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 치메, 로카텔리 산장, 친퀘토리
일출을 보려고 맞춰둔 알람 소리에 깼다. 지금은 새벽 5시 15분. 엄마는 시차 때문인지 더 일찍 깨셔서 침대에 누워 계셨다. 푹 주무시지는 못한 거 같아 엄마의 컨디션이 살짝 걱정됐다. 그렇지만 일단은 일출을 보러 가자고 엄마를 두꺼운 옷으로 무장시켜 산장 밖으로 나갔다. 숙소가 있는 층은 아직 한밤인듯 고요하다.
해가 뜨기 시작했는지 바위산이 서서히 머리부터 붉어진다. 산 사이로 올라오는 해를 보기에는 우리의 위치가 좋지 않은지, 그 장면을 기다리는 사이 하늘이 점점 환해진다. 산 아래 저 멀리를 바라보면 안개가 살짝 낀 풍경. 간혹 이미 트레킹을 시작한 사람들이 산장 옆을 지나치며 인사한다.
해뜨는 돌로미티의 모습을 한참 즐기다 산장 안으로 들어가니,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줄이 늘어섰다. 그새 오픈시간이 되었나보다. 문이 열리고, 내가 창가의 좋은 자리를 잡는 사이 엄마가 먼저 아침식사를 가져오셨다.
빵, 잼, 삶은 계란, 요거트와 그래놀라, 치즈, 햄, 주스, 커피로 구성된 꽉 찬 조식. 유럽식 아침 식사의 전형 같아 맘에 들었다. 오늘은 꽤 긴 트레킹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든든히 먹었다. 다만 무료로 제공되는 커피는 좀 맛이 없어서, 한국에서 가져온 비장의 무기, 믹스커피를 꺼냈다. 뜨거운 물을 가져와 달달한 믹스커피를 마시니 이제야 만족스럽다.
방에 올라가 체크아웃 준비를 하고, 짐은 자동차 트렁크에 옮겨실었다. 리셉션엔 아무도 없어서 열쇠를 데스크 위에 올려놓고 나왔다.
이제 하이킹 준비 완료! 출발이다!
아우론조 산장을 뒤로하고 산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 가는 길. 구름이 거의 보이지 않고 해가 쨍쨍하다. 길도 잘 닦여 있고 여러 명이 지날 수 있을 정도로 넓어서 남산 둘레길 정도를 걷는 느낌으로 일정을 시작했다. 풍광이 너무 멋져 조금 걷다가 사진 찍고, 또 조금 가다가 사진을 찍으니 시간이 생각보다 더 걸린다. 그래도 좋다. 오늘, 지금 이 시간은 우리의 것.
저 앞에 작은 예배당 하나가 보인다. 데글리 알피니 예배당(Cappella degli Alpini)이라고 하는데,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이탈리아 간 전투에서 사망한 병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산악인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도 있다고. 뒷편으로는 묘비 몇 개가 있다. 잠시 묵념.
조금 더 걸으니 라바레도 산장에 도착했다. 여기까지는 경사가 거의 없는 쉬운 구간이라고. 그럼에도 잠깐 쉬어가고 싶어 산장 바깥의 그늘에 앉아 목을 축였다. 습기가 없어서 그늘로만 들어와도 서늘하다. 이제 경사도 높아지고 길도 험해지는 본격적인 등산 코스가 시작된다.
능선까지 우선 올라가야하는데, 조금 더 짧지만 가파른 길과 조금 더 길지만 덜 가파른 길 중에 우리는 후자를 택했다. 다시 돌아올 걸 생각하면 체력을 좀 더 아껴야할 것 같았다. 고개만 들면 끝이 보여서 금방 갈 것 같았는데 가도 가도 아직 좀 남았다. 중간 중간 엄마의 체력이 걱정되어 컨디션을 확인하게 된다. 사실 내 체력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아직 여행 초반인데 벌써 방전되면 큰일. 그나마 엄마는 나의 권유로 여행 두어 달 전부터 동네 주민센터에 등록하셔서 일주일에 두 번 정도씩은 퍼스널 트레이닝을 받으셨는데, 이번 여행에 체력적으로 꽤 도움이 된 듯 하다.
잠시 길가의 바위에 앉아 물을 마신다. 여름날 계곡에 놀러가 물에 손을 담그면 그 차가움에 깜짝 놀라게 되는 것처럼 이 바위도 얼음장같다. 우리랑 똑같이, 어쩌면 더 오래 이 뜨거운 햇빛을 받았을텐데도 이렇게 차가운 게 참 신기했다. 잠시 바위에 손을 가져다 대며 달아오른 피부를 식혔다. 등산을 해서 그런지, 강렬한 햇빛을 받아서 그런지 점점 더워져서 여러 겹 입었던 옷을 하나둘 가방에 넣었다. 반팔과 얇은 바람막이면 충분하다.
돌로미티의 산길을 오르다보면 꿀향이 진동을 하는데, 등산로 근처에 지천으로 핀 야생화에서 나는 향인듯 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향기와 함께 꿀냄새가 나서 어느 순간엔 배가 고파질 지경이었다. 이건 나비나 벌에게도 마찬가지였는지, 그 높은 산에도 곤충들이 굉장히 많았다. 와인 공부를 할 때 꿀향이 나는 와인들이 종종 있는데, 앞으로 꿀향은 절대 잊지 않고 복잡한 와인 노트 사이에서 찾아낼 수 있을 거 같다는 자신이 들었다.
능선의 끝에 도착했다. 여러 방향으로 갈라지는 이정표에서 사진을 몇 장 찍고, 이제부턴 잠시 내리막길이다. 작은 돌로 덮인 길인지라 가끔은 신발이 미끄러지는 경우도 있긴 했는데 다행히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엄마는 트레킹화, 나는 운동화를 신었는데 확실히 안정감은 트레킹화가 높았지만 트레킹화는 통풍이 잘 되지는 않아서 좀 답답했다고 하셨다.
능선을 넘어가니 점점 더 가까워지면서 사진에서 보던 모습으로 변하는 트레 치메(Tre Cime di Lavaredo). 여기까지 오는 길에서는 시선이 대각선 방향이라 세 개의 봉우리가 거의 하나처럼 보였는데, 제대로 마주한 앞모습의 웅장한 크기에 조금 놀랐다. '세 개의 봉우리'라는 뜻과 같이 커다란 바위산 3개가 붙어있다. 3이라는 숫자가 묘한 안정감을 준다. 파란 하늘과 대비되는 트레 치메를 배경으로 우리도 기념 사진을 남겼다. 한국에서 단체 관광을 오신 분들이 꽤 많이 계셔서 사진을 부탁하기 좋았다.
이제 저 멀리 로카텔리 산장이 보인다. 여행 준비 단계에서 로카텔리 산장에도 숙박 문의를 보냈었는데, 무슨 연유인지 회신은 오지 않았다. (동일 이메일로 두 번 이상 문의가 오면 자동으로 스팸처리 된다는 설이 있다. 나는 시스템으로 한번 문의하고, 거기에 오류가 생겨 메일로 한번 문의를 보냈을 뿐인데도 스팸 처리가 된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우론조 산장에 묵은 것도 있는데, 로카텔리 산장까지 이렇게 오래 걸리는 줄 알았으면 애초에 문의조차도 안 했을 거다. 평소에 등산과는 거리가 먼 우리는 체력이 절대 받쳐주지 않았을 듯.
마지막 계단과 경사로를 올라 로카텔리 산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바로 산장 뒤 편의 동굴. 끝이 막힌 작은 동굴 안에 들어가 동굴을 프레임 삼아 트레치메가 보이는 실루엣 사진을 찍는 거다. 엄마도 꽤 지치신 것 같았는데 이 사진을 찍기 위해 두 시간 이상 걸어온 터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우셨다. 아주 가파른 경사로 조금 더 올라갔다.
먼저 와서 사진을 찍고 있던 일가족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동굴 안 쪽에서 다음 차례를 기다렸다. 시원한 동굴 안에 가만히 앉아 그 일가족의 구성을 가만 보자니, 젊은 부부와 5살도 안 되는 듯한 어린 아들, 개 한 마리다. 심지어 어머니는 임신한 상태. 어떻게 이 가파른 산길을 올라온건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이제 우리 차례가 되었다. 엄마와 나는 나름 구도를 잡아가며 서로를 찍어주었다. 그러다가 한국인 아주머니 한 분이 바깥에서 트레치메를 찍으시는 바람에 자꾸 우리 프레임에 걸리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래서 간단히 우리가 사진을 찍는 방식에 대해 설명을 드리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게 어떠실지 여쭤봤더니 흔쾌히 수락하셨다. 그 과정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아주머니는 굉장히 유쾌하신 분이었다. 당신 기준에 아닌 것이 명확하셔서, 내가 이상한 포즈를 하고 있으면 단호히 수정하라고 말씀해주시는 게 꽤 재미있었다. 사진을 다 찍고 산장으로 돌아갈 때도 돌로 된 산길을 과감히 미끄러져 내려가시는 모습이 아주 용감해보이셨다. 연락처를 교환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짧은 인연이 아주 즐거웠다. 역시 유쾌함과 진솔함은 사람의 마음을 여는 힘이 있다. 체력 때문이든, 다른 일 때문이든 내가 자꾸 잊어버리는 중요한 삶의 자세.
경사를 굴러 내려오다시피하여 로카텔리 산장에 들어갔다. 엘더플라워가 들어간 음료 한 잔과 물을 사서 풍경을 감상하기 좋은 자리를 잡았다. 아침에 배가 불러 남겨뒀던 뺑오쇼콜라 하나와 한국에서 G가 챙겨줬던 말차맛 빼빼로로 떨어진 당을 보충했다. 빼빼로는 한국에서 이탈리아로 오는 사이 조각나버렸지만, 챙겨준 마음이 너무나 고마웠다. 엘더플라워 음료는 어디선가 분명히 먹어본 맛인데 도저히 그게 뭔지 생각이 안 나서 한모금 한모금 마시며 자꾸 기억을 더듬게 되었다. 가장 비슷한 건 스포츠 이온 음료인데, 정답은 아닌 것 같다. 얼음 띄운 시원한 매실차가 마시고 싶어졌다.
이제 왔던 그대로 아우론조 산장을 향해 돌아가는 길. 어려울 건 없지만 한층 떨어진 체력에 엄마도 나도 말수가 좀 줄어들었다. 엄마는 오랜만에 신으신 트레킹화가 조금 불편한 구석이 있으셨는지 잠시 쉬었다가 가자고 하셨다. 다시한번 꿀향과 꽃향이 가득한 차가운 돌에 기대앉았다.
능선을 지나가는데 한쪽 다리가 의수인 분이 오고 계셨다. 그 높은 경사를 의수로 올라온 것이다. 불가능은 없는 거구나. 타고난 두 다리로도 힘들어했던 내가 좀 부끄러웠다.
미끄러운 돌 비탈길을 넘어지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워 조심스레 내려가니 다리에 힘이 조금 풀리는 느낌. 이번에도 라바레도 산장의 그늘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마침 옆 자리에 한국에서 오신 엄마 동년배의 부부와 함께 쉬게 되었다. 두 분도 은퇴를 하고 돌로미티에 오셨다고. 그 분들이 말씀해주시길, 이렇게 힘이 든 게 이 곳의 고도가 높아 공기가 희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이 정도 하이킹하는 건 그렇게 힘들지 않을 거라고 하셔서 내심 우리 체력이 정말 이렇게까지 좋지 않은 건 아닐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돌로미티는 많이 돌아보시고 다른 나라로 곧 간다는 분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 돌로미티에서 어디가 가장 좋으셨어요?
그 분들은 세체다와 사스 포르도이(Sass Pordoi)가 가장 좋았다고 하셨다. 세체다에서는 특히 평원과 산악 지역이 크게 나뉘는 모습이 정말 멋지다고 하셨고, 사스 포르도이는 돌산의 모습이 굉장히 특이하여 이건 정말 이곳에서밖에 볼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드셨다고. 둘 다 앞으로의 계획에 있던 터라 기대가 되었다.
이 외에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슬슬 시간에 쫓겨 먼저 일어났다. 산을 오를 땐 어차피 같은 길일 텐데 오면서 사진을 찍으면 되지~ 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산을 내려올 때는 경치를 감상할 체력이 남아있질 않았다. 역시 여행이란 건 하고 싶은 걸 지금 바로 해야 한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달았다. 나중은 없다. 지금이다.
이제 친퀘토리 케이블카까지 차를 타고 이동한다. 어제처럼 브레이크 시스템 경고음이 울릴까봐 걱정했는데, 정말 단순 오류였던건지 언제 그랬냐는듯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친퀘토리(Cinque Torri)는 "다섯 개의 탑"이라는 뜻인데, 다섯 개의 바위 기둥이 모여 있는 모습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아우론조 산장에서는 차로 1시간 정도 걸린다. 주차장 입구에서 큰 관광 버스들과 차가 엉켜 들어가는 데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막상 주차 자리는 모자라지 않았다.
티켓 오피스에서 한국에서 미리 예약했던 슈퍼 서머(Super summer) 영수증(QR코드)을 보여주니 실물 티켓으로 교환해주었다. 이걸로 4일 중 3일 동안 무제한으로 리프트/케이블카를 탈 수 있다. 리프트나 케이블카를 3번 이상 탈 예정이라면 슈퍼서머 카드를 사는 게 이득이다.
입구에 카드를 인식시키고 드디어 첫 리프트 탑승을 앞둔 순간. 설렌다. 푸른 잔디 위를 두둥실 떠올라 정상을 향해 오르는 리프트!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들떴다. 언덕을 넘자 저 멀리 봉우리를 가린 구름들이 마치 무대효과처럼 사라진다. 지대가 높아서 그런지 해와 더 가까워진 듯 하다. 짙은 선글라스가 무색하게 앞이 환하다.
정상 도착! 저 멀리 슬로프 모양으로 완만하게 경사진 봉우리가 보인다. 길 위로는 낮게 구름이 덮인 광경. 한바퀴 휘 구경 후 산장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엄마는 화이트 와인 한 잔, 나는 에스프레소 마끼아토, 그리고 함께 먹을 베리 모듬을 주문했다. 만드는 것을 보아하니 딸기, 라즈베리, 블루베리, 블랙베리, 크랜베리 등 온갖 베리를 보울에 담고 설탕 조금과 레몬즙을 뿌리면 끝-. 상큼한 맛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하여 피로감을 없애는데 아주 효과적이었다.
한국의 가족들과 짧게 통화도 마쳤다. 다행히 별 일 없이 잘 지내고 계신 듯 하다. 다행이다. 길을 가다가 부모님과 딸이 함께 여행온 가족들을 보면 조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다음 기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