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한 살의 낭만

by 김우주

나는 아빠에게서 낭만을 배웠다. 열 살 즈음이었다.


아빠는 나와 동생에게 2만 원을 쥐어주고는 꽃을 사 오라고 했다. 나는 재차 물었다. "뭐? 꽃이라고?" 그때 우리가 한 달에 한 번씩 사 먹었던 양념통닭은 8000원쯤이었다. 닭 두 마리를 날려버리는 심부름이다. 아빠는 거기에다 한 가지를 더했다. "우리 풍선도 달자." 와. 이건 내 생일에도 못해본 건데. 근데 오늘은 엄마도, 동생도, 아빠의 생일도 아니다. 뭘까? 그렇다. 그날은 엄마, 아빠의 결혼기념일이었다.


꽃집과 문방구를 돌아 집으로 온 우리는 볼이 터져라 풍선을 불었다. 아빠는 박스테이프를 뜯어 창문에 풍선을 붙였다. 내 생일도 아닌데 심장이 두근두근 했다. 하기 싫던 방청소도 하고 과일도 예쁘게 깎아뒀다. 복분자로 만든 술도 꺼냈다. 준비를 끝낸 우리는 시계만 쳐다봤다. 시간이 가질 않는다. 엄마가 언제 오려나. 미용실 문을 닫고 집으로 올 시간이 다 됐는데.


철커덩. 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와 동생은 집에 남아 있던 폭죽을 냅다 터트렸다. 엄마의 머리 위로 꼬불꼬불하고 알록달록한 종이실이 내려앉았다. 매캐하고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나는 연기 사이로 걸어가 엄마에게 꽃을 건넸다. "결혼기념일 축하해 엄마." 아빠는 쑥스럽게 엄마를 안았다. 엄마는 오랜만에 환하게 웃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꽃을 받고 돌아선 엄마는 딱 한마디를 했다. "돈 아깝게 꽃을 왜 사노."

아빠는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어떤 해에는 화분을 사기도 했고, 어떤 해에는 귀걸이를 사주기도 했다. (머리핀은 없었....ㅎㅎㅎㅎ) 그때마다 엄마는 툴툴거렸지만 분명히 좋아했다. 아빠가 사준 선물들을 격하게 아꼈다.


여러 선물 중에서도 사실 나는 아빠의 유머를 가장 좋아했다. 아빠는 좀 웃긴 사람이었다. 아빠는 엄마를 웃겼다. 그것도 매일매일 웃겨줬다. 엄마가 부엌에서 "영감, 베란다에서 양파 좀 갖고 오시오." 하면, 아빠는 "암놈으로 드릴까요, 수놈으로 드릴까요." 하는 식이었다. 엄마는 부엌에서 배를 잡고 웃으며 "암... 암... 암 으하하하학. 암놈으로 아이고. 암놈으로 꺄하하하하. 주시요오. 아이고 웃겨"를 했다.


아빠는 심심하면 춤을 췄다. 오징어처럼 몸을 꼬아 뱅글뱅글 돌았다. 웃지 않고서는 못 배겼다. 엄마는 40년째 같은 춤에 쓰러졌다. 첫째는 그런 할아버지를 보고 "바보 같다."고도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매번 같은 소리를 한다. "바보 같아 보이지. 근데 있잖아. 저 할아버지... 진짜 웃긴 사람이야."


그런 아빠를 보며 나는 체득한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을 웃겨주는 게 낭만이구나. 저 차곡차곡 쌓이는 웃음이 결국, 낭만이 되는 거구나.


아이를 낳고 책임감으로 범벅된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내 웃음소리가 아이들의 웃음소리보다 더 귀하다는 걸 알게 됐다. 등원 전쟁을 치르고 멍한 표정으로 화장실 거울을 들여다보는데, 문득 "내 낭만은 어디 갔지?"라고 생각했다. 그때 든 생각이 왜 낭만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낭만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했을 때, 나는 1초의 고민도 없이 아빠를 떠올렸다. 나는 나의 낭만의 8할은 당신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내 낭만 DNA는 너무나도 확고한 친탁이라고. 한 치의 고민도 하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우리 남편이 웃긴 사람이라는 점이다. 세상 철두철미하고 냉철하고 분석적이고 사리분별 잘하고 똑똑한데, 내 앞에서는 그저 그런 웃긴 놈을 자처할 줄 안다. 뇌를 거치지 않고 말해서 낄낄거릴 때, 나는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오늘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아빠가 엄마를 위해 몸을 던져 개그를 쳤던 그날처럼. 폭죽이 터진 그날, 그 하얀 연기 속의 나처럼.


그리고 그런 남편이 어제 갑자기 꽃을 사들고 왔다. 화병에 소복이 담긴 장미꽃을 바라보다가, 나는 또 낭만에 젖어 16개월 만에 글을 쓰기로 작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8일 뒤면 결혼기념일이다. 글 쓰기에 소재가 너무 좋지 않은가! 내년이면 결혼 10주년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남편 못지않게 웃긴 사람을 자처한다. 웃기는 게 좋은 마흔한 살이다. 우리 아빠의 DNA는 진짜 강력하다고. 마흔한 살의 나는 그때의 아빠만큼이나 웃길 준비가 되어 있다.


남편이 사온 장미.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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