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이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가 제공한 시사회를 통해 작성되었습니다.
여주인공 '사쿠라(桜)'가 남주인공 '시가 하루키(春樹)'에게 마음이 이끌렸던 것도, 자신이 죽은 뒤 '공병문고'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하루키를 선택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을까.
벚꽃이 영원히 아름답기 위해 필요한 것은 '봄의 나무(春樹)'였기 때문에.
그저 그런 일본영화였다. 지금까지 많이 등장한 일본 학원물 멜로에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장면들과 대사들. 직언하자면, 스토리나 플롯 자체에 크게 매력을 느낄 만한 부분은 없었다. (*특히 여주인공 '사쿠라'가 죽는 장면은 너무나 터무니 없었던 나머지, 상영관에서 너무 크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사쿠라가 죽는다는 사실은 예고편이나 줄거리만 봐도 알 수 있는 내용이므로 크게 스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일단 제목부터 '어그로'가 너무 심하다. 췌장을 먹고 싶다니.
첫 문장을 조금 정정해야겠다.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그저 그런 일본 영화로 '끝날 수도' 있었다. '끝날 수도' 있었다는 것은, 곱씹어보니 그래도 이 영화에 괄목할 만한 지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마음 속에 계속 남아 있는 몽글몽글한 잔상들에서 찾을 수 있었다. 몸은 어른이 되었지만 마음은 아직도 어리기만 한, 더 풋풋했고 그리운 우리의 사춘기 시절.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소년이고 소녀였던 우리가 그 시절 품었던 생각과 감정들을 영상으로, 대사로 풀어놓음으로써 효과적으로 관객들에게 아련한 그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영화의 내용을 떠나 사춘기 시절의 친구의 소중함, 나를 향해 웃어주는 이성의 모습을 보았을 때의 설렘, 그리고 좋아하는 누군가 앞에서 태연한 척 하고 싶지만 태연해지지 않는, 두근대는 사춘기 시절 우리의 심장을 이 영화는 다시 추억하게 해줬다.
물론 신파적이다. 여주인공 사쿠라는 죽을 병에 걸렸고, 남자 주인공 '시가'는 그녀와 함께 아름다운 시간을 함께 하다 결국 그녀가 떠나고 눈물을 흘린다. 분명 이 영화의 완성도는 '죽음'이라고 하는 주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죽음'을 대하는 사쿠라의 태도는 자칫 그저 신파적일 수 밖에 없었을 이야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누구도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 섰을 때 초연해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해야 할 소녀 사쿠라는 안타깝게도 어린 나이부터 '죽음'과 더 친한 아이였다. 하지만 사쿠라는 반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누구보다 활기찬 소녀다. 오히려 진짜 죽음의 곁에 살고 있는 사람일수록 그것에 더 초연해지게 되는 것 같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죽음'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야만이 '죽음'에 초연해 질 수 있다니.
그런 사쿠라가 친구가 되고자 목표로 삼은 것이 친구가 없다시피 하고 반에서 가장 조용한 남자 아이 '시가'다. 시가는 누군가와 친해지는 법을 몰랐다. 스스로 나 따위와 친구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을꺼라 여기고, 친구 대신 책과 친해진 소년이었다. 사쿠라가 쓰는 일기 '공병문고'는 시가와 사쿠라를 친구로 만들어 준다. 사쿠라는 그런 시가에게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는 법'을 가르친다. 수줍음 많은 사춘기 소년들이 대개 그렇듯,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사쿠라에게 시가는 어쩔 줄 모르고 쩔쩔 매지만, 진심으로 다가오는 사쿠라에게 마음을 연다.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에서 시가와 사쿠라가 나누는 이 오묘한 감정은 '사랑'이라 부르기엔 너무 순수하고 '우정'이라 부르기엔 그보다는 조금 특별한 느낌이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점점 '사랑'과 '우정'을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랑'과 '우정'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다. 당신은 사랑하는 이를 애인이라고, 연인이라고 부르기 이전에 남자친구, 여자친구라고 부른다. '사랑'이 순간의 불꽃같은 것이라면, 그 불꽃을 오래도록 유지하는 것은 '우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사랑과 우정을 다르게 생각하려 할까. '사랑'은 쉽지만, '우정'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오해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내 말은 '사랑'을 쉬운 것으로 치부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것이 쉽다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쉽다는 것이다. 순간에 화려한 불꽃에 취해, '사랑'만을 좇는다면 그 순간은 화려할 수 있지만, 그 불꽃은 금새 사그라든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없다. 불꽃이 피어오를 때처럼 화려하진 않아도, 오래도록 은은하게 그 불꽃을 지키는 '우정', 그것이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만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시가와 사쿠라가 나눈 그 '사랑과 우정 사이'의 그 감정. 그게 아마도 바로 어른이 된 우리가 잊었던, 쉽게 '사랑'이라고만 말해 왔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벚꽃은 지는 게 아니야. 지는 척 하는 거지.
벚꽃은 지면서 나무에 꽃싹을 틔워. 다시 피어날 준비를 하는 거야."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장면은, 벚꽃을 보러가고 싶다며 시가와 사쿠라가 통화를 하는 장면이다. 많은 사람들이 벚꽃이 하늘하늘 휘날리는 마지막 장면을 아름답다 하겠지만, 이 장면에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다 담겨있다.
소녀의 이름인 사쿠라(桜). 그녀의 이름을 해석하면 말 그대로 '벚꽃'이다. 그리고 소녀의 삶은 '벚꽃'을 닮아 있다. 누구보다 화려하게 꽃피지만, 아쉽게도 빠르게 져버린다. 누구보다 아름다운 미소를 가졌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소녀 '사쿠라'처럼.
하지만 그녀는 말한다. 벚꽃은 지는 게 아니라고. 지면서 나무에 꽃싹을 틔우고, 다시 피어날 준비를 하는 것이기에 벚꽃은 지는게 아니라고. 그 말을 듣고 있는 소년의 이름은 '시가 하루키'. '하루키', 한자로 쓰면 '춘수(春樹)', 봄의 나무라는 뜻이다. 시가 하루키도 마치 자기 이름처럼 '나무'같은 소년이다. 반에서 가장 조용하고 말이 없으며 책만 읽는다. 하지만 소년은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치 자신의 이름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있는 '나무(樹)'처럼.
영화에서 사쿠라는 말했다. 죽고 싶지 않다고. 소중한 사람들 곁에서 영원히 살고 싶다고. 죽음 앞에 초연한 듯 보였던 소녀는 누구보다 죽음이 두렵기만 한 소녀였다. 사쿠라가 하루키에게 마음이 이끌렸던 것도, 자신이 죽은 뒤 '공병문고'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하루키를 선택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을까. 벚꽃이 영원히 아름답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나무'였기 때문에. 소년 '하루키'와 소녀 '사쿠라'의 이름은 그 의미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사쿠라 덕분에 시가 하루키는 사람들과 얘기 하는 법, 친구가 되는 법을 배웠다. 그 과정에서 시가 하루키라는 '나무'에는 사쿠라의 '꽃싹'이 심어졌으리라.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서 오랜 세월 후에 그 '봄의 나무'는 '벚꽃'을 다시 피워내면서, 관객들에게 '뭉클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뻔한 학원물 멜로 영화로 끝날 수 있었지만, 우리가 어느새 잊고 있었던 것들을 다시 기억할 수 있게 해준 좋은 영화였다. 어른이 되고, 각박한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는 쉽게 '우정'의 의미를 잊어버리게 되었다. 어른이 되서 만난 친구는 사춘기 시절 만난 친구와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더 계산적이고, 속물적인 사람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내 이익과 맞지 않는다면 '우정'도, '사랑'도 쉽게 내팽개 칠 수 있는 게 어른이 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지금도 '사랑'을 하며 산다.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우정'의 가치를 잃어버리면 '사랑'은 하기도 쉽지만 버리기도 쉬워진다.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아마 우리에게 '사랑'에 가려 빛이 바랜 '우정'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뻔함에도 볼만한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