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서양미술관 '만년의 모네' 전시, 장어덮밥
일찍 깨어 비몽사몽인 컨디션을 여행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덮어 누르고 공항으로 향했다. 항공사 카운터가 열린다고 하는 새벽 6시에 맞춰 갔다. 짐을 부치기 위해 길게 늘어선 사람들. 우리 차례가 오기까지는 꽤 걸릴 것 같아 동생과 번갈아 가며 환전소에 다녀왔다. 트래블카드를 주로 쓸 거긴 하지만 자판기나 일부 식당에서 현금이 필요할 때가 있으니까.
캐리어가 무사히 넘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출국장으로 들어왔는데도 시간은 여유롭다. 커피를 한 잔씩 홀짝대며 아직 침대에 붙어있는 정신을 공항으로 데려왔다. 이제 비행기 탑승, 조식, 그리고 도착.
날씨도 맑고 좋다.
일본 국적기를 탔더니 보통 우리나라 국적기를 타면 내렸던 터미널과 달라서 수속 후 지하철역까지 조금 헤맸지만 큰 문제없이 숙소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게이큐 공항선을 타면 환승 없이 호텔 근처의 다카라초역까지 갈 수 있다. 좁은 열차 안에서 힘을 줘 캐리어를 몸에 꼭 붙이고 있자니 점점 더워진다. 서울에선 가죽 자켓을 입고 다녔는데, 여긴 가을 자켓 정도면 충분한 날씨인가보다. 도쿄 시내에 가까워질 수록 점점 실감나는 이번 여행. 기대된다.
다카라초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니 시간은 아직 10시 반. 인적이 드문 전형적인 일본 뒷골목을 경쾌한 걸음으로 통과했다. 호텔 앞의 큰 도로에서 무슨 행진을 하는지 경찰들이 교통을 통제하고 있다. 뽐내기에 최적화된 유니폼을 입은 경호인들이 늘어선 사람들에게 도로로 나오지 말아달라는 듯한 안내를 해댔다. 호텔에 얼른 짐을 맡겨두고 우리도 구경꾼 무리에 합류했다. 인파에 가려 잘 보이진 않지만 저 멀리 악단의 연주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리 여행의 시작을 이렇게 축하해주다니, 처럼 말도 안 되지만 기분은 좋아지는 상상을 했다. 무엇을 기념하기 위한 행진인 것인지는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속시원한 답을 해주는 외국인은 없었다. 멋지게 깃발을 돌리는 선두, 놀이공원 같은 데서 들어봄직한 신나는 음악을 연주하는 악단이 그 뒤를 따랐다. 오늘 이 시간을 위해 얼마나 많이 연습했을지 그 노력이 보일 정도로 단원들의 합이 잘 맞아 시선이 떼어지지 않았다.
배가 슬슬 고파져서 구경은 이만 하고 점심을 먹기로 했다. 첫번째 옵션은 숙소 근처의 카이센동 맛집 ‘츠지한’의 본점. 마침 오픈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가보기로 했다. 주변 교통도 통제하고, 한참 행진이 진행되는 중이라 사람들이 많지는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식사를 하려면 벌써 한 시간 반 이상 걸릴 정도의 대기줄이 있었다. 맛집은 맛집인가보다. 대기하는 걸 워낙 좋아하지 않아, 바로 단념하고 우에노 공원 근처의 식당에 가기로 했다.
이번 여행에서 먹고 싶었던 음식 중 하나인 장어덮밥 전문점이 역 근처 번화가 초입에 있어, 별다른 고민 없이 메뉴를 결정했다. 가게의 열린 창문으로 숯불과 양념이 살짝 타는 냄새가 좁은 골목길 전체에 공유되어 배가 한층 더 고파졌다. 대기는 한 팀 있었고, 식사를 마친 손님들이 나오는 타이밍이어서 많이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가게 내부의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저절로 내 기분도 고조되었다.
대낮이긴 하지만, 역시 일본에서의 식사는 생맥주로 시작해야 제 맛. 덮밥을 기다리며 생맥주로 동생과 여행 축배주를 들었다. 이번 여행에서 기대되는 점과 예전 여행에서 즐거웠던 점에 대해 한참 이야기하다가 집에 두고 온 조카의 귀여움으로 마무리.
곧 나온 장어덮밥의 장어는 부드러우면서 쫄깃했다. 끄트머리는 조금 바삭하고 맛 자체도 좋은 편. 장어를 받치고 있는 밥까지 아주 맛있지는 않은 게 조금 아쉬웠지만, 장어구이에 산초 가루를 톡톡 뿌려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장어로 속을 든든히 채웠으니 체력까지 함께 채운 듯 했다.
이제 전시가 진행되는 국립서양미술관으로 천천히 소화를 시키며 걸어가는 시간. 차갑지 않은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산책하기에 아주 좋았다. 공원의 큰 나무들이 전하는 녹음은 언제나 선물같다. 주말이다보니 공원엔 가족, 연인 단위의 방문객이 많았다. 운동부들이 곳곳에 산재한 코트에서 각자의 주종목에 열심이었다.
한국에서 미리 예매해둔 티켓으로 전시장에 들어갔다. 현장 티켓을 살 수도 있었는데, 줄이 아주 길어보여 미리 사오길 아주 잘 했다고 생각했다.
전시장 초입으로 들어오자 보이는 벽면 하나를 가득 채운 수련.
어렸을 때 ‘모네의 정원’이라는 책이 집에 있었는데, 모서리들이 닳을 정도로 아주 여러 번 읽었었다. 가장 좋아하는 화가가 클로드 모네였던 어린 시절의 나. 파스텔 톤의 그림들, 그림의 주제도 꽃과 정원, 사랑하는 사람들이어서 더 좋아했던 것 같다. 성인이 된 아직까지도 가장 좋아하는 회화 주제는 꽃/열매를 그린 정물화, 풍경화. 예전에 비해 인물화에도 관심이 생겼지만 그래도 어떤 전시를 본 뒤 엽서나 포스터를 사려고 하면 나도 모르게 정물이나 풍경 주제의 작품을 먼저 고른다. 당시엔 미술 학원에도 보내달라고 해서 열심히 다녔었다. 그렇게 내 취향에 꽤 지대한 영향을 미친 모네의 전시가 기대됐다.
주말이라 전시장엔 사람들이 아주 많았는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구역이 따로 있었다. 여러 버전의 수련이 전시되어 있어 그 그림을 그렸을 시간, 계절, 시대를 추측해보는 재미가 있었다.
가장 맘에 들었던 그림 중 하나는 연못의 풍경. 그림 전반적으로 푸른 톤이라 새벽 같았는데, 양쪽의 나무들과 수면 사이에 자리한 하늘에 핑크색 붓터치 몇 개가 더해져 동 트기 전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큰 나무들로 둘러싸인 새벽 호숫가의 고요함. 어쩌면 지금 내가 원하는 게 그런 평화로움일 수도.
같은 풍경을 그린 그림들을 시간대순으로 전시하여 모네가 나이듦에 따라 어떻게 화풍이 변해왔는지를 알 수 있게 해둔 구역도 있었다. 나이듦이란. 신체적인 변화도 당연히 있겠지만, 그 외에도 사물이나 세상을 대하는 자세, 가치관도 변하는 게 아닐지? 예를 들자면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나 살아보니 별 게 아니어서 유해지는 부분들. 아직 인생을 오래 살아본 것은 아니지만 나 또한 거쳐온 시기별로 생각이 많이 바뀐 것은 사실이다. 사주를 해석하는 기본적인 틀 중, 10년 주기로 대운이 바뀐다는 게 하는데, 그런 해석법이 내 마음 속에 있어서인지 아님 정말 그럴 운명이었던 건지 나의 대운이 바뀔 즈음엔 실제 내가 처한 환경이나 삶을 대하는 태도, 주변인들이 많이 바뀌어왔다. 10대의 나와 20대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나는 똑같은 ‘나’를 살고 있지만 세상과 삶을 대하는 방식은 서로 굉장히 다르다.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겠지. 그 전환들이 부디 고통과 함께하지 않길.
전시를 관람한 후 기념품을 사고 싶어 또 40분 가까이 줄을 섰다. 전시가 하도 인기여서인지, 기념품을 파는 곳에 들어가려면 건물 바깥까지 늘어선 대기줄 뒤에 서야한다고 했다. 마음에 들었던 그림은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구역에 있었기 때문에 나중엔 이 감동이 잊혀질 것 같아서 기념품 목록에 있으면 사고 싶었다. 서로 다른 엽서 몇 장과 작은 그림을 담았는데, 엽서는 지인들에게 나눠줬고, 그림은 화장대 위쪽에 올려두고 거의 매일 보고 있다. 이것보다 더 감동이 큰 그림을 발견할 때까지는 유지할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