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아래, 우리가 피워낸 계절

열쩡의 인생극장

by 열쩡

날씨가 변했다. 계절이 바뀌었다. 설렘으로 끓어오르던 우리의 여름이 지나고, 애틋함으로 가슴 시린 날들이 찾아왔다.

눈이 자주 내리던 그 해 겨울, 나는 눈 위에 찍힌 그의 발자국에 내 발 크기를 맞춰 보았고, 그는 눈에 새겨진 내 손자국에 자신의 손가락을 넣어 손깍지를 꼈다. 우리는 함께 걷지 못했지만, 서로가 서로의 뒷모습을 눈으로, 마음으로 좇았다.

첫눈부터 끝눈까지 함께였지만 또 함께가 아니었던, 사랑이었지만 또 사랑이 아니었던 날들이었다.


투둑투둑… 투둑투둑…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덩달아 내 마음도 두근대던 그날은, 오후 내내 이슬비가 내렸다. 퇴근길, 현관 앞에서 마주친 그가 머뭇거리며 "우산 있어요?" 하고 묻던 날이었다.

작은 우산 속, 예상보다 가까운 거리. 비가 떨어지는 소리는 어느새 배경처럼 멀어지고, 그의 옆모습과 부드러운 눈빛, 바람 따라 흘러온 은은한 비누 향이 내 모든 감각을 간질였다. 좁은 우산 아래, 팔이 스치면 깜짝 놀라 움찔했지만, 이내 서로의 온기를 느끼는데 익숙해졌다. 걸음을 맞추고, 서로를 비에 젖지 않게 안쪽으로 끌어주며 걷는 그 순간, '사람이 취하는 데 필요한 건, 꼭 술만이 아니구나.' 나는 그가 만들어준 이 작은 세계에서 은근히 그리고 깊이 취하고 있었다.

길가의 벚꽃은 봄비에 젖어 살짝 고개를 떨궜지만, 우리 사이엔 알 수 없는 어떤 감정이 조심스레 피어나고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계절의 여왕이라 불리는 5월이었다. 높은 선반에 물건을 올려놓으려고 까치발을 들고 낑낑대던 내 머리 위로, 갑자기 손 하나가 쓱 지나가더니 가볍게 물건을 선반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가 내 기억 속에 자리 잡은 첫 번째 날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끔씩 느껴지는 낯선 시선. 그 시선의 주인은, 내가 유난히 웃긴 사람이 아님에도 내 말과 행동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의 박장대소에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릴 때면, 나는 속으로 ‘이 사람 미친 거야?’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그의 해맑은 웃음을 마주 대하면 의아함이 스르르 풀리곤 했다.

어느새 그 사람의 친절과 장난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으슬으슬 아침부터 몸이 떨리더니, 머리까지 지끈거렸다. 체온계는 물론 체온계를 대신할 만한 예민함조차 갖고 있지 않은 나는 이런 아픔은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회사로 향했다.

핏기 없는 내 얼굴을 마주한 그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마치 엄마라도 된 양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정신이 없던 나는, 그의 속사포 같이 쏟아지는 걱정에, 더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의지와 상관없이 흐르는 눈물에 당황한 나만큼이나, 그 역시 많이 놀란 얼굴이었다. 그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 조심스레 게 걸쳐주고는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그랬다. 그가 나를 바라볼 때는 내가 모른 척했고, 내가 그를 바라볼 때는 그가 모른척했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고개를 돌렸다. 가까워질 수 없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사람들처럼. 평생 닿지 못할 평행선, 그게 우리의 룰이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 그 경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로의 삶에 대해 굳이 묻지 않아도 알고 있는 사실들, 말로 꺼내지 않으니 더 또렷해지는 차이들, 그가 모른 척했고 나는 말하지 않던 그 모든 것들 위에 조용히 얹혀 있던 평행선 사이의 거리감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거리를 두지 않으면 상처가 될 관계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 나는 왜 그날, 그의 우산 속으로 들어갔을까?' 동료로조차 남지 못한 채 흘러가 버린 마음이 뒤늦은 후회로 바늘처럼 가슴을 찌른다.


설렘을 품었던 여름은 서서히 식어 천천히 겨울 속으로 가라앉는다.

작가의 이전글프롤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