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를 만날 날이 이제 딱 일주일 남았다.
첫째 때는 임신 기간 동안 20여 편 정도의 육아일기를 쓴 것 같은데, 둘째는 전무다. 아마 지금 이 일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다.
둘째는 어렵게 가졌다. 임신이 어려웠던 것이 아니고 남편을 설득하는 것이 어려웠다. 아이를 가지는데 왜 남편의 설득이 필요했냐. 남편은 결혼 전부터 '아이 자체를 가지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남편을 꼬드겨 첫째를 만드는 것은 쉬웠는데. 둘째는 정말 어려웠다. 남편이 첫째를 정말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둘째는 첫째보다 더 설득하기 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6개월이 넘게 걸렸다. 남편은 외동아들이었고, 외동이 외로울 거라는 으레 당연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형제, 자매, 남매가 있어본 사람들은 안다. 이들이 없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남편은 아예 처음부터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모른다고 했다. 그들의 존재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나는 두 살 터울의 여동생이 있다. 여동생도 지금 만삭이다. 초산인 여동생의 예정일은 12월 9일, 경산인 나는 12월 16일이다. 거의 뭐 비슷하게 애를 낳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여동생과는 하루에 한 번 내지 두 번 정도 통화한다. 무뚝뚝한 엄마보다 속이 깊고 정이 많은 여동생과 훨씬 교류가 잦다. 여동생은 손재주가 뛰어났다. 요리도 잘하지만 그림도 잘 그렸다. 동생은 착하고 따뜻한 감자 같은 아이다. 둥글둥글하고 포슬포슬한 사람. 하지만 속은 정말 단단해서 무른 감자는 아니었고 알감자 같은 사람이었다. 예고를 나와 서양화를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미술치료 석사를 받아 지금은 치료사로 활동하고 있다. 동생의 손재주와 넉넉한 마음씨가 조화된, 딱 걸맞은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언제였더라.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던 것 같다. 나는 동생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마침 그날은 학교에서 신체검사를 했던 날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동생에게 "언니 신체검사를 했는데 암이 발견됐어"라는 말도 안 되는 뻥을 날렸다. 부모님도 안 계신, 늦은 오후였던 것 같다. 내 말을 들은 동생은 벙찐 표정으로 펑펑 울기 시작했다. 언니 죽는 거야? 진짜야? 라며 크게 우는 동생 앞에서 나는 미안함에 어쩔 줄 몰랐다. 동생을 겨우 진정시키고 거짓말임을 고백하자 착하디 착한 동생은 정말 크게 화를 냈다. 나는 그저 동생에게 나라는 존재가 어느 정도 되는지 시험해보고 싶었던 단순한 마음이었던 것 같은데. 동생은 진정으로 언니라는 존재가 사라진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의 내가 참 맹랑했던 것 같다. 왜 나는 부모님이 아니라 동생에게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 했을까. 아마 동생에 대한 질투 비슷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예민하고 까다로운 나에 비해 순둥순둥 한 동생은 어딜 가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그즈음 내가 동생에게 졌다는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어릴 때부터 동생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한 것이 딱 두 개가 있었다. 공부와 글쓰기였다. 교육원인지 문화센터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무슨 교수님이 오셔서 어린이 글쓰기 교실을 연 적이 있다. 초딩이었던 나와 동생은 거기에 참석해 수필을 적어냈는데, 교수님이 픽한 글은 내 글이 아니라 동생의 글이었다. 아직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교수님은 동생의 글에서 "기꺼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 정말 훌륭하다"라고 칭찬했다. 나는 그때 무슨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내가 동생에게 밀렸다니. 부모님에게도 친척들에게도 밀린 것 같은 느낌인데, 제삼자에게도 밀렸다니. 그것도 내가 제일 잘한다고 생각한 글쓰기에서!!
아마 첫째에게 동생은 늘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반대로 동생은 모든 것을 다 먼저 경험한 언니를 보며 숱한 좌절을 느끼고 포기하는 것이 많아졌으리라. 첫째는 동생을, 동생은 언니를, 그 '서열'에 대한 부분은 평생을 가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겠다고 느꼈다. 고난의 사춘기와 학창 시절을 지나 우리의 우정은 대학교에서 꽃을 피웠다. 같은 대학 출신이기도 했고. 20살이 넘어가니 싸울 일도 많이 줄었다. 오히려 서로의 연애 상담과 진로 상담으로 우리의 사이는 더욱 공고해지고 단단해졌다. 내일모레 40살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나는 오히려 동생에게 더 많이 의지하고 있다. 그녀가 없는 나의 삶은 상상할 수 없다. 동생은 나의 엄마이자 언니이자 여동생이다. 서열에 대한 부분을 평생 이해할 수 없다고 앞서 적었는데, 오히려 서열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날도 오는구나 싶다. 맞다. 세상 사람들이 다 할 수 있는 흔하디 흔한 말을 적을 때가 왔다. 동생을 생각하면 물보다 진한 피의 뜨거움을 느낀다. 이게 혈육이라는 거구나.
우리 둘째는 남자아이다. 첫째도 남자아이기 때문에 둘은 형제다. 남편은 남자들 사이에서 나이는 깡패라고 했다. 둘째는 절대 형아를 이길 수가 없다고. 더욱이 만으로 4살에 가까운 나이 차이다. 첫째가 스무 살 일 때 둘째는 아직 까까머리 중학생이라는 말이다. 남편은 아이들끼리 크게 싸울 일은 없을 거라고 덧붙였다. 나는 첫째와 둘째 사이에서 바라는 것은 없다. 우애라는 것이 바란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다만 서로가 서로를 좀 안쓰럽게 생각하는 정도만 되어도 좋겠다. 형이라는 위치에서 힘들겠구나. 동생이라는 자리에서 고민이 크겠구나. 이 정도? 이것도... 욕심인가요? (형제 있으신 분들 댓글 좀...ㅎㅎ)
둘째를 만난 날이 다가오니 어째 첫째 때보다 더 설레고 신난다. 첫째 때는 아무것도 몰라서 두려운 마음이 컸다면, 둘째는 좀 더 여유가 생겼달까. 어떻게 생겼을지도 궁금하고 응애응애 하는 목소리는 또 얼마나 귀여울지 벌써부터 마음이 꼼지락거린다. 발바닥에 굳은살이 생기기 전에 신생아 발바닥 부지런히 만져둬야지. 정수리에서 나는 꼬수운 냄새도 매일매일 킁킁 맡을 거다. 또 뭐가 있더라. 세상 보드라운 궁딩이도 쓰다듬어야 하고 새털 같은 배냇머리도 한 올 한 올 만져봐야 한다. 할 게 너무나 많네? 첫째 때 엑셀로 정리한 '할 것들 목록'에 전혀 없던 것들이다.
아무래도 그래서 둘째는 둘째인가 보다. 나도 이제 부모의 입장에서 내 여동생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려나. 사랑스럽고 순둥한 감자 같은 둘째 아이. 이제 곧 우리 앞에 나타날 아이는 어떤 아이일까.
엄마는 그렇다. 네가 어떤 아이이든, 널 아주 아주 많이 많이 사랑하게 될 거야. 형아만큼 일기는 많이 못써줬지만, 그래도 형아는 수첩이고 너는 브런치다 이놈아. ㅎㅎ
아가야. 건강하게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