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증이 안된 남자를 선택해서 함께 산지 어언 13년 차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 정신 수양을 위해 산속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다. 집 밖에서 고생하며 돈 버는 게 안쓰러워 그에게 집안일은 되도록 시키지(?) 않았더니 언젠가부터 아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매일 퇴근하자마자 소파에 드러누워 있는 저 인간을 보고 있으면 내 집 안에서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도를 닦게 된다. 그래도 불쌍한 저 인간,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것 말고도 분명 쓸모 있는 사람이라 그동안 데리고 살았는데 쩝.
그의 특기는 운전이었다.
(철저한 과거형으로 쓰고 싶다)
건축과를 졸업해서 일명 노가다 판에 자리 잡은 그는 전국이 근무지다. 한때 내 남편을 보고 주위 사람들이 지어준 별명은 '다니는 남자'였다. 같은 경기도지만 경기 북부에 살다 보니 매일 아침 서울을 통과하거나 고속화 도로를 경유해서 현장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당일치기로 경기 북부에서 전라도는 물론이거니와 부산과 경남 사천, 진해까지 왕복 운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피곤한 와중에 종종 필드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펑크내면 안된다고 가끔씩 주말까지 전국 방방곡곡 혼자서 장거리를 뛴다.
1년도 안된 개인 새 차가 벌써 5만 킬로에 육박했다. 약속이나 행사가 없는 주말이면 쉬고 싶어 하는 그 인간이 짠하게 느껴지는 순간은 0.1초, 핸드폰과 밀착하여 소파에 드러누워 있는 꼴을 볼 때마다 킥을 날리고 싶다.
내 입장에서는 그나마 가족이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주말인데 집에만 있을 수 없다. 가까운 거리는 내가 운전을 할 수 있지만 먼 거리는 무리다. 나는 아는 길만 다닐 수 있는 일명 동네면허증 소유자다. 서울과 낯선 곳의 운전은 아직까지 자신이 없다. 이 동네를 벗어나려면 어쩔 수 없이 그의 손과 발이 필요하다.
얼마 전 그가 허리통증으로 드디어 병원문을 스스로 열었다. 고관절이 살짝 삐뚤어졌단다. 내가 보기엔 과도한 골프연습과 소파에 잘못된 자세로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서 생긴 고질병으로 보였다. (그러니까 좀 바른 자세로 앉아 있으라 했지!! 네 마누라는 애 낳고 지금까지 안 아픈 날이 없거든?!)
내가 의사가 아니라서 뭐라 말은 못 하지만 병원에서는 장시간 운전도 삼가라며 계속 치료를 권했다. 이렇게 자기 몸을 끔찍하게 아끼는 사람인지 전혀 몰랐다. 맨날 바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꼬박꼬박 병원 진료를 위해 일찍 퇴근 중이다. 당장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고 운전은 해야 하니 발 빠르게 조치를 취했다. 그는 요즘 운전 할 때 반자동 시스템인 자동차의 스마트크루즈컨트롤 기능을 적극 활용 중이다. 전보다 오른쪽 다리를 덜 쓴다고 좋아한다. 운전을 발로 안 하고 손가락을 주로 움직인다. 집에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데 갑자기 그의 손가락이 크루즈컨트롤 버튼을 눌러대느라 바삐 움직이고 있다. 사람은 역시 배워야 한다며 금세 적응했다고 자랑질을 했다. 거기까지는 봐줄 만했는데 갑자기 주말 운전을 내게 토스했다.
지난 주말 (생맥주를 마시러) 잠실야구장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짐을 챙기고 뒤늦게 차에 타려고 하니 남편이 조수석에 앉아있었다. 얼떨결에 내가 운전석에 앉았다. 야구장 도착까지 거의 2시간이 걸렸다. 논스톱으로 2시간 운전을 한 적이 언제였던가? 서울을 진입하는 순간부터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긴 시간 동안 차 안에서는 온갖 숫자가 섞인 말들이 쉴 새 없이 오고 갔다. 그동안 본인이 나를 믿고 자는 척을 했더니(옆에서 의자 뒤로 젖힌 채 코 골면서 잘도 퍼잔 인간 누구야!) 아직도 몇 년째 초보운전이라며 구박을 했다. 두 시간 동안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다. 나 역시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쌍욕이 터져 나왔다. 서울 한복판이라 중간에 차를 세울 곳도 마땅치 않았다. 계속 목적지를 향해 달려야만 했다. 분명 뒷자리에 애가 함께 타고 있다는 걸 잠시 잊은 걸까? 다행히 사고는 안 났다. 돌아올 때에도 운전을 하게 될까 봐 겁이 났다. 특히나 밤운전은 빛 번짐이 심해서 엄두가 안 난다. 밤운전을 위한 시력보호 안경도 두고 온 상황이었다. 야구장에 들어가자마자 미리 선수를 쳤다. '크루즈 기능 있으니 갈 때는 네가 운전해!'라는 말을 던진 후 경기 내내 생맥주를 홀짝홀짝 마셨다. 생맥주라도 마시니 욕을 많이 먹은 헛배가 좀 가라앉았다. 오는 차 안에서는 조수석에서 침묵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코로나 이후 여행 숙박비가 치솟아 가계에 부담이 될까 봐 일찌감치 극성수기를 피해 이른 휴가를 짧게 계획해 둔 상태다. 이런 일이 생길 줄 모르고 7월 초에 강원도 바닷가에 가기로 친한 동생네 가족과 약속을 했었다. 강원도까지 장거리 운전은 항상 당연히 남편이 했다. 중간에 살짝 졸리다고 하면 한 30분 정도 직진코스만 도우미로 내가 나선다. 우리만의 계획이면 당장 취소 했을 터인데 쿵짝이 맞는 친한 동생네를 생각하니 취소가 머뭇거려진다. 내가 강원도까지 통으로 운전을 하게 되면 도로 한가운데 차를 세울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시 집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그나마 운전이라도 해주고 무거운 짐만이라도 거뜬하게 옮겨 주는 든든한 남편이었다. 내가 남편한테 큰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닌데 하늘은 이리도 무심한 걸까? 돈 벌어온다고 집안에서 아무 일도 안 시키고 남편을 하늘처럼 극진히(?) 모시기만 했는데 그게 죄라면 죄인가?
아픈 부위가 허리라서 이제는 짐 옮기는 것까지 내가 책임져야 한다. 휴가를 가는 게 아니라 극기 훈련이 예상된다.
평소 남편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많은 것을 기대해 봤자 실망만 하고 나만 속상해진다. 내가 원하는 건 딱 2가지다. 어딜 가나 안전 운전과 짐 옮기는 것만 해 주면 된다. 제 역할을 제 때에 적절하게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런 쓸모없는 남편이라니! 벌써부터 남편이 무거운 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쓸모없는 짐이라면 그냥 집에 두고 가버릴까? 아니면 진짜로 휴가를 취소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겠다. 하하! 하............
덧붙임) 부디 빠른 회복으로 하루빨리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멋진 남편과 아빠가 되어주길 바랄 뿐이다.
사진 출처 : 언스플래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