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겨울, 내가 기억하는 서울은 칼바람이었다. 청바지 안쪽 허벅지살이 칼로 베이는 것 같아서 손으로 연신 문질러댔지만 따뜻해지기는커녕 허벅지도 손도 다 얼어붙어버렸다. 살이 얼얼해지면서 청바지와 허벅지가 같이 찢어질 것 같았다. 옆에서 걷고 있던 사람을 쳐다봤다. 그의 허벅지를 보았다. 눈에 들어온 건 패딩 같은 두툼한 바지였다. 부산에서는 겨울이라도 기모바지가 필요 없었다. 내가 입고 있던 청바지는 사계절용이 아니라 남부지방용임을 깨달았다.
사실 서울에서 살았던 6개월을 적고 싶진 않았다. 도피였다. 좋은 기억이 없으니까. 서글펐으니까. 방황했고 헤매다 실패한 곳이 서울이었다. 그런데 서울이라는 제시어를 받는 순간 그 시간만 떠올랐다. 메말라갔던 기억이 생생했다. 강렬하게 좋았던 곳이 잊기 어렵듯, 강렬하게 초라해졌던 장소 역시 잊기 쉽지 않은 모양이다.
졸업은 했고 기자는 하고 싶고 취업은 안 됐다. 뭐라도 하자고 결정한 게 서울이었다. 무작정 짐을 싸서 올라간 고시원은 창문이 없었다. 창문이 없는 것보다 더 슬펐던 건 서울에서 하루 만에 느낀 감정이 배신감 이어서다. 엄마가 싸준 과자가 사라졌다. 초콜릿이라 녹을까 봐 공동 냉장고에 넣어뒀는데. 10cm 두께의 벽 건너 알지 못하는 서울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했다. 그들이 어디 출신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한테는 그냥 다 서울 사람들이었다.
아는 오빠 찬스로 서울대 도서관에 사물함을 구했다. 책들을 욱여넣으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다들 진심이었다. 내 시선조차도 방해가 될까 미안할 만큼 진심이었다. 나도 저 진심들 사이에 낄 수 있을까. 내 진심은 서울사람들보다 한참은 못 미치는 것 같았다. 두꺼운 책들 사이에서 늘 보던 팔랑한 신문을 꺼냈다. 접고 접고 또 접었다. 얇은 내 진심이 그들의 책상을 넘어가지 않도록.
한 달쯤 지났을까. 서울대 지리가 익숙해질 무렵, 먼저 공부를 하고 있었던 B선배를 알게 됐다. 같은 대학, 같은 과, 나보다 한 학번 위였다. 선배는 내 고시원에서 길 건너에 있는 고시원에 살고 있었다. 선배는 편집기자가 되고 싶어 했다. 왜 취재가 아니고 편집이었을까. 선배의 확고한 노선과 취향이 좀 부러웠다. 나는 그게 야무진 거라고 생각했다. 서울에서 많이 봤던 악착과는 결이 달랐다.
선배가 나에게 제일 먼저 알려준 건, 서울에서 살아남는 게 아니라 서울을 이용해 먹는 방법이었다. 연극티켓과 공연티켓 같이 각종 티켓을 무료로 구할 수 있는 사이트를 가르쳐줬다. 나는 그 덕에 대학로도 가보고 명사들의 강연을 들었다. 백 분 토론의 방청객도 해봤다. 조명이 내리쬐는 방송국 스튜디오에 들어서면서 손석희에게 명함을 주는 내 모습을 잠깐 상상했다. 토론이 끝난 늦은 밤, 고시원으로 돌아가는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몸은 좀 달아올랐다. 어째서일까. 서울에서는 몸으로 부딪히면서 배울 수 있는 게 생각보다 많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부산에서는 1년에 한 번 열릴까, 말까 하는 것들이 서울에서는 일상이었다.
그래서 서울에서는 씩씩해야 했다. 내가 씩씩해야 뭐라도 떨어졌다. 돌아보니, 나는 씩씩한 척을 했던 것 같은데, B선배는 정말로 씩씩했다. 선배는 도시락마저도 씩씩했다. 그때 점심을 같이 먹자고 싸 온 선배의 도시락에는 된장찌개가 들어있었다. 양파와 감자, 애호박이 가득 들어있는 된장찌개. 선배는 고시원 공동주방에서 직접 만들었다고 했다. 음료수 하나를 냉장고에 넣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나와는 달랐다. 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해서 요리를 한다는 건 서울에서 살고 있다는 일종의 증명 같은 거였다. 그것도 아주 씩씩하게. 나는 선배의 된장찌개를 먹으면서 이 선배는 뭐든지 될 것 같은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않았던 선배는 주말에 편의점 알바를 뛰었다. 부모님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 돈도 다 쓴 나는 어쩔 수 없이 편의점 알바를 구해야 했다. 고시원에서 버스로 한 코스 거리였다. 노 부부가 운영하는 그 편의점은 그들의 은퇴자금이자 그들의 생활비이자 그들의 전부였다. 그 편의점에서 나는 운이 좋게도 카운터만 보면 됐다. 입고된 물건을 정리한다거나 청소를 하는 건 사장님 몫이었다. 나는 빠진 과자 봉지 몇 개만 다시 채워놓거나 폐기된 삼각김밥을 빼놓는 수준의 일만 했다.
일을 끝내고 돌아온 고시원은 여전히 차가웠다. 방이 아니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어지럽게 늘어뜨려진 빨랫줄 사이로 비행기가 지나갔다. 내려다본 도시의 불빛은 화려했다. 저 사이에서 내 집을 구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다. 나도 그 집에서 요리를 할 수 있을까. 가방 안에 폐기된 삼각김밥을 매만졌다. 내가 좋아하는 거라 팔리지 않았으면 했던 삼각김밥이었다. 폐기되기 한 시간 전에 일부러 뒤쪽으로 빼놨었다. 안 팔린 건 맞는데, 정작 내 손안에 들어오니 부끄러움과 알 수 없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러다 일이 터진 건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그 편의점에서는 로또를 팔았는데, 그날 나는 200만 원 치가 넘는 로또를 팔았다. 저녁 8시, 로또 판매가 마감되자마자 깨달았다. 이 편의점에서 왜 카운터만 보면 됐는지. 그리고 또 깨달았다. 서울은 내가 살기에 좀 아니, 많이 힘들겠다고. 로또를 사가는 서울 사람들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나는 좀 겁이 났던 것 같다. 계속 이렇게 살게 될까 봐. 고시원과 편의점 알바라는 굴레가 계속될까 봐. 부산에서는 취업준비생이면 됐는데, 서울은 그보다 더 혹독했다. 잠깐의 문화적 사치는 기본적인 생활의 욕구를 뛰어넘지 못했다.
B선배에게 다시 부산으로 내려간다고 했을 때, 선배는 간결하게 인사해 주었다. 어떠한 첨언도 하지 않았다. 씩씩한 선배다웠다. 나는 씩씩하지 못했다. 변명이 가득한 볼살을 물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마음과 발걸음의 무게가 무거워서 버거울 뿐이었다. 그게 바로 서울의 무게였다.
후에 B선배가 지역 유력 일간지에 편집기자로 취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슷한 시기에 나도 다른 지역의 일간지에 취직했다. 선배가 잘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꼭 서울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그저 선배의 꿈이 이뤄져서 좋다고 생각했으니까. 선배에게 서울은 어떤 곳이었을까. 버티고 버티다 취직에 성공했던 도시였더라면, 지금 나도 서울을 다르게 생각할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