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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주 May 12. 2022

새벽에 개는 빨래

엄마가 해주는 빨래는 자판기였다. 나는 벗고 나면 끝이었고 이튿날이 되면 옥상의 햇볕 냄새가 나는 옷들이 캔커피처럼 덜커덩 내려왔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보니 빨래는 당면이 됐다. 빨리 해치우지 않으면 불어 터졌다. 이 글은 새벽 1시에 빨래를 개키고 난 뒤 쓰는 글이다. 그것도 건조기에서 20시간 정도 숙성시킨 뒤에 나 말이다. 양말 하나 제 손으로 빨지 않았던 딸년이 빨래 운운하며 글을 쓰는 걸 알면 우리 엄마는 뭐라고 하실까. 세탁기에 쓰는 물도 아까워서 손빨래를 하고 햇볕에 말려야 좋다며 옥상까지 올라가 빨래를 널었던 엄마는 '빨래에 진심'이을까. 나는 아무리 빨래를 하고 또 해도 도통 진심이 반영되지 않는다.


손바닥보다 작은 아기 빨래도 무조건 세탁기행. 손수건들은 가장자리가 쪼글쪼글해진 지 오래다. 세탁기에서 건조기까지는 걸음수로 따지면 다섯 걸음 정도인데 세탁이 다 된 빨래가 제깍 건조기로 직행할 확률은 인심 후하게 베풀어서 30퍼센트 정도. 건조 다 된 빨래가 즉시 꺼내져 개켜지는 확률은 1퍼센트..?


도대체 엄마의 자판기는 어떻게 작동했을까.


아이들 옷이 거의 대부분이다


나름 부지런을 떨고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거실 한구석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빨래산을 보면 괜히 마음이 무거워진다. 애도 둘이나 키우고 있고 오늘 바빴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변명도 저 산더미 앞에서는 힘이 없다. 뭔가 부피가 주는 압박감인가.


오늘 나는 아이를 재우다 함께 잠들었는데 밤 12시가 지나 눈이 떠졌다. 유령 같은 몰골로 내가 한 것은 빨래 개키기였다. 내일 해도 되지만 저 산더미를 쳐다보고 있는 자체가 더 스트레스였다. 아이들이 깰까 봐 차마 서랍까지 넣진 못하고 거실 한구석에 정돈된 더미들을 모아두었다.


그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첫째가 한 말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예전에 아이는 내가 개어놓은 빨래를 보고선 "엄마 이거 식빵 같다"라고 했었다. 그리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자기 바지를 얼렁뚱땅 접어 나를 도와주었다. 어릴 적의 나보다 지금의 우리 아들이 더 훌륭하다고 느낀 부분이다.


언젠가 신랑과 집안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정곡을 찔린 적이 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들은 매일매일 하는데 싫어하는 류의 일들은 한도 끝도 없이 미룬다는 객관적인 지적질이었다. 신랑은 자기는 싫어하는 것들을 우선순위로 한다며 생활방식의 차이라고 했지만 나는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말을 듣고 며칠간은 빨래가 자판기처럼 가동됐지만 이내 슬그머니 당면처럼 불어났다.


빨래 하나를 두고 책임감까지 운운한다고 하면 저 무슨 오바인가 싶겠다마는, 나에게 빨래는 단순히 집안일의 한 종류가 아니고 내 생활방식의 한 종류가 되어버렸다.


'싫어하는 것을 먼저 보자'

'회피하지 말고 부딪혀보자'


뱅글뱅글 도는 집안일의 테두리에 갇혀있다고 생각했는데. 저 방식의 변화 하나가 의외로 꽤 큰 성취감을 가져다주었다. 집안일에까지 통찰력을 보여주는 남편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나.


다음에는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써봐야겠다.

제목이 벌써 떠오른다.


'정신과 의사인 남편과 함께 산다는 것.'


두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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