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 또 올게요, 엄마!

이번에 못 가서 죄송해요

by 별미래
오느라 고생했어, 언능 씻고 쉬어♡



오늘 이내로 도착하려나?

한숨부터 나온다.

누구를 위한 뒤늦은 출발이었나?

급한 일만 처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휴게소 두 번 들렸다고

평소에 차만 안 막히면 4시간 이내에 도착할 거리를 8시간 넘도록 차 안에서 답답한 시간을 보냈다.

벌써 밤 12시가 다되어간다.


한 때 우리 집이었고 내 집이라고 생각했다. 도색으로 겉보기엔 멀쩡한 엘베 없는 늙은 6층짜리 아파트 중 5층.

선물세트와 짐꾸러미를 가득 들고 가뿐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도착완료다.







6년 가까이 시댁 위층에서 살다가 이제는 차로 7분 거리인 시댁에서 아침만 먹고 부리나케 출발하고 싶었다.

조금 있으면 애들(아가씨네 식구들) 온다고 그냥 가면 아쉬우니까 얼굴만 보고 가라 하신다.

과일 먹으면서 쉬었다가 가라는 부탁을 매번 거절하지 못했다.

이 착한 며느리의 탈을 언제까지 쓰고 살아야 할지 매 순간 고민이다.


시간은 점점 흐르고 마음만 조급하다.

내 입에만 쓰디쓴 과일과 공기가 잔뜩 들어간 푸석한 한과를 어거지로 욱여넣는다.

차가 막히는지 10시가 넘도록 오지 않는다.


마음은 이미 천안논산 고속도로를 통과해 정안 휴게소까지 도착해서 여유 있게 커피 한 잔 하면서 눈 좀 붙였을까? 하는 생각이다.

속만 타들어 가고 아무도 그 맘은 알아주지 않는다.

그저 멍청한 티비 앞에서 무의미한 시간이 흐를 뿐.


늦게 도착한 그 집 식구들까지 합세해 우물쭈물하다가 점심까지 먹게 된다.

간만에 만난 동생들과 딸내미는 신나게 놀기 시작하고 누군가의 속에서는 천불이 나기 시작한다.

10년이 넘도록 그 공간에서 아직도 혼자만 이방인인 듯.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오고 싶었다.

단, 1분 1초라도 빠르게.


"이제 출발하면 너무 늦겠다.

애들 잘 노는 데 좀 더 있다가 밤늦게 가던지 내일 가면 안 되나?"


(이번에도 역시나 불난 집에 부채질? 아니 기름을 갖다 부어대는구나)






10살부터 서울로 취직하기 전까지 15년 이상 먹고 자고 했던 집이다.

취직한 이후에도 틈나는 주말마다 휴식이었던 안식처.

남매들은 떠나고 두 분만 남은 그곳은 크게 변하지도 않았고 크게 변할 것도 없다.

단지, 평소 미니멀라이프 생활을 즐기시는 엄마 덕분에 휑~한 집안이 오늘따라 더 썰렁할 뿐.




짐정리를 하고 씻기 시작한다.

오랜 시간 온수를 쓰지 않은 탓에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는다.

한참 기다렸다 겨우 온수가 나오나 싶더니 줄줄줄 샛노란 물이 나온다.

찝찝한 마음에 찬물로 겨우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고 발만 겨우 씻고 나온다.

(아빠는 1년 365일 중 360일 이상을 목욕탕으로 새벽출근 하신다

& 엄마는 뒷베란다 세탁기 연결 호스를 매일 뺐다꼇다 하시며 쭈그려 앉아 온수를 받아 쓰신다)



겨우 잠자리에 들었으나 1초 만에 6층 아파트 건물이 무너질 듯한 천둥소리가 수면을 방해하기 시작한다.

귀마개로 귀를 틀어막고 겨우 잠을 청해 보지만 이번에는 딸아이의 거센 발차기 덕분에 잠이 달아난다.

세 식구가 오붓하게 한 방에서 안락하게 잠을 자야 하는 데 여기서도 왠지 모르게 이방인이 된 듯하다.

멍하니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다음 날 아침

이른 시간부터 상다리가 부러질 듯한 아침상이 한바탕 지나가고 치워야 할 시간.

설거지 요정으로 변신하는 시댁과 달리 이 집에서는 설거지가 허락되지 않는다.

딸이든 며느리든 그 자리를 쉽게 내주지 않는다. 68년 된 그 고집을 꺾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는 일이 없이 어슬렁 거리다 거실 소파에도 앉아본다.

바보상자에서 주로 방영 중인 프로그램은 낚시, 트롯, 당구 세 가지다.

어느 것에도 공감을 하지 못한 채 이번에는 작은 방으로 가본다.

보일러가 들어오지 않는 냉랭한 작은 방은 친오빠가 쓰던 방이다.

오래된 책상과 의자가 튼튼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잠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내 자리가 아닌 듯한 불안함과 찬기운이 몸을 일으켜 세운다.




세 식구는 이불이 깔려있는 방에서 약속이나 한 것처럼 수면모드를 장착하고 시체 놀이에 빠진다.

나무늘보가 된 세 식구의 배꼽시계가 울리기도 전에 점심 한 상이 또 거하게 차려진다.

아침과는 또 다른 메뉴들로 구성한 점심 밥상 앞에서 감사한 마음과 동시에 죄송한 마음으로 또 한 끼를 해치운다.


늦은 오후 슬며시 현관문을 열고 5층 계단을 빠져나온다.

다행히도 근처에 365 영업 중인 대형마트에 가서 죄송스러운 마음을 대신할 먹거리를 찾아본다.

옆에 있는 다이소에서는 제일 먼저 시트지와 붙이는 셀프 벽지를 찾는다.

타일보수제, 손소독제, 마스크, 종이호일 등의 각종 생활 용품을 잔뜩 담아본다.

무거운 짐을 잔뜩 들고 5층까지 꾸역꾸역 들고 올라와서 '아우, 힘들어' 한마디 실수를 내뱉는다.

30년 넘게 이렇게 살고 계시는 두 분의 삶은 아직도 매일매일이 고단할 터인데 말이다.




오후 5시가 넘자 엄마는 다시 분주해지고 아빠는 고기 구울 준비를 하신다.

친 오빠네 사돈 집에서 해마다 보내주시는 소고기세트가 이번에는 우리 차지가 되었다.

소고기만 구워 먹기만 해도 되는데 평소 먹고 싶었던 꽃게탕부터 오징어볶음, 사이드 메뉴의 계란찜과 진미채볶음, 각종 나물과 김치로 구성된 식사는 최고급 한식당보다 더 고급지고 맛깔나다.

다시 또 설거지가 한가득 쌓일 터인데 굳이 이쁜 접시에 따로따로 담아내신다.

그저 토 달지 않고 정성껏 준비해 주신 한 끼, 맛있게 먹어주는 게 그 사랑에 대한 보답이다.

한 상이 거하게 지나나고 이 집에서도 후식타임이 기다리고 있다.


준비된 과일은 백화점 최고급 과일코너에서 공수해 온 것처럼 신선도 100%, 당도는 15 브릭스 이상의 새콤달콤한 비타민 덩어리들이다. 어젯밤 뜬 눈으로 지새운 피곤함을 말끔하게 씻어내기에 더할 나위 없다.

아빠와 함께 먹는 한과는 어제 먹었던 공기반 물엿반의 밍밍한 맛과는 차원이 다르다. 일부러 식사가 시작되기 전에 따뜻한 곳으로 옮겨둔다. 겉은 바삭하지만 입안에 넣으면 사르르 녹아내린다. 많이 달지 않아서 질리지 않아 계속 들어간다. 조청의 달콤함까지 어우러져 쉽게 잊히지 않은 그 맛이 오늘따라 생생하게 그려진다.


후식까지 말끔하게 먹고 엄마의 설거지도 어느새 끝이 났다. 아빠는 우리한테 보고 싶은 것 보라는 말과 함께 안방으로 들어가신다.

어느새 또 잠들어있는 남의 편 님한테 아이는 또 자냐고 투정을 부리며 놀아달라 떼를 쓴다.



어젯밤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사람이 갑자기 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오늘 밤에도 혹시 뜬 눈으로 밤을 지낼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찬물에 긴 머리를 절대 담그지 않는 사람의 머리에 슬슬 기름기가 차오르는 걸 참지 못한다.

이틀 째 머리를 감지 못하고 뜨끈한 물에 샤워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 하루종일 찌뿌둥하다.

내일까지 버텨 낼 수 있는 깜냥 따위는 없다.

남의 편을 보니 하루종일 뒹굴어서 그런지 컨디션이 그리 나빠보이지 않았다. 애는 워낙 어릴 때부터 장거리를 많이 다녀서 늦은 밤에는 차만 타면 잘 잤으니까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엄마, 우리 지금 그냥 출발하려고"

"아니 왜? 벌써 가려고?

"내일 가면 차가 엄청 막힐 것 같아, 그리고 엄마 밥 하느라 너무 힘든 것 같고 미안해서"

"넌 또 왜 이상한 말을 하고 그러냐, 그냥 내일 아침밥 먹고 가지"

"아니야, 지금 출발하는 게 낫겠어"


갑자기 엄마는 침대를 박차고 나와 스티로폼 아이스박스를 꺼내어 이것저것 담기 시작한다. 어젯밤 양손 가득히 들고 온 선물세트와 짐보다 더 많은 짐이 생겼다.

몇 달 동안 차곡차곡 준비해 놓은 것들이라 거절할 수가 없다.

다음에 또 온다는 말만 남긴 채 5층 계단을 거침없이 내려온다.

밤 8시. 차에 타자마자 집 주소를 찍는다.

논스톱이면 자정 전에 도착이다.



23시 55분.

다행히 우리의 주차 한 자리가 비어있었고 마침내 짐을 옮기고 아파트 현관입구에 도착했다.

기다림의 시간이 없이 1층으로 직진이다.

드디어 개판 5분 전인 맥시멈 라이프의 끝판왕 내 집에 들어왔다.

"그래, 여기가 내 집이지"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휴.

내 집안 향기가 몹시나 그리웠나 보다.

무거운 짐들을 옮기고 냉장고 빈 공간에 두서없이 쑤셔 박는다.

늦은 시간이라 잘 도착했다는 전화는 하지 않았다.


맥주 한 캔을 꺼내 마신다.

친청이 멀어서 괴로운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눈물을 훔치고 괜한 옷가지들을 빨래통에 집어던졌다.


그렇게 친청 천국은 아주 짧고도 빡센 1박 2일의 여행처럼 급 마무리 지어졌고 샤워는커녕 머리도 감지 않은 채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덧붙임) 부녀의 감기로 인하여 친정에 가지 못하니 아주 조금 불편한 그곳이 오늘따라 사무치게 그립다.



사진출처 : 언스플래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