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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주 Sep 28. 2021

남편의 유전자

 유튜버이자 셰프인 승우 아빠는 요리를 잘하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타고난 유전자가 80%요, 상상력이 15%요, 노력이 5%다.' 그럼 나는 몇 프로냐. 유전자도 없고 상상력도 빈곤한데 노력도 하지 않으니 음.. 에라이 요리 똥 손 맞구만. 그런데 승우 아빠가 말한 100%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 내 곁에 있었으니. 그 사람은 바로 제목에서도 나와있다시피 맞아요, 내 단짝 우리 남편이올시다.




 남편은 간을 잘 맞춘다. 기깔난다. 같은 파절임을 해도 내 것은 밍밍한데 남편 것은 새콤 달콤 짭짜롬에 상큼하고 감칠맛까지 난다. 좀 짜증까지 난다. 왜 이렇게 맛있지. 남편의 요리적 재능을 알아본 건 결혼하고 얼마 안가서다. 신혼 때 나는 KTX로 지방과 지방을 오가는 장거리 출퇴근을 했고, 저녁은 그나마 일찍 퇴근한 남편이 차리는 때가 많았다. 처음엔 시행착오 같은 작품? 들이 올라오더니 이내 스테이크며 김치볶음밥이며 오지치즈프라이며 펄펄 날아다녔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남편의 요리는 '운'이라고 생각했다. 남편도 스스로 '뭘 넣었는지 기억이 안난다'고 했다.(물론 지금도 저렇게 말한다) 칼질도 서툴고, 인터넷을 뒤져가며 레시피를 찾는 것 같았는데. 뭔가 아다리가 잘 맞았나? 그럴싸하게 또 맛있게 나오는 요리가 신기했다. 남편은 생전 처음 만들어보는 요리도 성공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자취도 한 번 해본 적 없는 놈이었다. 어머님께 물어보니 집에서 한 요리라곤 계란 프라이와 만두 굽기가 다였다고 했다.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엄마는 "같은 라면을 끼려도 니가 끼린건 니맛 내맛도 없다"며 혀를 끌끌 찼다. 두 살 어린 내 여동생은 우리 동네에서 제일 핫했던 식당의 '충김볶' '카레야채볶'을 재현해내던 아이였다. 엄마와 네 명의 이모들은 우리 집안 손 맛은 동생이 물려받았다며 입을 모았다. 나는 인정하고 또 인정했다. 김치볶음밥을 한 시간씩 볶아 만들어도 반찬에 김치가 없으면 못 먹는 볶음밥을 만들어대던 나였다.


 장거리 출퇴근에 지쳐 사표를 던진 나는 백화점 문화센터 요리교실부터 등록했다. 뭔가 내 손으로 맛있는 것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한 학기를 등록하고 또 한 학기를 더 다녔다. 부대찌개, 계란말이, 오이무침, 무나물... 수업마다 A4 2장짜리 레시피가 주어졌고, 나는 정말 열심히 요리를 했다. 계량스푼은 필수였다. 대충 손으로 슥슥 간을 맞추던 엄마와 동생과는 다른 내 신무기였다.


 그런데도 내가 차린 저녁 밥상은 뭔가 아쉬웠다. 남편은 정말 정말 좋게 말해 '자연의 맛'이 난다고 했다. 나는 분명히 레시피에 더해 다시다도 넣었는데 말이다. 한 시간이 넘도록 불 앞에 서서 한 가지 요리만 할 수밖에 없는 초보 시절. 남편의 그 한마디에 눈물이 주륵 흐르던 신혼 때였다. 남편은 다음엔 이렇게 해보면 어때? 다음엔 이런 걸 넣어보면 어때?라고 늘 말해줬지만 나는 필요 없었다. 서운한 마음에 들리지도 않았다. 그저 "우와~ 맛있다" 이 한 마디가 듣고 싶었다.


 두 학기를 내리 다녀도 안 되는 건 안 되는구나... 좌절하던 중 오랜만에 남편에게서 실패한 밥상이 나왔다. 나는 그간의 수모를 되돌려주기라도 하듯 쏘아댔다. 이건 짜고 이건 맵고 이건 저렇고 저건 이렇고!!!! 다다다다다다다다!!!!!! 나는 남편이 그때의 나처럼 울상을 짓고 시무룩해질 줄 알았다. 근데 이게 웬걸. 내가 하는 말을 가만히 다 듣고만 있는 거였다. 그것도 침착하게 진심으로 귀를 열어서. 남편의 태도가 궁금해진 나는 이유를 물었다. 속상하지 않아? 억울하지 않아? 남편은 그냥 덤덤하게 말했다. "아니, 말해줘서 고마워. 다음에는 그것들을 참고해서 더 잘해볼게."


 얼마 뒤 남편은 같은 메뉴를 보란 듯이 성공시켜버렸다. 나는 그 뒤로 남편의 요리 조언을 절대 무시하지 않게 됐다.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앞으로 나아가는 거구나. 발전이라는 걸 하는 거구나. (멋지구나..우리 남편..쿨럭..)


 남편의 요리는 문명의 이기와 함께 나날이 창대해졌다. 남편은 5년 동안 에어프라이어와 오븐, 주물팬, 구리팬, 토치 등을 결제했고, 칼 세트와 냄비세트도 직접 골랐다. 각종 허브와 향신료, 소스를 구해왔고 스페인 여행을 다녀와서는 소금 세트를 내밀며 설레 했다. 그의 요리는 파인 다이닝에 나오는 제목처럼 복잡하고 섬세하며 고급스러워졌다. 홈플러스에서 쪽갈비를 사다 줬더니 구리팬에 시어링을 해서 마이야르를 만들어내고 간장과 허브 각종 소스에 재우더니 오븐에서 저온으로 익히는 뭐 그런 식이었다.


 훨씬 더 복잡한 단계였던 거 같은데 사실 모르겠고 진짜 맛있어서 울면서 먹었던 기억만 난다. 그렇다. 나는 이제 lv.1에서 lv.3 정도 올라왔는데, 남편은 벌써 끝판대장이랑 맞다이를 뜨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조만간 이길 것만 같다...)


 요즘 나의 포지션은 수석 총괄 셰프를 보좌하는 어시 정도다. 오늘 저녁을 예로 들면 이렇다. 메뉴는 제철 꽃게가 들어간 토마토 파스타다. 나는 남편의 퇴근 시간에 맞춰 꽃게를 손질하고 베이컨, 양파, 마늘, 브로콜리, 새우를 잘라 가지런히 놓아둔다. 셰프님이 좋아하시는 토마토 페이스트와 홀토마토를 사놓았고 미리 캔도 따 놓는다. 셰프님이 주방에 입장하시면 파스타 그릇과 식기를 식탁에 세팅하고 마지막에 쓰실 파마산 치즈(이것도 남편이 샀다)와 치즈 그레이터(이것도 남편이 샀다)를 미리 내어둔다.


 셰프님은 오늘 면수를 진하게 내실 모양이다. 국물내기용 새우와 꽃게 등딱지를 넣어서 육수를 만들고 그것들을 다 건진 뒤 거기에 파스타면을 넣으신다. 올리브유를 두르고 마늘을 볶아 향을 낸 뒤 베이컨과 양파를 볶고 게를 볶는 것 같은데 그 뒤로부터는 잘 모르겠다 ㅎㅎ 아무튼 게를 절반은 살을 바르고 절반은 넣어서 볶고 홀토마토는 쓰지 않는 것 같다. 냄새가 진짜 좋다. 간은 뭘로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완성된 저녁 파스타는 정말이지 훌륭했다. 결혼 기념일 때 갔었던 그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그 파스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4살짜리 아이는 '아빠 완전 요리사'라며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나는 감동받은 마음을 조금 억누르며 물었다.

 "여보 치킨스톡 넣었지?"

 "아니"

 "근데 이런 맛이 나? 뭐 넣었는지 기억나나?"

 "아니"


 ...   


 그래, 우리 남편의 유전자는 저런 것이지.. 그래. 100% 인정한다 이거야. 나는 맛있는 걸 먹고 난 뒤에 오는 정말 행복한 기분, 기쁜 마음으로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했다. 설거지는 내가 더 잘한다고요. 암요. 각자 잘하는 걸 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나는 오늘도 소망한다. 남편의 이 훌륭한 요리 유전자가 우리 아이에게도 가있기를. 아이도 요리를 즐기고 잘하기를!!!


엄마는 있잖아...이미 틀렸어.



오늘 남편이 만들어준 꽃게 토마토 파스타.




 


<대충 적어보는 남편이 한 요리들>

토마호크, 등심, 안심, 살치살 등등의 스테이크 (번외로 미친 소스를 곁들인 찹스테이크)


투움바, 토마토, 까르보나라, 봉골레 등등의 파스타 (투움바는 아웃백보다 맛있음)


필라프, 나시고랭, 빠에야, 김치볶음밥, 야채볶음밥, 소고기볶음밥 등등의 밥류 (캠핑 가서 남은 재료 거의 없는데 미친 마성의 볶음밥도 만들어낼 줄 암)


잔치국수, 비빔국수, 칼국수, 떡국, 만둣국, 미역국, 소고기 뭇국, 불고기, 제육 등등의 한식(고명으로 올리는 지단까지 잘 부치면 어쩌란 말?)


떡볶이, 치킨, 동파육, 통삼겹 오븐구이, 스팸마요, 치킨마요, 야끼우동, 양푼이참치비빔밥, 콩불 등등의 별식(특제 소스에 재운 뒤 에프로 만든 치킨은 굽네보다 더 맛있..)


에그인헬, 오지치즈프라이, 캐러멜 팝콘, 만두강정, 칠리새우 등등의 간식까지...


하.. 배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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