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가위 어디 있는지 아세요?
(어제 식탁 연필꽂이에 꽂아 놨잖아)
엄마, 색종이 여기다 둔 거 같은데 없어요.
(책꽂이 밑 서랍에 넣어 놨잖아)
엄마, 그 책 어디 있는지 안 보여요.
(안방 책꽂이에 꽂아 놨지)
엄마, 가위 옆에 풀이 있었는데?
(색종이랑 같이 넣어놨지)
엄마, 내 한자노트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책상 서랍 영어노트랑 같이 넣어놨지)
엄마, 지금 몇 시쯤 되었어요?
(아직 책상에 앉은 지 10분 밖에 안 지났거든)
엄마?!
엄마를 끊임없이 불러대는 겨울방학 동굴 생활 일주일이 겨우 지나고 있다.
오전에 거실 식탁 꽁무니에서 글 좀 써보려고 앉아있으면 계속 호출을 한다.
흐름이 끊긴 후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이번에는 글쓰기 책을 펼치고 책을 읽어가며 필사 좀 할라치면 야속하게 배꼽시계가 울린다.
달인 김병만 아저씨의 삼각김밥김과 삼각틀의 도움으로 오늘도 반찬 없이 멸치스팸삼각김밥을 속사포로 5개 만들어낸다.
집에서 간편하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이런 아이템은 사랑스러울 수 밖에 없다. 안에 내용물만 바뀌면 쉽게 질리지 않은 메뉴다. 타이밍 놓친 글쓰기와 책 읽기는 잠시 미뤄두고 이번에는 엄마 찾는 소리가 안 들릴 것 같은
옷방으로 들어가 본다.
작년 겨울보다 7cm가 훌쩍 커버린 딸은 벌써 키가 140cm이 넘는다.
작년에 입었던 두꺼운 겨울옷부터 작아진 옷, 3학년 신학기에 입을 만한 옷이 얼마나 있는지 점검차 한 벌, 두 벌 꺼내다 보니 온 방바닥에 애 옷이 쫙 깔렸다.
이럴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점점 배가 산으로 간다.
엄마, 엄마?!
문 밖 어딘가에서 애타게 엄마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엄마, 지금 바쁘거든, 엄마 좀 찾지 마라!!"
어쩌다가 백화점 세일 때 건진 옷은 아깝다고 살짝 팔이 짧은 것 같지만 그래도 2년이나 입혔다.
아울렛에서 산 상하세트 2벌은 효율성이 좋아서 작년 겨울 내내 번갈아가면서 입혔다.
명절 때마다 시엄니가 사주셨던 옷들은 그나마 상태가 좋아서 시조카에게 물려줄 생각을 하면서 구분해 놨다.
품이 작아진 경량패딩, 짧아진 기모&골덴 바지부터 길었던 핑크병 시절에 입었던 핑크색 티셔츠와 바지들도 구석구석 잘도 처박혀 있었는지 '나 여기 있었소' 하면서 튀어나왔다.
오래도록 까먹고 있었던 옷장 뒤쪽에서 130cm까지 입힐 수 있는 한복도 2벌이나 나왔다.
이쯤 되니 도저히 감당이 안된다.
겨울 옷들이라 부피가 커서 높이 쌓인 옷더미 속을 헤매며 조카에게 물려주기로 마음먹었던 옷까지 죄다 사진을 찍고 당근앱을 열었다.
미세얼룩 있으나 티 안 남 / 예민 맘 정중히 사절/ 반품 안됨/ 신중히 결정하시고 챗 주세요
옷마다 가격만 따로 정하고 복사와 붙여 넣기로 사진과 함께 주르륵 게시글을 올렸다.
하지만 이번부터는 새로운 글귀를 하나 더 넣었다.
'가격흥정 사절'
며칠 전 아이 어릴 적 읽어줬던 소전집 세트를 올렸을 때도 가격을 깎아달라는 줌마들의 연락이 잦았다.
안 그래도 싸게 내놨는데(판매자의 기준이겠지만 소비자한테는 물론 비싸게 느껴질 수도 있는 문제일 수 도 있다) 자꾸만 깎아달라고 하고 차비도 안 나온다는 등 얼굴 안 본다고 예의 없게 채팅을 주셨다. 생활력이 매우 강한 줌마들의 힘 덕분에 어쩔 수 없이 문구 추가를 넣었다.
'당근당근당근'
몇 개의 글을 올리자마자 알람이 계속 울린다.
와우! 브런치 글 올린 지 며칠 지나서 휴대폰이 쥐 죽은 듯 아주 조용했는데 나름 반가운 알람이 계속 온다.
꽁돈이 생긴 거 마냥 알람이 울리는 사이사이 꽁돈으로 무얼 할까? 다시 고민에 빠진다.
물론 요즘 사고 싶은 건 다양한 책들이다. 그나마 책이라서 참 다행이라고 위로해 본다.
(아직 사놓고 안 읽은 책들이 여전히 즐비하게 '나 여기 있소' 하며 읽어주길 기다리고 있다만)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게 트렌드를 알아야 한다고 하니 트렌드책도 사고 싶다.
계속 글을 써야 하니 도움 받을 글쓰기 책도 좀 더 보충해야 할 것 같다.
도서관에 예약 걸어둔 깜깜무소식인 베스트셀러도 같이 장바구니에 넣어본다.
예비 초3인 딸을 생각해 '초3보다 중요한 시기는 없습니다'라는 책을 구비하고 있어야 중요한 3학년 시기를 불안하게 보내지 않을 것 같다.
하루종일 집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당근 거래를 완료하고 뭔가 생산성 있는 일도 한 것 같긴 한데 제일 중요한 초고인 쓰레기조차 제대로 써놓지 못했다. 다음 주에 있을 독서모임에 대한 발제문도 정독하고 필사도 해야 하는데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일만 잔뜩 벌려놓고 하다만 옷방 정리는 마저 끝내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또 밥 할 시간이 다가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주 1회를 발행으로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은 글이지만 쓰기로 마음먹고 분명 오늘은 꼭 쓰자!
굳게 다짐하며 하루를 시작했는데 남은 건 당근거래로 입금된 책 한 권 구입할 정도의 적은 돈과 잔뜩 쌓인 설거지뿐이다.
금요일까지는 발행해야 하니 어찌 됐든 머리를 쥐어짜서라도 약속은 지켜야 한다.
혹 전에 써놓은 글감이라도 찾아볼까? 아님 SNS 남겨 논 짧은 글에서 이어갈 글은 없나?
최근에 각종 수업을 받으면서 뒤죽박죽 적어놨던 노트라도 뒤져봐야겠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샅샅이 뒤져봐야겠다.
점점 마음만 조급해진다.
엇! 지난번 도서관 포토 에세이 수업에 참여했을 때 노트에 적어놨던 메모가 갑자기 선명하게 눈에 뜨인다.
처음 글 쓸 때 추천하는 방법
1. 키워드 글쓰기
2. 초성에세이 쓰기
수업시간에 1번 주제는 비, 가을, 눈사람, 단풍, 마카롱, 구두였다.
(단어들을 조합해서 글을 쓰는 시간은 딱 10분이었다. 글쓰기 초보가 처음 도전한 키워드 글쓰기는 주저리주저리 쓸데없는 내용만 늘어놓은 채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
2번 주제는 초성ㄱ부터 ㅇ까지 순서대로 문장을 이어가는 짧은 에세이를 쓰는 시간이었다.
안 그래도 요즘 당근거래에서 하도 깎아달라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때 작성한 글을 보고 흠칫 놀라며 본인 글을 다시 읽고 스스로에게 공감을 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제목 : 깎는 손님들
ㄱ : 가격이 비싸다고요? 오백 원이라도 깎아달라고요?
ㄴ : 나눔 장터에서 아이옷과 인형, 장난감을 팔고 있었는데 깎아달라는 손님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
ㄷ : 다 팔지 못해서 물건을 도로 가져가야 할 것 같아서 심란한데
ㄹ : 리본 머리띠도 백 원에 달라고 한다.
ㅁ : 밑져야 본전이라 하지만 이건 진짜 너무하다.
ㅂ : 바꾸러 온 손님까지 있고.
ㅅ : 소소한 행복으로 아이와 추억 쌓으려 왔는데
ㅇ : 인건비는커녕 너무 깎는 손님들이 많아서 마음에 상처만 받고 가는구나!
10분 안에 생각해서 이런 글을 썼다니? 나름 수업에 집중을 잘했었나 보다.
맞다. 지난 초가을 더위가 다시금 찾아온 날, 코로나로 3년 만에 나눔 장터에 참여한 내용을 썼던 거였다.
그때도 참으로 물건 값을 깎으려는 사람들이 참 많았던 기억이 난다.
예전에 써놓은 글이 지금의 생각과 어우러져 이렇게라도 글감이 되어 다시 만날 수 있어서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고 뿌듯해진다.
게다가 우리의 추억이 떠오른다 생각하니 더 쓰고 싶어 진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나중에 다시 읽어보면 쓰레기 일수도 있겠지만 추억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키보드 자판도 계속 두드리고 노트에 직접 펜을 들고 끄적이는 시간도 늘려야겠다.
글이 잘 안 써지는 날에는 키워드 글쓰기와 초성에세이 쓰기라도 꾸준히 써서 노트를 가득 채워봐야겠다.
진짜 내일은 꼭 쓰레기라도 초고를 완성하고 순간순간 떠오르는 영감을 노트에도 끄적여봐야겠다.
방학이라서
하루 종일 아이가 계속 엄마를 부른다고
밥 한다고
잠깐 마트 갔다가 커피 사러 나간다고
파바에서 빵도 사 온다고
당근 거래 한다고
집 청소 한다고
책 정리 한다고
기타 등등
온갖 핑계 대지 말고 내일은 꼭 오래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제대로 좀 써보자!
사진출처 : pexe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