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고스트 스토리>
*이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가 제공한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겪고, 견뎌내고 다시 살아가는 과정도 이와 같지 않을까. 유령은 결국 그 존재 자체가 실재하는지의 유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내는 건 결국 우리가 아닐까. 우리의 마음이 사랑했던 그 사람을 놓아주지 못하기에. 그리고 흘러가는 시간이 약이 되어 어느 순간 그 죽음의 무게가 무뎌지고, 잊혀갈 때 우리 마음속을 떠다니던 그 유령도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계속해서 M에게 찾아올 미래, 그 현실 속에서 M은 C를 잊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잊을 것이다.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특별한 선물이니까. 잊을 수 있어야 살아갈 수 있으니까. 힘든 현실을 잊을 수 없다면, 과거도 '추억'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너무 힘들어 떠올리고 싶지 않을 테니까. 우리는 '망각'을 통해 '추억'을 만든다.
'죽음'이란 참 익숙해지기 힘든, 아니 익숙해질 수 없는 개념이다. 아마 '두려움' 때문일 것이리라. 사후의 세계는 죽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죽어보면 되겠지만, 죽는다는 것은 '왕복'이 아닌 '편도'의 개념이다. 다시 이승으로 돌아온 티켓을 끊어 본 사람은 인류의 역사 이래, 아직까지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죽으면 세상에서 사라진다. 소멸한다. 종교는 바로 그 빈 틈에 비집어 들어 싹을 틔우고, 성장해 온 것일 테다.
그래서 우리에게 죽음이 두려운 또 다른 이유는, '망각'이다. 우리가 살던 세계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결국 그 세계의 사는 다른 구성원들에게서 잊힌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잊힘이 얼마나 무서운 지 안다. 사랑하는 이를 죽음으로 떠나보내고, 실의와 먹먹한 마음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때. 사람들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저 말은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문장들 중, 내 생각에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문장 중 하나다. 시간이 계속해서 흘러가다 보면 어느샌가, 떠나보낸 그 사람을 잊고 자연스럽게 일상생활에 다시 녹아들어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시간이 우리 문제를 '해결'해주는 방식이다.
영화 <고스트 스토리>는 죽음과 시간, 그리고 추억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귀신과 공포 영화는, 대부분 악령이 사람을 괴롭히고, 이로 인해 사람이 고통을 받으며 결국엔 악령을 물리쳐 냄으로써 끝나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영화 <고스트 스토리>는 '귀신 이야기'라는 제목을 전면에 달고 있지만, 절대 공포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유령들의 고충을 토로하는 영화다. 언젠가는 '사람이었던' 유령의 외로움을 먹먹한 화면에 담아낸다.
C(케이시 에플렉)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연인인 M(루니 마라)를 떠나고, C는 유령이 되어 M의 주변을 배회한다. 흰 천을 온몸에 뒤집어쓴 채로. 하지만 C는 M을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 기억할 뿐, 그게 누구인지 모른다. M은 떠나보낸 C에 대한 그리움에 몸서리친다. 미친 듯이 파이를 먹어 대고, 토해 낸다. 그녀는 눈물 흘리지 않고 울지 않지만, 그녀의 눈빛과 그녀의 행동은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슬픔에 몸서리친다.
그 모든 것을 유령은 가만히 바라본다. 흰 천을 뒤집어쓴 탓에 그 표정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힘들어하는 M의 모습을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는 화면 안의 피사체 유령 C는, '외로움' 그 자체다. 하지만 M이 새로운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집에서 사랑을 나누려는 것을 본 유령 C는 물건들을 마구 집어던진다. 공포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곤 하는, 허공에서 물건들이 날아다니는 장면. 지극히 인간으로서의 관점에서 그 행동은 '질투'와, '배신감'에서 발현한 행동이다.
하지만 갑자기, 그렇게 단순하게 귀결 지을 수 있는 행동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게다가 C는, 자신이 무언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있을 뿐, 그 대상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C는 M이 집을 떠난 후에도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그 이후 이 집에 살게 된 사람들은 똑같은 귀신의 습격을 받는다. 그래서 C의 행동은 단순히 M에 대한 질투나, 배신감에 의한 행동이라기보다는 '외로움'에서 발현된 행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어서도 편히 천당에 가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는 그 무언가 때문에 이렇게 외롭게 구천을 떠도는 존재. 그것이 바로 귀신이고, 유령일 것이다. 외로운 유령이 그 존재를 세상에 확인시키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공포'인 것이다.
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너무도 단란하다. 아빠는 없지만 엄마와 두 남매는 단란하게 저녁밥을 챙겨 먹고, 이후의 다른 거주자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시끌벅적한 하우스 파티를 즐긴다. 그 안에서 유령은 참으로 고독한 존재다. 그도 분명 살아생전에는 인간이었기에, 인간에게 존재하는 사회적 습성을 미약하게나마 기억하고 있었을까. 그래서 스스로도 이 공간에 분명히 실재하는 존재임을 알리고 싶었을까.
하지만, 그 공간에 사는 인간에게 보이고, 느껴지는 것은 결국 '공포' 뿐이다.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집은 어느 순간부터 계속해서 빈 집으로 남겨진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그 시간 동안, 유령 C는 계속 그곳에 있다. 집은 철거되고, 그 자리엔 거대한 빌딩이 들어선다. C의 공간은 더욱 거대해졌지만, 많은 사람들이 일로 분주한 그 공간 속에서 그는 더욱 외로워 보인다. 이 거대한 공간에서 그는 단순히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사람들에게 겁을 주는 행위 만으로는 마음속의 공백과 외로움을 채워낼 수 없다. 결국 유령 C는 빌딩 옥상에서 몸을 던진다.
하지만 C가 도착한 곳은 천국이 아니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는 이미 죽은 몸이 아닌가. 그가 도착한 곳은 아주 먼 과거였다.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 그 땅에 처음 발을 붙인 어느 가족에게로. 유령 C는 현재, 미래뿐만 아니라 과거까지도 자유자재로 오고 갈 수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결국 유령 C는 생전에 C와 M이 처음 그 집에 살게 된 순간에 다다른다.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C는 M을 영원히 기다려야만 한다는 것을. 유령인 C는 M을 영원히 붙잡아 둘 수 없다. 유령과 인간은 함께할 수 없으니까. M은 살아있었기에, 그녀에게도 죽음이 찾아올 때까진 그녀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고, 그녀의 인생을 계속해서 살아가야 한다. 유령 C가 그 공간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건을 집어던진 행동도, 결국 기다리는 그 무언가를 그 공간에, 그 시간에 붙잡아 놓을 수 없는 무력함, 그리고 거기서 오는 무한한 외로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비단 유령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다. 가끔 우리는 떠나간 사랑을 붙잡기 위해 노력할 때가 있다. 그것이 정말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가 정말 사랑했던 것은 서로가 사랑했던 추억 속의 그 사람이지, 사랑이 떠나간 후 남이 되어버린 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곤 하는 것이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과거가 되었다면, 과거에 머물러야만 하는 그 추억이 그리워 우리는 현재의 그 사람을, 현재의 나를 힘겹게만 하는 그런 무의미한 실수를 범한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하니 영화의 라스트 씬이 참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M은 C가 살아있을 때 자신은 항상 이사 갈 때마다 집의 어느 공간에 쪽지를 남겨두었다는 말을 했다. 자기가 떠나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무언가가 있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M은 C가 떠난 후에도 그 집에 쪽지를 남겨두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유령 C는 떠나는 M을 바라보는 유령이 된 자신을 그 뒤에서 바라본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벽 한쪽 구석에 숨겨놓고 간 쪽지를 꺼낸다. 그리고 쪽지를 읽는 순간, 유령 C는 사라진다. 아마 그녀의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지 않았을까.
이 집에서 함께 한 추억 속에, 난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있을 거야.
그렇다. 추억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을 테니. 추억 속에서 C와 M이 언제나 함께라면, C는 더 이상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이유가 없다. 이미 그와 그녀는 추억 속에서 영원히 함께 할 것이기에.
그가 사라지기 전에, 유령 C는 가끔 대화를 나누곤 했던 이웃집 유령이 사라지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웃집 유령은 사라지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마 돌아오지 않으려나 봐.
C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미 유령이 되어버린, 삶이 끝나버린 C는 추억 속에 있겠지만, 아직 삶이 남아있는 M은 이제 더 이상 C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아마 C는 추억 속의 M을 만나면서 M의 앞으로 처할 현실은 놓아주기로 한 것은 아니었을까.
계속해서 M에게 찾아올 미래, 그 현실 속에서 M은 C를 잊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잊을 것이다.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특별한 선물이니까. 잊을 수 있어야 살아갈 수 있으니까. 힘든 현실을 잊을 수 없다면, 과거도 '추억'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너무 힘들어 떠올리고 싶지 않을 테니까. 우리는 '망각'을 통해 '추억'을 만든다.
참으로 먹먹하고, 외롭지만 경이로운 상상력이 담겨 있는 영화였다.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은 대단한 CG나 특수 효과 없이도, 영상과 이야기만으로 거대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겪고, 견뎌내고 다시 살아가는 과정도 이와 같지 않을까. 유령은 결국 그 존재 자체가 실재하는지의 유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내는 건 결국 우리가 아닐까. 우리의 마음이 사랑했던 그 사람을 놓아주지 못하기에. 그리고 흘러가는 시간이 약이 되어 어느 순간 그 죽음의 무게가 무뎌지고, 잊혀갈 때 우리 마음속을 떠다니던 그 유령도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