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이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가 제공한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더 이상 새로운 친구를 만드는 일이 힘들어지는 듯한 시기가 있다. 분명 사회생활을 하며 더 다양하고, 수적으로도 더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도 별다르게 새로운 사람들과 친교를 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흐르는 인생 속에서 스쳐가는 수많은 인연들을 건져내기보다는, 그저 가던 대로 흘려보내는 일이 훨씬 많아졌다.
이와 동시에 내 머리를 스치는 생각은, 이제는 내가 순수했던 시절 건져 올렸던 인연과 우정들을 얼마나 견고하게 만드는지가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가 않다. 처음 우정을 쌓았던 어린 시절의 우리가 마치 액체 같았다면, 동네와 학교라는 작은 틀을 벗어나 사회 속에 자리 잡은 우리는 마치 단단한 돌멩이 같아졌기 때문이리라. 사회생활을 하면서 우리 각자에게 어느 순간 주어지고, 또 어느 순간 확정되어버린 '조건'과 '능력'과 같은 것들은 액체 같았던 우리를 점점 단단하게 굳히고, 어느새 돌멩이 같은 사람들이 되어버렸으니까.
우리는 함께 어울리기보다는, 사회 속에서 '잘 나간다' 혹은 '되는 일이 없다'는 말로 흔히 규정되는 우리의 '조건'과 '능력' 때문에 돌이 부딪히든 무언가 안 맞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부딪히지 않기 위해 눈치를 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순수한 시절 우리가 건져 올렸던 인연은 어느새 흐르는 인생 저편으로 사라진다.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의 두 주인공, 칠월과 안생은 인생 속에서 우리가 겪는 인연과 우정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두 명의 귀여운 소녀가 우정의 빛나고 아름다운 면만을 이야기하는 뻔한 영화는 아니었다. 서로가 다를 수밖에 없는 인생 여정을 걸으며,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조건과 '능력' 때문에 싸우기도 하고 눈물 흘리기도 하는 우정의 어두운 뒷면을 프레임 안에 효과적으로 녹여냈다. 특히 '안생'을 연기한 중국의 떠오르는 '국민 여동생' 주동우는 길에서 떠돌다 27살에 죽겠다는 꿈을 가진 자유로운 영혼의 모습을 특유의 능청스러운 표정과 대사로 잘 표현해냈다. 또 '칠월'을 연기한 마사순도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며 평범하게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은 소녀의 모습을 아름답게, 그래서 때로는 슬프게 연기했다. 관객들 모두가 그녀들의 우정에 웃음 지었고, 눈물지었다.
하지만 스토리 라인 상의 억지스러운 몇 가지 플롯들은 좀 아쉬웠다. 칠월과 안생을 '소울 메이트'라는 말 아래 묶어내기 위한 진가신 감독의 노력이었을 테다. 조금만 더 자세히 말하자면, 칠월과 안생의 인생을 정확히 '대칭'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칠월과 안생은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소울메이트'이지만, 인생의 여정은 정확히 극과 극에 있다고 할 만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여정 속에서 두 사람은 재회했음에도 거대한 바다를 사이에 둔 두 사람처럼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둘의 인생은 마치 칠월이 안생인 것처럼, 안생이 칠월인 것처럼 정확히 반대로 바뀐다.
아쉽게도 감독의 그러한 시도는 영화의 스토리 라인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물론 그 자체는 영화를 만든 감독 나름대로의 철학일 수도 있고, 시도 자체를 나쁘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너무도 달라 보였던 두 사람이, 결국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정확히 반대로 흘러가면서 대칭으로 겹쳐지는, 결국은 크게 보면 같은 모양의 인생을 산 것이었다는 플롯에는 분명 감독만의 메시지가 존재했다. '영화'라는 매체는 내 머리 속에만 존재하는, 그렇지만 비현실적이라 느껴지는 생각들을 카메라를 매개로 시험해 볼 수 있는 거대한 시험의 장이라는 점에서도 감독은 분명 자신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자기 영화에 담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어떻게 두 사람의 인생이 정확히 '대칭'일 수 있을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생 여정의 수는 이 세상에 살다가 떠난, 지금 살고 있는, 앞으로 태어날 사람의 수와 같을 텐데.
하지만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는 칠월의 남자 친구 '가명'을 결혼식 전날 도망가게 만들고 (매우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분명 건강하다던 칠월을 갑작스러운 과다 출혈로 죽게 만들었다. 안생이 원하던 27살에 죽게 되는 인생을 칠월에게로 옮기기 위해. 진가신 감독은 그렇게 두 친구의 인생에 대칭성을 유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가장 자연스러워야 할 부분에 가미된 인위적인 설정은 전체적인 영화의 이야기에 활력을 앗아가 버리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이 세상에서, 인생의 여정까지 나와 닮아있는 '소울메이트'를 바라는 건 너무 과한 요구는 아닐까.
서로 영적인 깊은 연결을 느끼는, 친구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두 사람을 '소울메이트'라 칭하는 것이기에, 이야기를 통해 칠월과 안생을 인위적으로 연결 지어야 했을 수도 있다. 사실 정확히 어느 정도의 우정을 '소울메이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조금은 애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서로 다른 두 자아가 아무리 서로를 잘 이해하고, 깊은 우정을 나누고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우정을 '칠월은 마치 안생처럼, 안생은 마치 칠월처럼'이라는 영화 속 내레이션처럼 '같음'으로 귀결 지으려는 생각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영화에서 안생과 칠월의 우정을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은 그들이 너무 '다르다'는 데 있었다. '칠월'은 사랑과 인정이 넘치는 부모님 밑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고, '안생'은 아버지 없이, 자식은 돌보지 않고 밖으로만 나도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렇기에 각자가 살면서 본 것이 달랐고, 느낀 것이 달랐다.
그렇지만 그들은 친구가 되었다. 안생은 어머니가 차려주는 따뜻한 밥상과, 아버지가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부러웠고, 칠월은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 보이는 안생이 부러웠다. 각자가 서로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은 서로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였고, 그런 교감은 둘의 영혼이 연결되도록 만들었다. 각자의 삶에 대한 철학과 가치관을 존중하고, 나아가 동경했다.
하지만 세상이 그들에게 들이대는 잣대는 좀 달랐다. 세상을 떠돌며 자유롭게 살다가 27살에 생을 마감하고 싶은 '안생'과, 열심히 공부해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해 자식을 낳고 사는 삶을 꿈꾸는 '칠월'. 하지만 소위 상식적이고 일반적이라고 하는 사회의 시선은 '칠월'을 '잘 나가는 친구'라고 말하고, '안생'을 '제 멋대로 살다가 막장까지 간 친구'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현실의 벽'이리라.
그런 현실의 벽 앞에서 두 친구는 갈등을 겪었다. '소가명'이라고 하는 인물이 그 갈등의 중심에 서 있었지만, 그 갈등의 핵심 또한 그들이 '현실의 벽' 앞에서 너무 달랐다는 데 있었다.
칠월과 안생이 몇 년 후 재회해 함께 상해로 여행을 떠나는 장면은 너무도 달라져버린 두 사람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에 간 안생과 칠월. 칠월의 돈으로 이미 비싼 호텔에 체크인을 한 상황이기에 안생은 그런 친구에게 미안했고,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 자기 방식으로 답례를 하고자 한다. 남자들이 있는 자리에 가서 잠시 놀아주고 공짜 와인을 한 병 얻어 온 것이다. 하지만 칠월은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안생의 모습을 천박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두 사람의 우정에 균열을 일으킨다.
아마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많이 겪는 일일 것이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는데 서로의 경제적인 능력이 좀 많이 다를 때 생기는 난처한 상황.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누군가와 친구가 되고, 깊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것도 우리가 다르기 때문이고, 그런 친구와 점점 멀어지게 되는 이유도 우리가 다르기 때문이라니.
그렇기에 두 사람의 인생을 데칼코마니처럼 대칭으로 만들고자 했던 진가신 감독의 시도는 더 아쉽게 느껴졌던 것 같다. 무언가 만들어진 '소울메이트'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조금 더 자연스럽게 그들의 우정을 조명했더라면 좀 더 아름다운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무엇이든 내어줄 수 있을 것 같던 친구와 어느 순간 남처럼 멀어지기도 하고, 주는 것 없이 싫었던 친구와 어느 순간 공감대가 생겨 누구보다 친해지기도 하는 것처럼, 사실 한 치 앞조차 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아마 '소울메이트'는 그 존재 자체의 유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영원히 변치 않는 무언가를 바라는 우리의 소망이 투영되어 있는 관념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나약한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 인간에게는 '친구'라고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가신 감독은 이 영화에서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우정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빛이 바래는지 그 모습을 현실적으로 잘 보여주었다. 우정은 언젠가 사라질 수도 있고, 죽을 때까지 간직할 수도 있다. 인생을 살아가며 서로가 너무 잘 맞고, 내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면 칠월과 안생의 우정처럼 그들은 인생 속에서 어떤 풍파를 만나더라도 함께 있을 것이다.
그저 흘러가듯 살아간 뒤에 돌아봤을 때, 오래도록 곁에서 함께였던 친구가 '소울메이트'인 것이지, 누군가를 내 인생의 '소울메이트'로 만들기 위해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끌고가려고 해서는 안된다. 놓치지 않으려 노력할수록 놓치게 되는 것이 인생이니까. 물론 소중한 친구와의 우정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조차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다. 우정은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나가는 것이기에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려는 노력은 분명히 필요하다.
그럼 도대체 누가 나의 '소울메이트'이겠느냐고? 위에서도 말했듯 지구 상에 존재하는 인생의 숫자는 지금까지 살았던, 지금 살고 있는, 앞으로 태어날 인생들의 숫자와 같을 것이다. 그건 내가 말해 줄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게 누구이겠냐는 걱정을 하는 당신이라면, 당신 앞에 그 '소울 메이트'가 분명히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