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자와 크렘브륄레, 추억으로 사는 사람
내가 모네 전시의 기념품을 사는 동안 동생은 국립서양미술관의 상설 전시장을 구경하고 왔다. 둘 다 평소와 달리 꽤 오랜 시간을 서있었더니 체력과 함께 대화가 뚝 떨어졌다. 급하게 당과 카페인을 충전하기 위해 근처의 카페-결국 스타벅스-를 찾았는데, 마침 자리에서 일어나는 분들이 있어 천만다행으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리곤 둘 다 스르륵 녹아버렸다. 주문한 음료는 사실 꽤 오랫동안 카운터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음료가 늦게 나오든 말든 그걸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원래라면 잘 먹지도 않는 달달한 음료와 카페인으로 체력을 급속 충전하며 잠시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할로윈 모티브의 장식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에서 생각해온 계획으로는 전시를 보고 나서 근처에 주방도구들을 파는 상점가에 들르려고 했는데, 카페에서 나와 약 50m 정도를 걷자마자 느낌이 왔다. 그곳에 가는 것이 오늘은 아니란 걸. 사케를 담아 마시는 술병과 술잔 세트가 갖고 싶어 작년 정도부터 일본에 올 때마다 이런 물건을 팔 거 같은 곳에 가면 열심히 찾았는데 딱 마음에 드는 제품이 없어 계속 다음을 기약했었다. 이 상점가에 관련 제품을 많이 취급한다는 가게도 있어 기대를 했었지만 다시 한번 다음을 기약했다. 아무런 디자인적 요소가 들어가 있지 않는 것도 싫고, 너무 싸구려 재질로 만들어진 공산품도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에 한없이 까다로워진다. 그래도 마음에 쏙 드는 제품을 찾기 위해 공을 많이 들인다면, 사용할 때나 사용하지 않을 때나 더 만족도가 높지 않을까. 아예 유명한 도자기 공방 같은 곳을 가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 다음이 있다면 그때 노려봐야겠다.
정신없이 방에 들어와 기대보다 좋은 호텔방에 감동하기도 잠시, 동생은 침대에 누우며 아직 시즌도 아닌 크리스마스 캐롤의 재즈 버전 음악을 틀어달라고 하더니,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이 들었다. 음악을 계속 켜둬야하나 잘 자게 꺼야하나 고민하다 음량을 줄이기로 했다. 육아로 모자란 잠을 보충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핸드폰 배터리를 충전하며 소셜 미디어에 여행 사진을 이것저것 올렸더니 도쿄에서 직장을 다니는 오랜 친구가 그걸 보고 반갑다며 본인의 맛집 리스트를 구글 지도로 보내주었다. 귀여운 악마 모양의 아이콘에 왜 여기가 자신의 맛집인지, 거기에서 어떤 메뉴를 먹어야하는지에 대한 짧은 코멘트까지 적혀있었다. 이런 친절, 너무 감동적이다. 다시 한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몇 가지 귀여운 코멘트를 소개하자면, “이태리 피자협회에서 인정한 피자“ “웨이팅 있음. 반드시 절망스파게티를 먹을 것” “으른의 파르페” “관광객에게 털린 내 맛집” 코멘트만 읽어도 친구의 유머러스함과 따스함이 느껴진다.
이번 여행은 일정이 짧아 소개해준 곳들을 다 가보진 못하겠지만 나중에 도쿄에 들를때마다 몇 개씩 가보고 내 감상평도 같이 더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친구의 맛집 리스트 중 숙소에서 도보 15분 정도의 가까운 곳이 있어 동생과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긴자를 향해 도란도란 걸어가는 길. 엘리베이터를 타고 식당층으로 올라가니 좁은 복도를 사람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래도 가게 내부가 커서 회전율이 제법 기다릴 법한 정도인데다가 지금 다른 곳에 가면 어차피 또 이만큼은 기다릴 것 같단 판단에 대기를 하기로 했다. 맛집은 맛집인지 우리 뒤로 끊임없이 엘리베이터가 사람을 싣고 오르내렸다.
드디어 입성! 친구가 대기줄이 길 수 있다고 언급한 교자 맛집이다. 일단 교자는 필수 주문에, 메뉴판을 보니 한국에도 있어 익숙하지만 그 맛을 알기 때문에 또 먹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 조금씩이라도 먹어보자는 생각에 마파두부와 소고기 야채 볶음, 게살스프를 주문했다. 가장 먼저 나온 건 교자. 교자 자체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양도 많아서 놀랐다. 뜨거운 교자를 한입 무니 육즙이 배어있는 속살이 드러났다. 짭조름해서 맥주가 술술 들어가는 맛이었다. 중화풍의 식당이어서인지 동생과 나 둘 다 어렸을 때 보았던 요리왕 비룡의 ‘미미’ 장면이 동시에 떠올랐다.
친구의 말처럼 모든 음식이 다 맛있어서 아주 배불리 먹고, 소화시킬 겸 근처의 로프트를 방문했다. 최근 2년, 일본에서 사온 달력을 방에 걸어뒀었는데, 꽃 그림이 크게 그려져있어 매달 새로운 화병에 꽃꽂이를 하는 느낌이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았었다. 한국의 공휴일 대신 일본 공휴일이 써있긴 하지만 날짜를 보는 데는 문제없어서 25년 달력이 있으면 사고 싶어서 들른 거였다. 원래 사던 시리즈의 달력도 재고가 있었지만 프리뷰의 그림들이 맘에 들지 않아 다른 달력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세계 유명 도시에서 있을 법한 장면들을 일러스트로 그린 것으로, 그 중 가봤던 도시들도 몇 군데 있어서 달력을 보면 그때 추억이 떠오를까 싶어 기대가 됐다.
가게엔 할로윈은 물론 벌써부터 크리스마스 장식도 있었는데, 1층에 들어가자마자 트리 오너먼트가 잔뜩 보였다. 쭉 둘러보던 중 크리스마스랑 전혀 상관이 없는 것 같은 트로피컬 테마의 호랑이 오너먼트가 눈에 들어왔다. 크리스마스와 거리가 먼 것 같은데 너무 아무렇지 않게 끼여있는 게 어이없으면서도 재밌는 점. 예상보다 비싼 가격에 놀라 사진을 찍고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로프트에서 좋아하는 코너 중 하나는 MoMa 코너. 정식 가게보다는 작은 수준이지만 디자인적인 면모를 갖췄으면서도 실용적인 제품들이 꽤 있어 꼭 구경한다.
유니클로에서 계산과 택스리펀까지 마치고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다. 우산을 숙소에 두고 나온지라 새로 사긴 아까워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날씨 앱을 봤더니 몇 분 뒤 잠시 그친다고 한다. 아니, 시간도 아니고 분 단위 날씨를 예측한다니! 정말 맞을까 싶었는데 신기하게도 진짜로 비가 잠깐 그친다. 이런 기능이 서울에서도 되는 거였는지 궁금해졌다. 도쿄 혹은 일본 혹은 해외에서만 되는걸까? 여하튼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빠르게 숙소를 향해 이동. 중간정도부터 다시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 비를 조금 맞았지만 그래도 아주 젖지는 않았다.
숙소 1층에 있던 편의점에 들러 간식과 주전부리를 사왔다. 각자 뜨거운 물에 씻고 아이스크림을 한 입 푹 떠넣으니 이것이 행복. 크렘브륄레처럼 단단한 겉면을 톡 깨면 실크처럼 부드러운 바닐라 아이스크림. 맘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