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에 다녀온 지 석 달도 채 되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음식을 먹을 때마다 또다시 불쾌감이 느껴진다.
작년 11월 즈음 1년 넘게 미루고 미뤘고 참고 견디다 못해서 겨우겨우 간 치과인데 벌써 또 치아가 말썽인가?
알면서도 일을 크게 벌인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라는 왠지 치과 진료비에 제일 잘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 싶다.
아무리 치과 원장님이 젊은 날 그토록 바라던 이상형이라고 해도 40대 중반의 꽉 찬 나이의 아줌마의 이상형은 이제 이상형일 뿐이다.
한두 번 갔다 오면 가벼워지는 지갑은 따놓은 당상이라 치과에 가는 것은 한껏 미루고 싶은 대표적인 일이다.
지금 한파라서 너무 춥기도 하고 방학기간이라 애를 혼자 두고 시간 맞춰 예약하기도 쉽지 않다고 나름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가면서 이번에도 역시나 미루고 있다.
물론 딸내미 치과 정기 검진은 부지런히 다니고 있다.
미래님!
오랜만에 오셨는데 어디가 불편하세요?
아, 오른쪽 아래 어금니가 아프시군요. 접수 완료 되었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시면 안 쪽에서 진행해 드리겠습니다.
네.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왔어요.
그 키가 훤칠하고 눈매가 또렷하며 목소리까지 젠틀하신 남자 원장님은 아직도 그대로 계신 거죠?
그나마 그분이 계셔서 제가 이사 갔는데도 굳이 여기까지 오는 12년 단골(?) 환자 아닙니까?)
미래님! 들어오세요.
1번 의자에 앉으시면 됩니다.
네.
(다시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데 여기는 왜 12층인가요?)
의자가 뒤로 젖혀집니다.
네.
(그냥 똑바로 앉아 있고 싶습니다)
바람입니다.
네.
(이가 시리니 바람에 몸까지 으스스해집니다)
원장님 오셔서 봐주실 겁니다.
네.
(스케일링만 하고 가면 안 될까요?)
.
.
치아가 깨져서 씌워야 합니다.
네.
(이번에는 얼마인가요? 혹시 싸게는 안될까요?)
옆치아도 충치가 생겼네요.
네?
(이건 또 얼마예요? 한 번에 2개는 너무 힘들어요)
치료 진행할까요?
네.
(그런데 이번달 생활비가 빠듯합니다)
그리고 잇몸도 매우 약한 상태입니다.
잇몸 치료도 병행해야 합니다.
네.
(아직 젊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네요. 몸이 먼저 신호를 보내는군요. 벌써 잇몸이 약해졌다고요?
그 유명한 인사돌로 안될까요?)
.
.
.
마취 시작하겠습니다. 주사 2번 들어갑니다.
네.
(제발 살살 한 번에 안될까요?)
제 쪽으로 고개를 돌려주세요.
네.
(원장님 얼굴이 잘 생겨서 계속 보고 싶지만 어차피 가려서 보이지도 않으니
편하게 천장 바라보며 한 숨 자고 싶어요)
마취 잘 된 것 같으니 시작하겠습니다.
지~~~~~~~잉~~~~~~~쓰~~~~ 으
/ Sh~~~~~치익~~~~~~and smell!
네.
(마취가 잘 된 게 진짜 맞나요? 흐, 으, 응, 아, 악)
물입니다.
네.
(격하게 목이 마르네요. 그냥 마셔버리면 안 될까요? 마시고 싶습니다)
입 한번 헹구세요.
네.
(아직 안 끝났나요? 빨간 맛이 느껴지는군요)
오늘 진료를 끝났고 잇몸 치료와 스케일링 진행하겠습니다.
네?
(꼭 오늘 스케일링까지 해야 하나요? 아까는 그런 말이 없었던 것 같은데요)
.
.
수고하셨습니다.
2시간 이후에 식사하시고 한쪽으로만 주의해서 씹으세요.
네.
(몹시 기운이 빠져서 지금 당장 뭘 좀 먹어야겠는데요?
갑자기 낮부터 삼겹살이 땡기네요, 요 앞에 감자탕 집도 있던데 맛이 어떨까요?)
밖에서 예약 잡고 일주일 뒤에 오시면 됩니다.
네.
(일주일 안에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미래님!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충치 하나 치료 완료하고 잇몸 치료와 스케일링하셨네요.
나머지 하나는 다음에 오셔서 계속 진행하시면 된다고 하시네요.
일주일 뒤 언제가 편하실까요?
네, 아무 때나 상관없어요.
(사실 저 되게 바쁜 사람입니다. 꼭 다시 와야 합니까?일단은 담당 원장님 계시는 날로 잡아주세요)
오늘 치료비는 569,300원 나왔습니다.
일시불로 진행할까요?
네.
(왜 이 카드는 무이자 할부가 안 되나요? 저 너무 힘들어요 )
일주일 뒤에 뵙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네.
(혹시나 제가 오지 않더라도 전화나 문자로 찾지 말아 주세요)
이가 튼튼한 아빠를 두고 딸아이는 치아가 전반적으로 약하게 태어났다. 심지어 어금니 영구치 하나는 최대한 버티다가 언젠가는 임플란트를 해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다. 그때까지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딸아이의 담당 의사 선생님이 못을 박았다. 모든 게 엄마를 닮아서 그런가 싶어서 며칠을 잠 못 이룬 적도 있다. (영구치가 왜 이미 썩어서 나오는지에 대한 원인은 모른다 하셨다)
길 가다가 치과라는 간판만 보게 되면 항상 초등학교 4학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엄마 손에 붙잡혀 치과에 끌려가 아무 말 못 하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면서 치료를 받았던 그 생생했던 공포는 지워지지 않는다. 아직까지 어딘가 아파서 치료받을 때 그 정도로 많은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없다.
그때의 치과는 아무래도 지금보다는 의술이 덜 발달해서 통증도 심했고 어린 나이라 견디기도 더 힘들었던 것 같다. 그 뒤로도 치과의 인연은 지금까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아이도 혹시 그런 괴로운 고통을 겪게 될까 봐 걱정이 앞선다.
아무리 게으른 엄마라도 아이의 치과 정기 검진날은 빠뜨리지 않는다. 아이가 다니고 있는 치과에서 꼬박꼬박 정기적으로 오는 문자에 바로 전화를 걸어 예약을 잡는 일은 엄마의 막중한 임무이다.
자라면서 이 때문에 고생한 엄마처럼 극한의 공포를 경험하지 않기를 바란다. 너만은 제발 이 편한 세상에서 맘껏 크게 웃으며 살아가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