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 그 빛으로 가득찬 찰나

영화 <빛나는>

by 정주원

*이 영화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가 제공한 시사회를 관람한 후 작성되었습니다.


실명. 失明. 빛을 잃다.

영화는 점점 희미해져가는 나카모리의 시점을 보여주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시력을 잃어갈수록 점점 세상은 검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하얗게 변해간다. 나카모리가 완전히 시력을 잃은 순간, 그의 눈 앞은 완벽히 밝은 빛으로 가득찬다. 그의 세상이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빛으로 가득찬 그 순간. 어쩌면 빛을 모두 잃은 실명의 순간은 그 사람이 태어나서 봐왔던 모든 시간들 중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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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명. 시력을 잃어 앞을 볼 수 없는 상태.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빛을 잃는다는 것이다. 빛을 상실한 상태. 새삼스레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사람의 오감이라고 하는 시각, 후각, 청각, 촉각, 미각. 어느 것도 덜 중요하다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일반적인, 소위 말하는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려면 다섯 가지 감각이 모두 적절히 자기 역할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다른 모든 감각들 중에서도, 우리는 시각을 다른 네 개의 감각보다 훨씬 중요한 듯 여긴다. 아마도 그래서 시각을 잃는 일에 대해 '실명(失明)' 이라는 좀 더 특별한 단어를 부여하게 된 것은 아닐까.


'시각 신경을 자극하여 물체를 볼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전자기파' '빛'이라는 것 그 자체의 정의. '빛'의 가장 원초적인 본질. 하지만 우리에게 '빛'은 단순한 전자기파가 아니다. 인간에게 '빛'은 '희망'이다. 우리는 수평선 아래에서 힘차게 떠오르는 해와 그것이 내뿜는 빛을 바라보며 희망을 생각해왔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던 모 대통령의 말처럼, 어느 시대엔 '어둠'은 독재를 상징하고 '빛'은 민주화를 상징하기도 했다. 서양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기점이 되는 계몽 시대. Enlightenment Age. Enlightenment는 빛이나, 빛에 의해서 밝아지는 것을 뜻한다. 그렇기에 계몽 이전의 시대를 우리는 암흑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대에 암흑은 '구습이 지배하는 세상 속의 미성숙한 인간 사회'라면, 빛은 '이성을 기반으로 한 인간 역사의 새로운 진화의 한 페이지'이다. 그리고 우리 인류는 지금도 발전과 번영을 위해 또 다른 빛을 찾아 나서고 있다. 인간의 역사는 어둠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빛'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우리에게 '빛'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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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였을까. 영화 <빛나는>의 주인공은 시각을, 빛을 점점 잃어가는 사진작가 나카모리다. 그는 사진작가였다. 카메라는 그에게 '또 다른 심장'이었다. 그는 뷰파인더를 통해 세상을 보며, 이 넓은 세상 곳곳의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찰나의 순간을 영원히 박제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카메라는 심장이자, 또 다른 그의 '눈'이었던 것이다. '빛'과 함께 살아가던 나카모리가 '눈'에서, '얼굴'에서, '삶'에서 조금씩 빛을 잃어가는 모습은 보는 관객들에게 조금은 더 묵직하게 다가왔다.


영화 <빛나는>의 또 다른 주인공인 미사코는 시각 장애인들이 영화를 관람할 수 있도록 '음성 해설'을 만드는 작가다. 나카모리와 미사코는 어느 영화의 '음성 해설'을 만드는 제작 현장에서 만나게 된다. 미사코의 '음성 해설'을 시각 장애인들에게 실제로 들려주고, 피드백을 받는 시간에 나카모리는 미사코가 만든 대본에 혹평을 늘어놓는다. 미사코가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그녀의 해설은 장면을 너무 자세히 설명하려 하는 탓에 영화를 보는, 아니 듣는 이들이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줄이고, 오히려 영화 감상을 방해한다는 것이 나카모리의 평이었다.

이후에도 나카모리와 미사코는 사사건건 부딪힌다. 해설이 너무 장황하다 하여 표현을 덜어내면, 나카모리는 미사코에게 오히려 회피하려 했다며, 설명이 너무 없어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다고 혹평한다. 결국 두 사람은 언쟁을 벌이게 된다.

"그건 제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의 상상력이 문제인 거에요."


미사코의 말에 나카모리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방을 나선다. 그의 표정처럼 얼어붙은 분위기로 끝나버린 그 날의 모임. 미사코의 동료는 한 마디를 남긴 채 방을 나선다.


과연 정말 상상력이 없는 사람이 누굴까.


시각 장애인들은 우리가 당연히 지나치는 사물과 풍경에서 우리가 볼 수 없고 것들을 보고, 느낄 수 없는 것들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소금은 '맨 우측에 놓여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집에 가는 길, 육교 난간 철제 기둥의 감촉, 그리고 그 기둥의 갯수는 그들을 집으로 이끄는 등불이요, 지도다. 그리고 그들에게 계단은 '두려움'이다. 우리에겐 아무것도 아닌 계단이, 그들에겐 매순간 낭떠러지 앞에 선 것과 같은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그리고 그들이 눈에서 빛을 잃었다고 해서, 뿌연 눈동자를 지녔다고 해서 그들이 어둠 속에 사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빛'을 만들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상상력'이라고 하는 빛을 스스로 만들어내며 그들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앞을 볼 수 없었던 레이 찰스가, 스티비 원더가 멀쩡한 사람들만큼이나, 아니 그런 사람들 이상으로 아름다운 멜로디를 뿜어낼 수 있었던 것 이유다. 그들은 빛을 만들어야 했기에,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보다 몇 백 배, 아니 몇 천 배는 더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사람들이다.


미사코는 분명 열심히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임했다. 하지만 그녀의 해설은 영화를 '보며' 이뤄졌다. 누군가의 '본다'는 행위에는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주관이 개입한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영화가 품고 있는 '거대한 세계'를 보고, 들으며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미사코 '개인'의 주관이 담긴 문장은 그 세계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도록 방해하고 있었다. 그녀가 하고 있는 일은 그녀가 생각한 것보다 무거운 책임감을 짊어진 일이었다.


나카모리는 아직 완전히 시력을 잃지 않은 사람이기도 했거니와, 눈 앞의 사물과 세상에 대해 누구보다 뚜렷한 가치관과 주관을 가졌을 사진 작가였다. 그렇기에 마음대로 시각 장애인들의 상상의 영역을 침범하는 듯한 그녀의 해설에 더욱 거부감을 느꼈을 것이다.


'미사코'도 이 영화에선 무언가를 상실한 인물이다. 미사코는 치매를 앓고 있는 노모를 두고 살며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어릴 때 실종되었다. '치매'라는 게 어떤 병인가. 머리 속의 모든 기억들을 서서히, 혹은 빠르게 잃어가는 병이다. 삶의 모든 순간과 그에 대한 기억이 '빛'이라면 망각은 '어둠'이다. 그녀의 어머니도 결국 '빛'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미사코에게 '아버지'는, 그녀의 기억 속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 조각의 '어둠'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지갑 속에 있는 내용물들을 빠짐 없이 외우며, 아버지와 함께 했던 기억을 잊지 않으려 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상실'이라고 하는 것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다. 앞이 점점 보이지 않는 나카모리는 그런 와중에도 손에서 카메라를 놓지 못한다. '미사코'도 사라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놓지 못한 채 붙잡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 이들에게 영화 속의 영화, 즉 미사코가 극중에서 '음성 해설'을 제작하고 있는 영화의 한 대사가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눈 앞에서 사라지는 것 만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없어."


이 한 마디가,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그것이 실명이던, 영원한 죽음이던 내가 빛을 잃은 순간 마지막으로 본 것. 눈 앞에서 사라진 것. 그 헤아릴 수 없는 슬픔과 공허함이 담고 있는 아름다움. 정말 그것만큼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나카모리는 결국 그의 심장과도 같던 카메라를 찬란히 빛나는 석양 속으로 던져버렸다.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 박제해 오던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하려는 찰나에 그의 카메라를 던져버렸다.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카메라가 그의 눈 앞에서 사라지는 그 순간, 그것이 그가 바라본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아니었을까. 그 누구도 박제할 수 없고 볼 수도 없는, 나카모리 그 혼자만이 알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라스트 씬.


참으로 섬세한 영화였다. 어느 하나 허투루 담겨진 장면도, 소리도 없었고 모든 장면들이 묵직한 무언가를 보는 이에게 안겨주었다.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의 무거움, 그리고 '상실'한다고 하는 것을 무조건 '공허함'으로 연결할 수 없다는 것을 영화 <빛나는>은 말하고 있었다. '빛'은 앞을 볼 수 있는 이에게도, 빛을 잃은(失明) 이에게도, 모두에게 '삶의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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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점점 희미해져가는 나카모리의 시점을 보여주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시력을 잃어갈수록 점점 세상은 검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하얗게 변해간다. 나카모리가 완전히 시력을 잃은 순간, 그의 눈 앞은 완벽히 밝은 빛으로 가득찬다. 그의 세상이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빛으로 가득찬 그 순간. 어쩌면 빛을 모두 잃은 실명의 순간은 그 사람이 태어나서 봐왔던 모든 시간들 중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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