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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미래 Jun 16. 2023

미리 여름휴가 다녀온 남편의 카드

내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다.  

내 카드 어디 있어? 빨리 찾아봐!


오후에 병원 진료 예약이 되어있는 남편이 출근 전에 카드를 찾아달라고 닦달하기 시작했다. 당장 오늘 써야 할 카드가 안 보인다고 호들갑이다. 휴대폰 개통할 때 직원의 술수에 넘어가서 만든 카드, 배달 주문할인 혜택으로 만든 카드, 주유소 결제 내역이 많아서 주유 혜택이 있다고 발급했던 카드, 야구관람 할인혜택이 있다고 해서 만든 카드 등 다양한 신용카드를 발급했었다. 발급만 해놓고 대부분 쓰지 않는다. 남편은 높지도 않은 신용 점수를 의식해서 그런지 신용카드는 1장만 꾸준히 쓰고 있다. 어쩌면 다행이다. 나 몰래 여러 카드 돌려 막기는 안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발급만 해놓고 나머지 카드는 쓰지 않으니 다른 카드들은 한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며칠 째 자주 사용하는 그 카드 하나를 계속 못 찾고 있었다. 그나마 한도액이 제일 높은 카드인데 어디로 간 걸까?


요즘 허리 통증으로 주사치료에 도스치료, 충격파 치료가 한창인 남편의 카드결제액이 고공행진 중이다. 병원에서는 처음 온 이런 호구(?) 손님들을 놓칠 수 없다. 살짝 과잉 치료가 첨가된 것 같다. 몇 번 가지 않았는데도 돈 백이 우습다. 효과는 있는지 전보다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설마 옆집에서 얻은 일본파스 붙이고 나서 좋아진 건 아니지?)

당연히 그래야지! 그 정도 돈을 썼는데 호전이 없다면 말이 안 되지! 우리나라 의술은 세계 최고니께!


병원에 다녀온 후 실비 보험이 가입되어 있으니 진료비 상세 내역서와 함께 보험금을 바로 청구하면 된다. 빠름이 중요한 우리나라에서는 큰 병이 아니고서야 보통 하루 이틀 내로 바로 보험금이 입금된다. 입금된 돈으로 바로 출금 결제하면 병원비에 대한 부담이 덜 할 것이다. 남편은 아직도 애라서 처음 병원문을 열었을 때 보호자로 따라갔었다. 진료 후 병원에서는 당일 바로 보험회사에 청구할 수 있는 진료상세내역서까지 알아서 잘 챙겨줬다. 그날 서류는 보호자가 잘 챙겼다. 구분해서 잘 보관해 둬야 나중에 헷갈리지 않으니까 기억할 만 곳에 별도로 보관해 놨다. 남편과 한 몸인 소파 옆 책꽂이에 잘 꽂아 두었다. 이제 본인이 어플을 깔아서 청구하기만 하면 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두 번째 진료부터는 혼자 보냈더니 서류를 발급해오지 않았다. 귀찮아서 그런 게 분명하다. 보험금을 한 번도 청구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아직까지 보험사 어플을 깔지도 않았다. 나중에 한꺼번에 청구한다고 핑계를 댄다. 그렇다고 본인 수중에 있는 현금은 절대 먼저 쓰지 않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현금이 아예 없을 수도 있다) 카드 한도가 점점 가까워졌다. 지난번 다른 일로 결제 했던 카드가 한도초과로 결제를 못하는 상황이 올까 봐 불안했는지 오늘은 치료 후 그동안 미룬 서류를 몽땅 발급해 온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그 카드를 못 찾고 있다. 365일 핸드폰과 한 몸이니 치료 후 정 급하면 카드 앱에 접속해서 페이 결제라도 하면 되는 데 아직까지 현장에서 앱 결제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없으면 방법을 찾아야지?! 기껏 찾은 그 방법이 아침부터 와이프 닦달하는 거냐고! 괜히 아침부터 승질머리가 올라왔다. 아이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다. 워워~ 아직 애 등교 전이다. 참아야 하느니라!



마지막으로 그 카드 쓴 사람이 너잖아!


엥?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 카드 쓴 사람이 나라고? 내가 언제? 내가 왜?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하나도 기억나지가 않아~~!!

결제내역을 부리나케 확인 한 남편이 펀치를 날렸다. 시간을 되돌려본다. 머릿속의 단기 기억세포들이 하나씩 가동하기 시작했다. 띠리리리리, 세포들이 월요일 오후시간에서 멈췄다.


그날 오후 아이 눈에 다래끼가 나서 안과에 가는 길이었다. 둘이 걸어가는 데 우연히 길가에서 아이가 남편의 차를 발견하고 손짓을 했다. 안 그래도 아이랑 더운 날씨에 걸어가기 힘들었는데 이게 웬 떡이냐? 오늘따라 쓸모 있는 남편이라 생각되어 주저 없이 차를 타고 3분 만에 안과에 갔다. 진료를 마치고 다시 차에 올라 우리 단지 앞에 다다른 순간, 아이가 아빠를 조르기 시작했다. 하필 우리 단지 입구에 반갑지 않은 무인아이스크림 가게가 생겼다. 아이 부탁은 꽤나 잘 들어주는 남편이다. (사실은 남편이 아이스크림을 더 좋아한다. 아이스크림 가지고 서로 먹겠다고 둘이서 잘 싸운다. 역시나 남편은 아직 애다. 분명 우리 집에 애가 둘인 게 맞다)

엄마는 안된다고 했지만 아빠는 오케이였다. 딸한테 점수 딸 목적으로 카드를 건넸다. 그때 내민 카드가 바로 남편이 자주 쓰는 그 결제 카드였던 것이다. 카드만 받아서 급하게 차에서 내렸다. 딸은 신이 나서 콧노래를 부르며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딸과 함께 9,600원어치 아이스크림을 사 온 기억밖에 없다. 그 뒤로 단기 기억 세포들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카드의 행방이 묘연하다. 그날 입었던 옷은 벌써 세탁기에 한번 휘감아져서 나왔다. 털어도 나올 게 없다. (사실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세탁기를 돌린 기억밖에 없다) 가방은 차 안에 두고 몸만 갔었다. 뒤질 곳도 없다. 예의상 그날 외출할 때 메고 나갔던 에코 가방과 내 카드지갑을 뒤졌다. 아무리 뒤져도 없다. 작은 방 남편 소지품 보관함에도 없다. 분명 차 안에도 없다고 했는데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카드 찾다가 강남까지 출근해야 하는데 지각이라며 결국 못 찾고 남편은 집 밖을 나섰다.



남편이 나간 바로 그 순간 마음에 천둥번개가 번쩍였다. 단기 기억세포들이 놀랐는지 내 몸을 냉장고 앞으로 이동시켰다. 오른손이 냉동실 쪽 문을 열었고 아래쪽 첫 번째 칸을 슬며시 잡아당겼다.

그날 사 온 아이스크림이 몇 개 남아있었다. 급하게 빈 손으로 가서 어쩔 수 없이 봉투도 구매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바로 먹을 아이스크림만 빼고 봉투채로 쑤셔 박아 논 상태 그대로였다. 자세히 보니 봉투 안에 아이스크림 말고 검고 희미한 네모 조각의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아니겠지? 설마.......

.

.

.

.

.

너 그동안 차 안이 너무 더워서 냉동실로 휴가 가고 싶었던 거야?

요즘 차 안이 찜통이긴 하지.

.

.

.

며칠 동안 냉동실에서 아이스크림 친구들과 함께 덜덜 떨었던 카드가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즉시 카드를 꺼냈다. 영하 20도에서 오랜 시간 꽁꽁 얼어서 얼음처럼 차가워진 냉동카드는 36.5도의 따스한 체온으로 금방 녹아내린 듯했다. 마침 아이 등교를 위해서 같이 나가려고 청바지를 입은 상태였다. 카드를 왼손에 쥐고 팔을 자연스레 내렸다. 카드가 허벅지에 닿았다. 남은 냉기를 소멸하기 위해 청바지에 카드를 벅벅 문지르며 전화를 걸었다.

(진짜 기억이 나지 않는 상황을 믿고 싶지 않을 뿐이다)


"찾았다, 찾았어! 아직 출발 안 했지?"

운전대를 잡은 남편 앞으로 달려갔다. 1층이라 순간이동이 가능하다.

"어디서 찾았냐?"
"찾으면 된 거지? 뭘 물어봐?"

멋쩍은 미소를 보이며 카드를 넘겨주었다.

"뭐야? 카드가 차가운데?
설마 냉장고에서 꺼낸 거 아니지?"

(우이씨! 아직까지 냉기가 남아있다니ㅜㅜ눈치는 빨라가지고)

"몰라!"
"설마 이따가 결제 안 되는 거 아니야?"
"아, 몰라! 늦었다며 빨리 출발하기나 해!"


냉큼 집에 들어왔다. 아무 일 없는 듯 내 일이 아닌 듯 평온하게 아침밥을 먹고 있는 한없이 얄미운 귀여운 딸이 한마디 거들었다.


"엄마, 나도 혹시나 했는데 말 못 하고 있었어"


"야"

(이 씨 : 성이 이 씨라 다행이다)


"응?"
너도 지난번 여행에서 셀카봉 리모컨 잃어버렸잖아! 그날 산 당근핀도 떨어뜨려서 잃어버리고, 카메라 보조 가방도 못 찾았지? 그런 네가 지금 나한테 그게 할 소리냐! 너도 같이 아이스크림 사러 갔다왔잖아! 빨리 밥이나 먹어"


갑자기 후폭풍이 애한테 휘몰아쳤다. 이대로 가다가는 지난달, 작년, 재작년에 잃어버리고 흘리고 두고 온 물건들까지 줄줄이 사탕으로 폭풍랩이 엮어 나올 태세다. 애가 무슨 잘못인가? (엄마 닮아서 자꾸 뭘 흘리고 다닐 뿐이지) 애한테 성질부리지 않기로 다짐했는데 하루를 못 버틴다. 크게 심호흡하며 감정을 추슬렀다. 정작 본인이 실수해 놓고 애 과거까지 들쑤시는 쪼잔한 엄마라니! 참으로 바보 같다. 쯧쯧.


괜히 애한테 화풀이하지 말고 나 자신이나 돌이켜보자!

아이한테 물건을 잘 챙기라고, 정리 정돈을 잘하고 어디에 두었는지 항상 잘 기억해야 한다고 잔소리를 하면서 정작 엄마는 허당이다. 자주 쓰는 물건을 더 자주 찾는다. (특히 신용카드뿐만 아니라 가위나 커터칼과 순간접착제, 드라이버, 건전지가 단골손님이다) 사실 신용카드도 몇 번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나마 집에서 찾으면 다행이다. 게다가 요즘 들어 마트에 가서도 문제다. 분명 저녁거리를 사러 갔다가 세일 제품에 눈이 멀어 다른 제품을 사고 난 후 되돌아간 적도 많다. 벌써부터 이러면 안 되는데 큰 일이다.

저 왜 이러는 걸까요? 아직 40대 중반인데 괜찮을까요? 다들 이런 경우 있는 거 맞죠? 그래도 신용카드를 냉동실에 며칠 동안 휴가 보낸 건 좀 너무한 걸까요? 요 며칠 더웠는데 깜빡하는 아줌마 덕분에 카드가 시원하게 며칠 잘 쉬었겠죠? 절대 남편이 카드 못쓰게 하려고 일부러 숨겨 놓은 거 아닙니다.



딩동! 고객님의 상품이 배송완료 되었습니다.


저녁때 현관문을 열고 택배 상자를 들여놓았다.

"이쁜 딸! 커터칼 어디 있니? 어제 분명 여기 있었는데 여기 없네? 네가 빨리 좀 찾아줄 수 있을까?

설마 네가 어제 쓰고 제자리에 안 둔 거 아니지?"

어제 쓴 커터칼이 그 자리에 없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 다만, 어제도 큰 택배 박스가 집으로 배송된 기억만 날 뿐이다.




덧붙임) 가끔씩 순간적으로 기억나지 않은 상황들이 연출되는 거 저만 그러는 거 아니죠?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클릭만으로도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진 출처 :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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