥대며 그 과정에서 웃음을 자아낸다.
하지만 그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의 기저에는 그 놈의 조상 때문에, 의례 때문에, 제사 때문에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있다. 석봉은 망나니 같은 짓만 하고 돌아다닌다며 자신을 타박하는 집안 어른에게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 말하지 않는다. 당신들이 그렇게도 챙기는 제사 때문에, 평생 죽은 사람들 챙기며 힘들고 고달프게 사시다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는 어떻게 책임질꺼냐며 오히려 더 큰 소리를 친다.
이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건 '웃음'만이 아니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예절과 준칙만을 강요하는 유교 문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종갓집. 그리고 이런 꼰대스러운 문화에 저항하는 두 형제의 말과 행동에 우리는 공감하고, 거기서 '카타르시스'와 '통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종갓집이라는 설정을 빼더라도 기제사나 명절에 차례를 지내 본 사람이라면 큰 집 주방에서 제사 음식 만들랴, 제사상 차리랴, 제사 후에 제기를 닦고 설거지 하랴 허리가 휘어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 일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른들이 식사하시는 큰 상 옆에 작은 상을 펴놓고 밥을 먹는 어머니의 모습도. 그런 어머니들에게 연민을 느껴본 자식이라면 분명 석봉이 어른들에게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기에 영화 내내 고사성어와 어려운 한자어를 쓰시며 체통을 지키던 어르신이 석봉에게 쌍욕(?)을 퍼붓는 장면은 더 큰 웃음을 자아낸다.
그리고 석봉과 주봉 두 형제 간의 이야기도 주목할 만하다. 동생 주봉은 형 석봉에게 매우 억울하다. 이것 역시 우리나라 특유의 '유교 문화' 때문이다. 사실 형 석봉보다 더 명석하고 총명한 것은 동생 주봉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석봉은 형이라는 이유만으로, 종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집안의 모든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했다. 주봉이 열심히 모은 유학자금도, 결혼자금도 형 석봉의 말도 안되는 유물 발굴 사업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로 인해 파혼까지 당했다. 동생 주봉도 형 석봉처럼 어머니에 대한 연민을 품고 있었지만, 집안을 등진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형 '석봉'에 대한 미움 때문이었다.
우리는 '유교 문화'는 쉽게 '꼰대'라는 말로 치환한다. 그저 지켜야한다고 강요받았을 뿐, 내가 그것을 지켜야하는 이유는 알 수 없다. 부조리하다.
세상의 모든 제도나, 문화에는 '본질'과 '형식'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모든 문화와 제도들의 시작은 '본질'로써 시작된다. 본질이 있어야 그에 맞는 형식이 생겨난다. 유교도 그렇다. 사상가 공자는 온갖 악행과 패륜이 자연스럽게 행해지던 춘추 시대에 사회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유교라는 '사상'을 창시했다.
분명 나도 허례허식만 남아있는 듯한 유교 문화를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지만, 유교 문화를 무조건 나쁜 문화, 예절을 강요하기만 하는 '꼰대 문화'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분명 유교는 그 옛날 조선 시대부터 이 사회를 지탱해 온 중요한 문화 유산일테니까. 하지만 분명히 말하고 싶은 건, 우리 시대에 유교는 '형식'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어른들은 그 본질을 자손들에게 알려주려 하지 않고, 그저 의례와 예절같은 형식만 가르친 채, 맹목적으로 이를 따르기를 강요한다. 우리는 그런 어른들을 '꼰대'라고 부르는 것이다.
영화 <부라더>는 말미에 가족이라는 이름이 주는 감동을 통해 '형식'이 아닌 '본질'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아서, 그저 집안의 종이라고 여기는 것만 같아서 형제는 아버지를 미워했다. 하지만 조상들 앞에서 어머니에게 냉정하기만 한 것 같았던 아버지는 누구보다 아내를 사랑했고, 평생 고생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두 형제는 영화 속에서 여러 사건들을 거치며 그런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알게 된다.
유교를 생각할 때,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삼강오륜'의 '삼강'은 임금은 신하의 근본이고[君爲臣綱(군위신강)], 어버이는 자식의 근본이며[父爲子綱(부위자강)], 남편은 부인의 근본[夫爲婦綱(부위부강)]이라는 뜻이다. 그 '근본'이라는 말을 '사랑'이라고 바꾸면 어떻게 될까. 임금과 신하는 서로 사랑해야 하고, 어버이와 자식은 서로 사랑해야 하며, 남편과 부인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바꿔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꼰대스러운 형식에 파묻혀 쉽게 잊어버리는 유교의 '본질'은 바로 '사랑'일 것이다. 자식과 부모가 서로를 죽이고, 신하가 임금을 배반하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공자는 세상에 '사랑'의 씨앗을 심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몇 백 년, 몇 천 년의 세월을 거치며 '사랑'이라는 본질은 약화되고, 낡은 '형식'만이 남으면서 유교 문화는 '꼰대 문화'가 되어 버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본질' 없이 태어난 '형식'은 없다. 석봉과 주봉 두 형제는 어머니를 죽인 줄만 알았던, 형에게 모든 것을 뺏긴 줄만 알았던 그 거지같고 답답하고 꼰대스러운 '형식' 안에서 그 '본질'을, 다시 말해 '사랑'을 느꼈을 것이다.
물론 그렇기에 맹목적으로 형식을 따르자는 말은 아니다. 본질을 잊은 채 허례허식만을 강요하는 꼰대스러운 어른들도, 답답한 유교 예절에 반감을 품고 있는 젊은이들도 그 본질을 잊지 말자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본질이 중심이 되어야 형식도 변할 수 있다. '본질'이 중심을 잘 잡고 상황에 맞게 형식이 변화할 수 있어야 그 문화는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다. '온고지신'이라는 말이 그렇기에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닐까.
'웃음' 외에 <부라더>가 가지는 의미를 찾으려다 너무 멀리 와버린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인이라면 분명 공감할 수 있는 '유교' 문화에 대한 장면들은 영화에 분명 시너지 효과를 가져왔고, 웃음과 함께 통쾌함과 감동까지 안겨줬다. 마동석, 이동휘 두 배우가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형제의 모습을 너무도 잘 표현해 주었기에 더 공감할 수 있었고, 자칫 삼류 영화로 빠질 수 있었던 스토리를 살려낸 것이라 생각한다.
리뷰를 쓰면서 더 확실해지는 듯 하다. 분명 <부라더>에는 '킬링타임용 웃음' 외에도 생각해 볼 만한 지점들이 존재한다. '유교 문화'에 답답함을 느꼈던 젊은이라면, 예의 없는 젊은이들에게 실망했던 어르신들이라면 이 영화를 통해 '형식'이라는 가면에 가려진 '본질'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