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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형제애'를 잊지 않기를

영화 <강철비>

by 정주원

*이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가 제공한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MLRS는 1991년 걸프전에서 미국이 230대, 영국이 16대를 파병하여, 최초로 실전에서 배치·운용되었다. MLRS는 당시 이라크군의 SA-2/3 지대공 미사일 발사기지 30곳 이상을 초토화시켰으며 약 200대의 장갑차량을 파괴시켰다. MLRS의 이중목적 고폭탄 공격을 받았던 이라크군은 이를 ‘강철비(Steel Rain)’라고 부르며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한반도는 지구 상에서 유일하게 '이념'으로 인한 '분단'이 현실적으로 남아 있는 공간이다. 이 땅에서 나는, 우리는 '전쟁'의 공포를 어렸을 때부터 느끼며 살았다. 한반도에서 태어나 한 번쯤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피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이 땅의 어린아이들에게 '전쟁=죽음'이었고,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기에 도망갈 곳이 없다는 할머니의 말은 어린 손자를 더욱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자라며 겪은 입시, 취업, 결혼, 육아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은 '전쟁'의 공포를 어느샌가 무디게 만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국지 도발, 핵실험, 미사일 발사 등과 같은 뉴스가 매일 같이 지면을 장식해도 그저 그 기사를 '오늘의 운세' 쯤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외치던 시절을 지나, 서로가 같은 민족이라는 색깔도 이미 옅어질 대로 옅어진 지 오래다.


영화 <강철비>에서 수많은 인파들 위로 이라크군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강철비'가 우수수 떨어지는 장면은 영화인 걸 알면서도 조금은 충격적이었다. 익숙해진 '전쟁'의 공포가 다시 엄습했다. 언제든 우리 눈 앞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눈 앞의 '전쟁'에 무뎌지고, 안일해진 것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아직까지도 가장 유용한 것은 '북한'과 '안보 프레임이며, '빨갱이'라는 한 마디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게 또 이 나라니까. '죽음'이라고 하는 위협은 익숙해질 수는 있지만, 안일해질 수는 없다.


영화 <강철비>는 이른바 '북한 1호'가 내부의 공격을 받는 쿠데타의 상황을 가정했다. '분단'은 우리 앞에 닥쳐 있는 현실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이기에 그런 가정 자체가 매우 현실성 떨어지는 일임을 우리는 너무 잘 안다.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다면, 애초에 북한 정권이 3대에 걸쳐 세습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매우 민감한 사안을 주제로 영화를 만들다 보니, 여러 가지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 1호'의 이름이나 얼굴은 영화에서 한 번도 카메라에 잡히거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결말 자체도 무언가 명확하지 않고, 흐지부지 끝나버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한반도의 두 정권과, 이를 둘러싼 외국 세력들의 완력 관계를 최대한 현실성 있게, '있음 직한' 이야기로 전개해 가려는 양우석 감독의 노력 또한 느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영화 <강철비>의 두 주인공, 북한의 특수요원 엄철우(정우성)와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곽철우(곽도원).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여러 장면들은 현재 남한과 북한의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을 꽤 정확하게 표현해냈다. 곽철우는 엄철우와 이름이 같다는 사실을 신기해하며, 그에게 어떤 한자를 쓰는지 묻는다. 밝을 철(哲)과 집 우(宇)를 쓰는 곽철우와 쇠 철(鐵)과 동무 우(友)를 쓰는 엄철우. 낮에도 밤에도 언제나 밝게 빛나는, 풍요로운 '집'에 살고 있는 남한의 곽철우와 생존을 위해 무쇠 같은 강력한 무기와 군대를 미덕으로 여기고, 서로를 '동무'라 일컫는 인민들의 나라(실상은 아니지만)에서 살아 온 북한의 엄철우.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같은 민족이지만,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머리 속에 품고 사는 남한과 북한의 사람들. '동명이인'인 그들의 모습과 우리의 상황은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어 보인다.


항간의 사람들은 캐스팅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영화 <공조> 때부터 왜 항상 북한 사람은 잘생긴 사람이고, 남한 사람은 못생긴 사람을 섭외하냐는 것이다.

사실 두 사람의 모습은 '남한'과 '북한' 그 자체다.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만들어낸 뱃살, 팍팍한 현실 속에 자조적인 유머를 장착하고 있지만 정확히 내 주변의 정세와 분위기를 파악하는 '눈치'. 이것이 강대국들의 대결의 현장인 극동 아시아에서 꿋꿋이 버텨가는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곽도원 배우는 이런 이미지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 곽철우에 정확히 들어맞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우성 배우가 연기한 '엄철우'도 그렇다. 극도의 빈곤함 속에 사는 탓에 눈 밑은 쾡하고, 피곤함이 배어 있다. 하지만 크진 않아도 적재적소 필요한 부분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는 전투형 근육과 부릅뜨고 있는 날카로운 눈빛은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생존해 나가겠다는 북한 사람들의 열망이 보인다. 그렇기에 이름만 같을 뿐 모든 것이 다른 남북의 두 '철우' 역할에 정우성과 곽도원을 캐스팅한 것은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

곽철우는 엄철우가 '햄버거'라는 말을 모를까 봐 '고기를 곁들인 빵(?)'이라고 하는 설명을 덧붙이고, 곽철우는 실제로 엄철우가 말하는 '깽깽이 국수'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다. (*깽깽이 국수는 잔치국수의 북한말) 남한과 북한은 이제 햄버거와 깽깽이 국수만큼이나 다른 나라이고, 서로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다. 그런 차이는 그들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서 다 드러난다.


"우리 장군님 잘못되면, 그건 다 당신들 책임인 줄 아오!"
"아니 그쪽 사람들은 일은 항상 자기들이 벌려 놓고, 왜 책임은 항상 우리가 지래."


아마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다 해봤을 생각일 것이다. 왜 북한 사람들은 핵실험이니 뭐니 하지 말라는 짓은 다 하고, 왜 그 책임은 항상 미제와 반동분자들에게 있다고 할까.


정곡을 찔렀던 곽철 우의 이 한 마디가 그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것도 같다.


이런 말이 있지. 분단국의 국민은 분단 그 자체가 아니라, 분단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이들로 인해 더 고통받는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남과 북의 정치인들도 매우 현실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대북 강경책을 지지하는 임기 말년의 현직 대통령 이의성은 지금 만큼 강력한 명분으로, 합리적으로 북한을 공격할 기회가 있었느냐고 주장하며 핵 폭격을 주장한다. 하지만 차기 대통령 당선인인 김경영과 훗날 통일부 장관이 되는 대통령직 인수위원장 정세영은 과연 북한 사람들이 핵 공격을 한 대한민국을, 한 민족으로 인정하고 받아주겠느냐며 좀 더 대화를 시도해 볼 것을 주장한다. 선거철이 되면 거리 유세에서, TV 합동 토론회에서 정치인들이 부르짖던 '안보 프레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북한의 상황도 비슷하다. 대남 강경파들은 미제와 미제 앞잡이들을 박살 낼 핵무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핵무기를 인민들을 위한 것이 아닌, 김 씨 일가의 안전만을 위한 협상 카드로 사용한다며 답답해한다. 하지만 인민들을 위한다고 해도, 사실 그들의 속마음에 인민들은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김 씨 일가던 대남 강경파던 결국 권력을 지키려는 자와 호시탐탐 권력을 노리는 자들의 암투일 뿐일 테니.


위정자들의 끊임없는 회의와 대화는 청와대에서, 지하 벙커에서 이루어진다. 한반도에서 가장 비밀스럽고 안전한 곳에서. 그들이 그곳에서 말로써 미사일을 쏘고 총부리를 겨눌 동안 죄 없는 개성 공단 여공들은 강철비를 맞고, 죄 없는 군경들이 수없이 죽어나간다. 미사일과 무기들은 이데올로기를 가리지 않고, 남북한의 모든 사람들에게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과연 우리는, 분단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이들에 의해 고통받으며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 밑에서 일하고 있는 남북의 두 철우는,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족'의 힘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힘들고 급박한 와중에도 곽철우는 딸과의 통화에서 상냥함을 잃지 않으며, 엄철우는 남한으로 떠나기 전 아내와 딸이 챙겨준 목도리를 모든 장면에서 몸에 지니고 있다. 두 철우가 서로 의심하고 대립하다가 한 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GD 덕에 나누었던 딸에 대한, 나아가 서로의 가족에 대해 나눈 대화들 덕분이었다. 모든 이념과 정치 체제를 초월하여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집단인 '가족' 뿐이다.

요즈음 남북 관계를 다루는 영화들은, 더 이상 '통일'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영화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통일'이라는 말을 들어본 지 정말 오래된 듯하다. 무조건적인 통일을 말하기에 이 땅의 분단은 너무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 서로가 한쪽을 때려 부수고 이뤄내는 힘에 의한 흡수 통일은 이제 더는 의미가 없다. 이제 더 이상의 전쟁은 한쪽이 아닌, 양 쪽 모두의 궤멸을 의미하는 것일 테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남과 북은 어떻게 걱정 없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 남과 북이 '하나'라는 인식은 무리이더라도, 적어도 '형제'이고 '가족'이라는 생각은 가져야 하지 않을까. 물론 우리가 일방적으로 구걸 하 듯 청하는 평화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북한이 신뢰할 수 있는 태도로 평화를 얘기할 때 가능할 것이다.

결국 영화 <강철비>는 항상 극단에서 극단으로 치닫는 남과 북이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권력과 이데올로기를 떠나 남과 북이 '가족'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 상에서의 결말은 이보다 더 현실적인 방법으로 끝난다.)


세계 정세의 이해관계에 의해, 남북 정치권력의 이해관계에 의해 남과 북은 점점 남이 되어가고 있다. 모쪼록 남과 북의 위정자들이 더 이상 '분단'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았으면 한다. 나도 당장 두 나라가 하나가 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눈 앞에 닥쳐 있는 현실이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통일'은 우리가 소원하던 것에서 하던 안 하던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지금은 하면 손해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자가 달랐지만 결국 같은 이름을 가졌던 엄철우와 곽철우처럼, 남북한 두 국가의 모든 사람들도 우리가 이념이 다르고, 약 반세기가 넘게 살아온 방식이 다르더라도 마음 한편에 우리가 '형제'임을, '가족'임을 꼭 기억하고 있었으면 한다. '형제'는 절대 같지 않다. 다르기에 다투고 싸우기도 한다. 하지만 형제는 적어도 서로 죽이려고 하지는 않는다. '가족'이라는 사랑이 기초가 된 공동체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의 한반도는 극 중 대통령 당선인 김경영이 읽던 책인, 빌리 브란트의 '원래 하나였던 것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책처럼 어느 한쪽도 다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 더 이상 똑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으키지 않고, 이 땅에서 우리의 가족들이 전쟁 걱정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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