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미래 Jan 19. 2023

어느 평범한 회사원의 설 선물세트

<아내를 위한 선물인가요?>


"이번 설에는 선물세트 안 오나? 보통 늦어도 일주일 전에는 왔는데 아직까지 안 왔네"


"오겠지, 설마 안 오겠냐?"


13년 전 헤드헌터에 픽을 당했던 남자는 결혼 후에도 쭉 같은 회사에서 근무 중이다.

가족보다 항상 일이 우선인 그 남자의 회사는 항상 일찌감치 명절 선물을 보내줬는데 유독 이번 설에는 소식이 없었다.

불경기라고 핑계 대며 설마 직원들 설 선물까지 없애는 인색한 회사는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한 때 회사가 어렵다고 직원들 월급을 삭감했을 시기에도 결코 회사를 옮기지 않았던 의리의 남자가 다니는 회사다)


그래.

10년 넘게 다닌 회사인데 좀 더 기다려보자!




대한민국에서 애 낳은 아줌마가 되고 나서는 작은 거에 더 민감해진 듯하다.

언젠가부터는 명절 상여금 입금 날짜보다 집으로 오는 자잘한(?) 선물세트에 더 예민하게 반응을 보인다.

방학이라 밖에 나갈 일이 별로 없었던 찰나, 분리수거를 위해 온몸으로 현관문을 밀었다.

추운 날씨에 밖에서 꽤 오랜 시간 덜덜 떨고 있었던 베일에 싸인 선물세트와 마주했다.

그 순간 양손 가득 들고 있었던 쓰레기를 도로 내려놓고 싶었다.

아줌마는 학부모가 된 겨울 방학 기간 설 명절 앞두고 시댁 식구들 말고는 찾는 사람 하나 없이  초라해진다.

문 앞의 꽤 큼지막한 상자가 긴 겨울 방학 덕분에 지친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는 손길이라 생각되어 그저 반가울뿐이다.




이번 설에는 뭐지?

지나간 몇 번의 명절에는 성의 없이 쇼핑백채로 테이프 포장만 된 숲햄이었다.

줄 곧 한 제품을 몇 번이고 계속 보내 준 적은 없었는데 숲햄은 여러 번 배송되었다.

첫 번째 숲햄 말고는 받고 나서 큰 기대나 설렘은 없었다.

그렇다고 숲햄이 딱히 싫지는 않았다. 그냥 명절이니까 기꺼이 오는가 보다 했다.

사실 쌓여가는 숲햄을 남편 몰래 당근에 낮은 가격으로 팔아치운 적도 있다.

이제 숲햄에서 다른 걸로 바뀔 때도 되지 않았나?

은근슬쩍 기대는 하고 있었다.

혹시나 하며 기대했는데 기대한 만큼 이번에는 달랐다.

택배 비닐로 꼼꼼하게 포장된 덩치 큰 선물세트는 뜯기도 전에 내 맘을 사로잡았다.

일단 숲햄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벌써 만족도는 어느 정도 차올랐다.



분리수거를 깔끔하게 끝내고 순간이동으로 집에 들어와 비닐을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풀어헤쳤다.

덩치에 비해 사알짝 가볍긴 했으나 실망시키지 않았다.

큼지막한 상자에 푸른빛과 함께 인쇄된 붓글씨와

선명한 빨강의 낙관 "명풍김"

청정 바다의 선물이란다!

이 얼마나 가운 선물인가? 어깨춤이 절로 나는구나! 에헤라디야~


최고의 국내산 원초만을 선별하여
맛과 영양을 지키며 석쇠에 구운 맛 그대로
엄마의 마음 그대로...


박스 문구 봐라.

캬~

최고의 국내산 원초란다.

차이나가 판치는 세상이라 산타까지 차이나에서 온다는데 이 얼마나 귀한 국내산 제품인가!


맛과 영양을 지켰단다.

그래, 요즘에 (자극적인) 맛만 좋고 영양이 불균형적으로 치우치는 음식이 많은데

맛이 좋으면서 영양까지 챙기는 센스도 놓치지 않았구나!


석쇠에 구운 맛 그대로란다.

그 맛 알지? 아이고야, 설마 그 맛을 모르겠어?

불 맛이 나는 그 맛, 그러니까 맛이 좋을 수밖에 없지!

얼마나 맛있게요?

 

And 엄마의 마음 그대로란다.

그래, 그 마음은 차고도 넘치도록 알지? 알고말고!

나도 엄마인데(울컥).

흐엉ㅜㅜ


큰 기대와 함께 박스를 연다.

오예!



우리 집 겨울방학 돌밥모드에서 필수품은 단연코 계란과 김이다.

달랑 세 식구인데 이리 풍성한 김세트라니!

황송하고 또 황송할 따름이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십여 년 전 명절에 보내주신 인삼비누세트는 바로 시댁으로 직행했답니다.

언젠가 지독한 냄새와 함께 포장봉투가 빵빵했던 시어터진 김치 3종세트는 친정어무이께서 아깝다고 생선지짐할 때 넣었습니다.


오늘로써 오래 묵었던 그 서운함을 개운함으로 떨쳐버리겠습니다.



게으른 엄마라서 아침 준비를 못했을 때

아침부터 밥 달라하는 아이를 위해 애 혼자 밥 한 끼 때울 도시락김은 일단 대 환영입니다.

세 식구 한 자리에서 집밥 먹을 때 초라한 밥상 위 계란후라이 옆에서 빈자리 채워 줄 재래김도 사랑스럽고요.

가끔 아줌마 혼자 먹는 안주상에 자주 올라오는 매운 주꾸미 볶음의 환상 짝꿍인 무조미김도 빼놓지 않았군요.

내내 김만 싸 먹다 목이 멜지 모르니 가끔씩 미역국도 끓여 먹겠습니다.

밋밋한 돌자반 주먹밥이 지겹지 않도록 영양까지 생각해서 새우멸치돌자반도 적극 활용하겠습니다.

돌자반김주먹밥이 물릴 때 즈음에 특별식으로 조금 수고스럽지만 김밥까지 쌀 기회를 주신 이 선물세트가 결코 싫지 않습니다.

울트라 초특급 김 선물세트 너무나 감사합니다!!




설 명절이 유독 싫은 건 결혼을 한 후 며느리의 역할이 추가되어서 그렇다는 이유는 이제 식상한 멘트다.

음.

누군가에게는 어쩌면 좀 더 식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아이가 학교에 입학 한 뒤로 긴 겨울방학 안에 끼어있는 설 명절이 싫을 뿐이다.


명절만 겨우 보내면 다시 학교 생활이 이어져 어느 정도 자유시간이 확보되는 추석과는 다른 설 연휴가 이제 시작된다.

이혼을 결심하지 않은 채 시댁에서 명절의 수고로움을 완벽하게 수행해 놔도 겨울 방학은 아직도 35일이 남게 된다.

남은 긴 겨울 방학, 돌밥모드 장착기간에 큰 힘과 든든한 방패가 되어줄 초특급 울트라 김선물 세트를 보내 주신 남편 회사 사장님께 다시 한번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이 쯤되면 다음 명절에도
뭘 원하는지 아실 것 같아요.
다음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덧붙임) 글쓴이는 본 글에 등장하는 선물세트를 만든 회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순수한 마음만 담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만을 표현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방학이라고 핑계 대지 말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