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스케치북'

영화 <우리의 20세기>

by 정주원


"인간 생명의 자연적 범주와 관계하는 사람"


요즘 서점 서가를 지나칠 때 많이 볼 수 있는 <라틴어 수업>이란 책은 '엄마'라는 단어의 어원을 잘 설명하고 있다. 고대인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는 한계가 있고, 척도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인도 유럽어는 'M'의 음가를 사용했다. 그래서 전 세계의 '엄마'라는 뜻을 지닌 단어를 분석해 보면 모두 '마(M)'의 음가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연적 범주 안에서만 살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사회적 범주 안에서도 살아야 하며, 내 관념 속의 철학적 범주 안에서도 살아가야 한다. 다른 생물과 달리 생각하며 살아가는 '호모 사피엔스'로 태어났기에 겪는 첫 번째 혼란의 관문이 바로 '사춘기'이다.

자연적 범주에서 엄마에게 배울 것은 '사춘기' 이전에 이미 끝난다. 2차 성징이 오고, 이제는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 아이는, 더 이상 부모의, 보호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사실 '사춘기'를 기점으로 자연적 범주로서 자녀에 대한 부모의 역할은 끝났다고 볼 수 있다. '사춘기'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재정립되는 시기인 것이다.

영화 <우리의 20세기>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꼰대'가 등장하지 않는 영화라는 것이었다. 영화는 '무엇이 올바른 인생이다' 혹은 '이것이 아름다운 인생이다'라고 정의 내리지 않는다. 그저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는, 누군가의 인생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사회 속에서 누군가의 어머니, 아들, 세입자, 친구의 이름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아무도 그 역할을 종용하지 않는다. 그저 지구라는 별을 여행하는 '여행자'로써 각각의 인물들의 삶을 조명한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 '제이미'를 위해 엄마 '도로시아'는 억지로 아들을 억압하지도, 특정한 삶의 방식을 강요하지 않는다. 도로시아는 그저 아들을, 아들이 빠져있는 것을, 아들이 사는 시대를 이해하고 싶어 한다. 쉽게 이렇게 사는 것이 정답이라고 가르칠 수 없다. '모두에게 인생은 처음 살아보는 것'이니까. 그래서 도로시아는 집에 세 들어 사는 24세의 포토그래퍼 애비와, 제이미의 가장 친한 친구인 17세의 줄리에게 '제이미'의 엄마가 돼 줄 것을 부탁한다. '자연적 범주'로서 해줄 수 있는 엄마의 역할만으로는 분명 이제는 한계가 있음을, 그것만으로는 제이미와 소통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에. '사회적 범주'에서 제이미에게 알맞은 조언과 충고를 해 줄 수 있는 또 다른 엄마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도로시아는 제이미가 듣는 음악을 들으며, 요즘 아이들이 자주 가는 클럽에도 가보며 아들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함께 본 여자 친구는 내게 엄마 '도로시아'가 아들 '제이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너무 멋있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사춘기의 부모 자식 간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조건 '꼰대'처럼 부모의 방식을 강요하고, 부모가 옳다고 믿는 길을 억지로 걸어가야 하는 게 이 땅에 사는 자녀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엄마 '도로시아'가 우리가 보는 보통의 부모들과 달랐던 것은, 자신의 인생을 존중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들 '제이미'처럼, 엄마 '도로시아'도 살면서 처음으로 50대를 보내고 있는 사람이다. 아들을 끔찍히 사랑하는 만큼이나 아직까지도 누군가 사랑하고 싶고,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을 해보고 싶은,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놀고 싶은 제이미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부모들이 아들의 삶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자식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부모는 그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어머니들은, 부모님들은 자식이 태어나는 순간, 자신의 삶을 포기한다. 오직 자식의 성공적인 삶을 위해 스스로의 인생을 희생하고, 자식에게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아마 사춘기에 부모님과 싸우며 이런 말 한 번쯤 안 들어본 자식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자식이 태어나는 순간 자신의 인생의 스케치북을 덮어버린다. 그리고는 자기 자녀의 스케치북에 자신의 인생까지 그리려고 한다. 하지만 자식들은 이해할 수 없다. 왜 내 인생의 스케치북에 자꾸 엄마가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지. 결국 거기서 갈등이 시작되고, 충돌이 시작된다.


자녀의 입장에서 사춘기는, 태산 같기만 하던 부모님의 작고 초라한 모습을 처음으로 보는 순간이다. 부모님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한, 고마운 분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다. 하지만 몸이 크고, 머리가 큰 지금 부모님은 그것을 빌미로 내 인생을 사사건건 간섭하려고 하는 족쇄일 뿐이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후 중년이 된 자식과, 노년이 된 부모님 사이의 관계는 당연스럽게 눈물이 흐르는 미안함과 연민의 관계로 귀결된다. 잘난 인생을 살았기에 자신의 삶만이 정답이라고 여기는 '꼰대'도 있지만, 세상에는 아쉬움만 남은 인생을 살았기에 내 자식에겐 그런 인생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꼰대'가 되는 사람들도 못지않게 많다.

부모님들은 절대 자신의 스케치북을 덮으면 안 된다. 물론 아이가 그려나갈 인생을 위해 연필을 준비해주고, 물감을 준비해줘야 하는 것은 부모의 책임이다. 사춘기 이후의 자녀는 부모가 그린 인생의 그림을 보며 '사회적 범주'의 사람으로 성장해 나간다. 하지만 참고하고 귀감 삼을 만한 부모의 그림이 없다면, 그 순간부터 자녀에게 부모는 제대로 된 인생도 살지 못하면서 내 인생에 참견만 하는 사람이 된다. 그 누구도 부모가 되기 위해서, 자식을 키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스케치북을 덮어야 한다고 말한 적은 없다. 자식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부모가 없듯이, 부모가 불행하길 바라는 자식 또한 어디에도 없다.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부모도 없고, 스승도 없다. 우리 모두가 결핍을 지니고 태어나기 때문에. 이 영화에 등장하는 3명의 여인 도로시아, 애비, 줄리도 그렇다. 애비는 어린 시절 약을 잘못 먹은 어머니 때문에 자녀를 가질 수 없는 여성이었고, 줄리 역시 제이미처럼 여러 남자를 만나며 위태로운 사춘기를 보내는 아이다.


세상에는 완벽한 부모도, 스승도 없기에 오직 완벽하게 가르침만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를 가르치며 가르치는 이들 스스로도 배움을 얻는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가르치고, 배우며 서로의 결핍된 부분을 채워나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지구의 하늘 아래 우리 모두는 결국 왔다가, 떠나갈 여행자 들일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함께 그림을 그려나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부모는 자녀에게서, 자녀는 부모에게서, 또는 친구에게서, 다른 누군가와.. 아니, 구태의연한 역할과 이름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저 이 곳을 함께 여행하는 하나의 인연으로써 소통하며 때로는 가르치고, 때로는 배우며 자신의 스케치북을 완성해야 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우리의 20세기>의 마지막 장면은 도로시아가 운전하는 자동차를 잡고 보드를 타며 함께 길을 가는 제이미의 모습으로 끝난다. 사실 도로시아와 제이미도 영화 내내 충돌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애비에게, 친구인 줄리에게, 엄마의 역할을 맡긴 도로시아에게 제이미는 화를 낸다. 자신에게 그런 엄마는 필요하지 않다며. 물론 완벽히 충돌이 없는 부모 자식은 있을 수 없다. 결국 사람이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니까.

이 영화에는 유독 구불구불한 길을 운전해가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는데, 마치 우리의 인생길을 보는 듯하다. 우리의 인생은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구불구불한 길이 계속될 뿐. 영화 내내 제이미는 도로시아의 차를 함께 타고 이동했다. 그리고 차 안에서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서로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엄마는 차를 타고, 아들은 보드를 타며 함께 길을 달리는 모습. 엄마와 아들로서의 관계를 떠나 이 세상을 사는 우리가 견지해야할 자세가 저런 것은 아닐까.

결국 도로시아는 새로운 사랑을 만나, 함께 경비행기를 타며 세상을 날아다녔고, 줄리는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파리로 이사를 갔고, 애비도 자신을 사랑해 줄 수 있는 남자를 만났다. 모두가 남은 인생 동안 훌륭하게 자신의 그림을 그려나갔다. 물론 제이미도 그랬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더 이상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고 말하는 부모님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하게 잘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죽기 직전엔 아쉬움이 남는 것이 인생일진대, 덮어버린 스케치북 위로 아쉬움과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인생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사춘기'를 기점으로 이제는 자식에게 스케치북을 펴주고, 오롯이 연필 하나를 내어주자. 그리고 그 아이가 그려나가는 그림을 보며 부모님도 자신의 인생을 멋지게 그려나가자. 그렇게 모두가 아름다웠다, 즐거웠다 생각할 수 있는 인생을 그려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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