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이면 30살이 되는 노후된 아파트 거주한 지 7년째다. 7년을 살면서 처음으로 1층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한 달 동안 엘리베이터(엘베) 교체 공사 기간이다. 아침마다 계단에서 내려오시는 어른들의 곡소리가 들린다. 저녁마다 언제 올라가지? 휴! 한숨부터 쉬는 어른들의 퇴근시간이 길어졌다. 며칠 전 10층 사는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함께 장을 보셨는지 양손에 무거운 짐을 들고 계셨다. 얼굴엔 분명 미소를 띠셨지만 다크서클은 이미 얼굴 아래쪽까지 내려온 듯 힘겨운 얼굴이었다. 그때 마침 잽싸게 중앙현관을 거쳐 지문 인식을 하려는 1층 주인에게 부러운 듯 말을 건네셨다.
1층이라 좋으시겠어요
친정집은 엘베 없는 5층이었고 신혼집은 옥탑방 4층이었고 아래층이 시댁이었다.
10살 때부터 아파트 5층을 주저 없이 오르락내리락 한 튼튼한 두 다리의 소유자다. 결혼 후 신혼집 옥탑방 4층도 시댁이 3층인 것만 빼고는 그럭저럭 다닐 만했다. 무거운 짐이 있더라도 어찌 되었든 내 몸 하나 건사할 정도의 체력은 유지되었다. 적어도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엄마가 되고부터는 외출이 힘들어졌다. 아기띠로 아이를 안고 기저귀가방을 메고 팔에는 휴대용 유모차를 걸었다. 4층 현관을 나서기 전부터 식은땀이 났다. 며느리의 외출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 3층을 지날 때마다 죄라도 지은 양 사뿐사뿐 고양이 걸음이었다. 혹시라도 인기척에 며느리가 나가는 걸 눈치채신 시어른들이 현관문을 열까 봐 매번 긴장되었다.
(한 때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이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여유 있게 엘베를 타며 외출하는 엄마들이었다. 외출 후에는 유모차 바구니에 장 본 짐을 싣고 아이는 잠들어서 그대로 유모차를 현관에 주차하고 바로 화장실에서 맘 편히 볼일을 보고 손을 씻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외출 후 다시 4층에 올라가는 건 더 곤욕이었다. 오히려 3층에서 문이 열릴까? 기대한 적도 있었다. 숨쉬기도 버거울 정도의 상위 1%인 우람한 딸이 아기띠와 함께 밀착되어 오랜 시간 답답했는지 발버둥 쳤다. 휴대용 유모차도 그대로 오른팔에 매달려 있다. 이유식 재료를 포함한 무거운 장바구니가 추가되었을 뿐인데 환장할 노릇이다. 왼팔까지 전기가 통한다. 매번 외출할 때마다 아이를 안은 채 무거운 짐과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결국 손목터널증후군에 걸려서 통증의학과 의사와 친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밖에 나가고 싶었다. 시어른들이 아래층에 있다는 부담감과 하루종일 아이와 함께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은 그 옥탑방에서 몇 날 며칠 하루종일 있는 것 자체가 엄마의 삶을 시들시들하게 만들었다. 잠시나마 바깥바람이라도 쐬고 오지 않으면 시들해진 마음속의 줄기가 꺾여버릴 것 같았다. 따사로운 햇빛을 느끼고 싶었다. 비타민 D를 식품이 아닌 자연에서 섭취하고 싶었다.
그렇게 아이 낳고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서서히 꺾인 줄기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이사밖에 없었다.
이사를 결심하고 멋모르고 햇빛이 잘 들어오는 남향인 아파트 고층을 찾았다. 자신의 주제파악을 못하고 처음에는 20층 이상의 신축 아파트를 찾았다. 헉헉! 집값이 이리 비쌌나? 돈 때문에 신축을 포기하고 구축으로 알아봤다. 고층은 비싸서 다시 구축 저층으로 내려왔는데도 풀 대출과 이자가 감당이 안될 것 같았다. 백화점과 대형마트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대신 공원과 뒷산이 가까워졌다. 여기까지 왔는데도 부담이 되었다. 왕도가 없다. 눈에 보이는 건 이제 1층뿐이었다. 소위 말하는 로열층보다 이삼천 정도 저렴한 1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돈이면 오래된 구축 아파트를 다 뜯어고칠 수 있는 인테리어비가 확보되는 셈이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1층 계약을 서둘렀다. 충분히 알아보지 않아서 미련은 남았지만 하루빨리 나오고 싶었다. 여름 막바지인데 벌써부터 다가올 한파가 생각났다. 옥탑방의 천장을 뚫는 매서운 찬바람의 직격탄인 가스비를 생각하며 황급히 도장을 찍었다.
그 해 12월 1일 이미 한파는 시작되었다. 무사히 이사를 마쳤다. 첫날부터 2.3m의 천장이 낯설었다. 소파에 기댄 후 무심코 생각 없이 일어났다가 낮은 천장에 더 이상 머리를 박을 일도 없다. 옥탑방에서는 커튼이 필요 없었다. 이사 준비할 때 커튼 달 생각을 못했었다. 1층인데도 불구하고 남향이라 낮에 볕이 들어왔다. 집안에 볕이 들어온다는 사실만으로 감개무량이다. 황급히 베란다 롤스크린만 먼저 주문했다. 무엇보다 (구축이라 연결된 지하 주자창이 없다는 가장 큰 단점이자 장점으로) 내 집 앞에 주차를 해놓고 1초 만에 바로 짐을 옮길 수 있는 사실에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짐 옮길 때만 필요한 남편도 그전보다 협조적이다. 뭔 짐이 이리 많냐고 구시렁대는 소리도 줄었다. 이제 더 이상 외출에 대한 부담도 없다. 유모차도 현관에 주차할 수 있었다. 현관문만 열면 된다. 각종 쓰레기도 손쉽게 바로 갖다 버릴 수 있다. 슬리퍼를 질질 끌어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다. 또한 아이가 거실에서 구르기와 달리기를 해도 전혀 눈치가 보이지 않는다. 그게 행복이었다. 얼떨결에 계약했던 1층은 우리의 운명이었다. 꺾였던 줄기가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오늘도 아침부터 아파트 방송이 나온다. 911관제센터에 택배가 가득 차서 보관이 어려우니 빨리 찾아가라는 재촉방송이다. 엘베 공사 한 달 전부터 각종 생필품들은 공사 시작 전에 미리 구비하라는 권고가 있었다. 우리 집은 상관이 없다. 엊그제 휴지가 문 앞에 왔고 쌀도 무사히 배송되었다. 여전히 인터넷 장보기를 하고 마트배달을 주문한다. 중앙현관이 낮에 개방되어 있어서 배송기사님은 오히려 편하게 바로 쏙 들어오셔서 내 집 앞에 두고 가신다. 엘베 공사 기간 덕분에 1층의 편안함을 만끽하는 중이다. 베란다 커튼 사이로 볕이 들어온 걸 보니 날이 좋은가보다. 바깥세상 구경하러 가벼운 마음으로 슬슬 현관문을 열고 나갈 채비를 해야겠다.
(사실 어마어마한 공사 소음을 견디기 어려워 매일매일 외출을 강행하는 중입니다)
덧붙임) 살다 보니 1층의 장점도 있지만 단점이 정말 많습니다. 하지만 엘베 공사기간 동안만이라도 1층의 편리함을 누리고 싶어 공개하지 않으니 양해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