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미래 Dec 23. 2022

곶감보다 바닐라라떼

찬란했던 곶감은 추억일뿐이다.




'다다다다탁 탁탁탁'

눈 깜짝할 사이 계단을 급하게 뛰어 내려가는 낯선 남자가 왠지 불길한 예감을 선물해 주었다.

오늘 아침에도 분명 3층 계단 통로 불을 끄고 출근했었다. 3층을 올라가는데 다시 불이 켜지니 여지없이 3층 현관까지 밝아졌다.

3층 문 앞에 큰 박스가 3개나 놓여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4층으로 올라가 문을 열고 난 후 그대로 주저앉았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소파와 한 몸으로 리모컨을 찾으려 할 때 하필 전화가 울렸다.






“감자칼 있지? 가지고 잠깐만 내려올래?”

오늘도 기막힌 타이밍이다. 출장 간 남편덕에 혼자 있는 게 안타까워 전화하신 게 분명하다.

머릿속으로는 쉬고 싶다고 말하고 싶은데 지난번 잡아먹은 곰 아홉 마리가 아직도 소화가 안되었는지

입으로는 '네, 알겠어요'라는 말과 함께 자동반사가 되어 3층으로 급하게 몸이 움직였다.

눈앞에 펼쳐진 이 광경을 믿을 수가 없다.

하필 왜 일찍 퇴근한 걸까? 후회가 밀려오는 순간이다.

살짝 지친 표정이 섞여 있지만 설레는 표정의 좋은 기분이 드러나셨다.

두 분이서 숙달된 솜씨로 감 껍질을 벗기고 계셨다.

감은 감인데  익숙한 그 어릴 적 감이 아니다. 달달한 걸 좋아해서 아이스로 냉동실에 얼려먹었던 연시감도 아니었다. 어릴 적 친정아빠가 사 오셨던 비닐에 5개씩 들어있던 단감과도 사뭇 달라 보였다.


“이 감은 뭐예요?” 넌지시 물어본다.

“곶감 만드는 둥시감이야, 일명 땡감이지. 떫은맛이 나는 감이야”

“앞으로 매년마다 만들라고”

“이 많을 걸  다 누가 먹어요?”

“누가 먹긴 누가 먹어? 사람들도 나눠주고 우리가 먹지”

“얼마나 맛있는데, 곶감이 얼마나 비싼 줄 아니?”

“곶감은 제사상에도 올라가는 귀한 음식이지”

“아까 3박스 와서 먼저 우리가 깎는 중이었는데 지금 막 3박스 더 왔더라고

“이렇게 껍질만 벗기고 꼭지 쪽은 조심해야 해”

“나중에 다 매달아야 하니까. 봐봐. 이런 식이야, 쉽지?”

내일 3박스 더 올 거야”     

거실 한가운데 김장 매트 위  다 같이 창을 하고 있는 둥시감들을 난생처음 본다.

창인데 장르는 이상하게 어울리지 않는 헤비메탈이다. 쌓여있는 감 껍질들을 보니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고개를 위아래로 흔드는 가수가 생각났다. 그 앞에서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듯이 소리를 내지르며 자유에 열광하는 관객 중에 한 명이고 싶었다. 하늘 향해 뻗어가는 고음의 가사가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겨울이 되면 냉동실에서 갓 꺼낸 말랑한 곶감이 하얀 분까지 생겨나 자연스레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느낌을 상상하고 계시는지 여전히 두 분은 어린아이 마냥 즐거운 표정으로 계속 곶감을 깎으신다.     

그 앞에서 오늘도 딴생각의 향연이 펼쳐진다.

머릿속에는 별별 생각이 다 드는데 묵묵히 감만 쳐다보며 손만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내일은 회의하고 회식 있어서 못 내려와요.

아가씨는 아직 안 들어왔나요?

곶감보다 단감을 좋아합니다!

속으로 말하기 연습만 연신 해댈 뿐이다.


   



곶감을 만든 첫 해 이후 두 분은 매년 김장보다 곶감 만들기에 더 신경을 바짝 쓰셨다. 곶감 만드는 공장이 아니고서야 이 곶감 만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그때 알았다. 초반에는 감을 일일이 하나하나 실로 엮어서 만들었다. 손도 더 많이 갔다. 과도한 중노동이었다. 이렇게까지 해서 굳이 꼭 먹어야 하나 생각뿐이었다.

또한 만드는 과정에서 통풍과 온도에 민감한 곶감이 조건이 맞지 않아 숙성 과정에서 곰팡이가 생긴 적도 있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 했던가?

한 두 해가 지나니 작은 베란다가 아닌 방 하나를 곶감 제조방으로 만들어 온도를 맞추고 선풍기 두세대로 바람을 쐬어주면서 곶감의 최적의 조건을 스스로 찾아가셨다.

해가 갈수록 비전문가의 곶감이 소문이 났는지 아니면 인기가 많아져 여기저기 나눠주신 분들도 이듬해부터 곶감을 직접 만들어 보는 걸 도전하신 걸까?

이제는 다이소를 비롯한 생활용품전문점에서 감 100개용 곶감걸이를 쉽게 구할 수 있다. 기술이 좋아지니 점점 곶감의 양은 많아졌다.  집안 냉동실은 이듬해 곶감을 만들 때까지 넉넉하게 간식으로 자리매김했다.


해마다 그 곶감 만드는 철이 다가오는 게 싫었다. 맨바닥에 앉아 무릎도 꿇다가 아빠다리를 번갈아가면서 쥐 난 발을 만지작 거리면서 며칠 동안 감을 깎는 건 곤욕이었다. 그 시기만 되면 예민함과 짜증도 함께 늘어났었다. 더 이상 곶감이라는 존재가 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공짜로 누가 줘도 결코 먼저 손이 가지 않은 음식이 되었다.


직접 깎은 둥시감을 곶감 걸이로 엮어서 만들었던 곶감 제조방의 모습





얼마 전 지인이 SNS에 곶감을 만든 사진을 올렸다. 실로 직접 엮은 감을 베란다에 걸어놓은 사진과 변신에 성공한 곶감 사진 2장이었다. 그 사진에 담긴 노고가 어느 정도 인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사진을 보자마자 생각나는 번호 4자리를 눌렀다.


"바쁘세요?"

"산에 왔는데, 왜"

"갑자기 생각이 나서요. 올해는 곶감 안 만드나요?"

"곶감? 작년부터 안 하기로 했잖아"

"왜요?"

"아버님 당뇨 때문에 안 하기로 했어, 대신 이리 운동하고 있다"

"아, 네."


결혼하고 10년 동안 곶감뿐이랴?

각종 집안 행사는 말할 것도 없이 곶감을 비롯해서 매실 꼭지도 따고 강화에 가서 직접 순무와 새우젓도 같이 사러 다녔다. 밤도 주우러 가고 감도 따러 다녔다. 일하고 애보느라 다행히 자연산 나물까지는 같이 채취하지 못했다. 시골 이모님들과 함께 했던 김장도 마다하시고 직접 우리 식구(?)끼리 김장도 시작하셨다.




우연의 일치일까? 아님 코로나의 여파 때문일까?

결혼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 더 이상 그러한 일들로 전화가 오지 않는다. 집에서 가족 생일 축하를 위해 모이는 자리에서도 배달앱을 통해서 음식과 커피까지 주문하곤 한다.

일주일 뒤 하필 이 집 며느리의 눈치 없는 생일이 다가온다. 생일 축하와 연말 송년회 겸 식구들이 다시금 모이기로 했다.


몇 년 전이었더라면 집에서 여자들은 한 상 차리기 바빴고 과일과 후식 상차림에 술상까지 내오기가 일쑤였다. 그중에 항상 빠지지 않았던 곶감은 안주 겸 후식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 찬란했던 곶감을 만날 수 없다.

(비싼 곶감이라고 직접 사지는 않으니까)


대신 올해에는 한우전문 정육식당에서 마블링이 살아있어 굽기도 전에 입으로 녹아들어 가는 묘한 매력을 느낄 예정이다.

2차로는 전에 한번 가본 곳이긴 한데 꼭 다 같이 갔으면 좋을 곳, 크리스마스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대형 카페에 갈 계획이다.



분명 두 분은 이 날만큼은 평소에 좋아하셨던 '바닐라라떼'를 주문하지 않으실까?

바닐라 라떼와 함께 그 달달하고 쫄깃했던 곶감얘기도 해볼까? 

10년 동안의 추억이야기를 살짝 꺼내보고싶다.





"집으로 바로 안 가세요?"
"라떼 먹었으니 우리는 운동 가야지, 집 앞 산으로 갈라고"



매거진의 이전글 뜨거운 첫 리뷰 작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