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랑 돌로미티 여행 #4 사쏘룽고

라가주오이, 사쏘룽고, 토니 데메츠 산장

by Starrwy

[ 라가주오이 산장 ]


돌로미티 여행 3일차의 마지막 일정은 라가주오이 산장. 친퀘토리에서 차로 25분 정도면 도착한다. 막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주차장에는 차가 드물게 있다. 아침부터 5시간의 트레 치메 하이킹 강행군(?) 이후라 체력 안배도 그렇고, 막상 올라가서 오래 머물 수 없을 것 같아 올라갈지 말지 약간 고민이 되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일단 올라가보기로 했다. 나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돌로미티에 두 번 오시기가 쉽지 않을 거다. 가급적 후회는 남기지 않기로 했다.


케이블카를 기다리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지면서 기다리고 있는 열 명 남짓의 사람들이 다 못 타면 어쩌나 싶었는데, 플랫폼에 나가보니 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커다란 케이블카였다. 방문하는 곳마다 케이블카의 종류가 달라 이번 돌로미티 여행에서 세상의 모든 케이블카 종류를 타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해발 2,752m에 있는 라가주오이 산장 도착-!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산장 중 하나라고 한다. 세계 1차 대전 때에는 이탈리아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 간 치열한 접전이 펼쳐지면서 참호나 요새도 이곳 저곳에 많이 만들었고, 아직까지 남아있는 곳도 있다고 한다. 그 중 Lagazuoi Tunnels (라가주오이 터널)이 유명한데, 폭약을 설치해 적의 진지를 폭파하려고 파낸 복잡한 지하 통로로 지금도 관광객이 헤드램프를 착용하고 탐험할 수 있다고 한다. 가장 경관이 뛰어난 산장이라는 명색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파노라마로 보이는 겹겹이 쌓인 산과 파란 하늘, 그리고 그 경계에 걸친 하얀 구름 띠가 인상적이었다.




[ 에어비앤비 체크인 ]


엄마도 나도 조금 녹초가 되어, 슬슬 저녁거리를 사서 체크인하기로 했다. 숙소로 가는 길에 있던 슈퍼마켓 Despar에 들렀다. 편의점 크기의 작은 슈퍼마켓으로, 장바구니 같은 카트를 끌다가 통로에서 다른 쇼핑객을 마주치면 모든 쇼핑 동작을 멈추고 한 켠으로 비켜줘야 할 정도로 통로가 좁았다. 마치 누군가 쫓아오는 것처럼 빠르게 눈에 보이는 대로 카트에 담았다. 물, 과일-체리, 납작복숭아, 천도복숭아, 사과 한 알씩-, 내일 아침에 먹을 계란, 우유와 요거트, 빵과 저녁에 먹을 치즈, 프로슈토까지.



오늘부터 3박을 묵을 에어비앤비는 나름(?) 큰 길 가의 3층 건물로, 건물 현관 바로 앞에 주차할 수 있었다. 숙소는 1층이었는데, 그 역시 너무 다행이었다.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없었기 때문! 집주인은 간단히 숙소와 숙소 내 규칙에 대해 설명해주고, 궁금하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 앱을 통해 연락해달라고 했다. 엄마와 단 둘이 쉴 수 있는 공간에 있게 되자 알 게 모르게 쌓여있던 긴장감이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작은 부엌과 식당 겸 거실, 화장실, 방 하나로 구성된 작은 독채. 이곳에선 비교적 오래 묵을 거라 짐을 완전히 다 풀었다. 아무래도 겨울에 스키타러 오는 사람들을 고려해서 그런지 옷장이나 서랍이 꽤 넉넉했다.



따뜻한 물로 씻고 난 엄마와 나, 둘 다 급격한 피로감에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낯선 침대에, 시차, 안 하던 일출 구경과 5시간의 등산, 장시간의 운전, 외국어.. 잠깐 누웠었는데 엄마도 나도 잠이 들었는지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났다. 다시 준비해서 나가기도 귀찮고 오늘은 한국에서 가져온 컵라면과 햇반으로 저녁을 대신하기로 했다. 밖엔 비가 억수로 내려서 별밤을 감상하긴 틀렸다.


자려고 누웠는데 조금 춥다. 물을 끓여 끌어안고 잘 물주머니를 만들었더니 딱 좋은 정도.

꿀잠각이다.



[ 조식 한 상 차림 ]


어젯밤 푹 자고 나니 이제 시차 적응은 거의 끝난 것 같다. 우스갯소리로 30대에겐 3일이 필요하더니 정말인가보다.


엄마가 씻으시는 동안 아침상을 차렸다. 이 숙소에는 음식을 해먹을 수 있는 도구가 아주 다양했는데, 채반에 치즈 그라인더도 있고, 접시도 종류별로 많았다. 소금, 후추, 설탕도 기본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계란을 삶고 과일들을 한입 크기로 잘랐다. 얇게 가로로 자른 토마토에 생모짜렐라 치즈를 얹고 후추를 뿌려 간단한 샐러드 완성! 올리브유가 없는 게 조금 아쉽다. 빵도 가로로 잘라 비행기에서 챙겨온 버터를 바르고 어제 사온 프로슈토를 끼웠다. 이탈리아 스타일의 약식 잠봉뵈르다. 여기에 어제 사온 요거트 등을 꺼내두니 웬만한 호텔 조식 못지않다. 네스프레소 커피머신도 있는데 캡슐이 없어, 한국에서 가져온 믹스커피를 준비했다. 기력이 모자라면 안 되니, 공항 면세점에서 산 홍삼도 잊지 않기!


씻고 나오신 엄마는 내가 차린 조식 상에 뭇내 감동을 받으신 듯, 사진을 아주 여러 장 찍으셨다. 소셜 계정에 자랑하시려나보다. 한국이었다면 주말 아침엔 보통 엄마가 이렇게 가족들을 위해 차려주시는데 이번 여행에선 내가 준비해보려고 한다.



과일들이 하나 같이 다 너무 맛있다. 특히 사과는 달콤함과 새콤함, 아삭함까지 모두 갖춰 하나만 산 게 아쉬울 정도였다. 천도복숭아도 어찌나 달고 맛있는지. 오히려 납작 복숭아보다 더 맛있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 생각해온 상세 여행 계획은 어제부로 종료. 오늘부터는 큼직큼직한 일정만 있다. 우선 숙소에서 살짝 남서쪽에 있는 사쏘 룽고를 가는 길에 전망이 아름다운 곳이 있어 잠시 들르기로 했다.



[ 사쏘 룽고와 세 번째 천사 ]


전망 포인트 이름은 파쏘 가르데나(Passo Gardena). 바위산으로 둘러싸인 높은 골짜기 같은 곳이다. 셀라 산군의 일부로, 돌로미티 특유의 험준하고 웅장한 바위 봉우리를 볼 수 있다. 주차를 하고 가까운 등산로의 초입까지 올라갔다. 어디로 눈을 돌리든 장엄한 바위산이 불쑥 솟아있다. 그림책에서나 보던 알프스 풍경.


오늘은 다소 구름이 낀 날씨. 사진은 좀 덜 예쁘지만 해가 없어서 너무 덥지도 않고, 야외를 다니기에 기온도 딱 좋다. 작고 하얀 야생화가 별처럼 가득 핀 푸른 풀밭에 누워 잠시 명상 타임을 가져본다.




사쏘 룽고 케이블카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도 너무나 멋진 광경들이 많아 나는 조수석에서 사진과 영상을 찍느라 바빴다. 이탈리아어로 'Sasso'는 바위, 'Lungo'는 길다는 뜻으로, '긴 바위' 또는 '거대한 바위'라는 의미란다. 해발 약 3,181m로, 돌로미티 산맥 서부 지역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중 하나다.



사쏘 룽고의 케이블카는 특이한 별명이 있는데, 관 케이블카(coffin cable car)다. 딱 2명만 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케이블카인데, 앉을 자리가 없이 정상까지 서서 가야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한명이 뒤쪽에서 먼저 케이블카에 타고, 다른 한 명이 뛰면서 올라타면 직원이 뒤에서 문을 닫아준다. 엄마가 먼저 타시고 내가 뒤따라 올랐다. 처음 해보는 신기한 경험에 재미있어졌다. 이런 게 여행의 이유일까? 일상에서 반복되는 일들에서 벗어나 지금껏 몰랐던 새로움을 마주하는 것. 일터에서 마주하는 새로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재질인 거 같다.



처음엔 케이블카가 지상과 그렇게 멀지 않았는데 경사가 점점 높아진다. 바깥의 풍경은 소들이 풀을 뜯는 푸른 초원이었다가 나무들이 듬성듬성 난 돌산이 되었다. 돌의 색도 특이해서, 외계 행성에 온 거 같다. 과연 여기에 생명체가 살아가고 있는건지 궁금하다.



케이블카가 오르는 경사가 급해졌다. 이제 거의 70-80도에 가까운 경사. 초반엔 그다지 무섭단 생각은 안 했었는데 지금은 좀 무섭다. 이게 돌산으로 떨어지면 어쩌나, 갑자기 너무 아득해지면서 말을 잃었다. 엄마는 나를 다독여주었다. 걱정말라고. 혼자 왔으면 살짝 울었을지도 모른다. 대체 이 케이블카는 어떻게 지어진걸까? 누군가는 목숨을 걸었어야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구간은 조금 두려움에 떨며 올랐다. 하차 영역(?)에 들어가자 겨우 안정감이 들었다. 직원이 케이블카 문을 열어주니 겨우 숨이 트이는 기분. 엄마도 무사히 내리시고 출구로 나가는데, 직원이 나에게 핸드폰을 건넨다. 무슨 상황인가 싶어 가만 보니 내 거다. 경황이 없어 떨어뜨린 것도 몰랐나보다. 정말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세번째 천사.




[ 구름 속의 토니 데메츠 산장 ]


사쏘룽고 케이블카의 정상에는 토니 데메츠(Toni Demetz) 산장이 있다. 산악 가이드였던 ‘토니 데메츠’의 이름을 딴 곳으로, 두 개의 거대한 바위산 사이 해발2,685m에 위치하고 있다. 아래에서 올려다봤을 때 구름에 봉우리가 가려졌었는데, 아니나다를까 산장이 구름 위에 있는 거 같았다.



산장의 뒤 쪽으로 가니, 또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아직 눈이 있다! 진짜인가 싶어 계속 쳐다본다. 사람들도 신기한지 만져보기도 하고 발로 건드려보기도 한다.



슬슬 점심 시간이라 산장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기로 했다. 굴라쉬 스프와 빵, 독일식 소시지와 폴렌타가 함께 나오는 식사를 주문했다. 폴렌타는 옥수수 가루로 만든 일종의 죽 혹은 퓌레 같은 건데, 이탈리아 북부 지방의 전통 음식이라고 한다. 매쉬드 포테이토처럼 고기류와 곁들여서 주로 먹는 듯 했다. 옥수수의 고소한 맛이 느껴지는데 음식의 질감이 좀 낯선 느낌. 반바지를 입었더니 조금 추웠었는데 따뜻한 스프가 몸을 따끈하게 데워줬다. 스프도 소시지도 꽤 맛있는 편. 만족스러운 한 끼였다.



이제 내려갈 시간. 다시 그 무서운 케이블카를 타야한다. 걸어내려갈 수는 없으니 일단 케이블카에 몸을 실었다. 반대편에는 용자를 위한 건지, 칸막이가 없는 케이블카가 지나간다. 저걸 타고 이 경사를 오르내리다니 말도 안 된다.


어떤 정신으로 내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남은 건 토니 데메츠 산장에 저 특이한 케이블카를 타고 다녀왔다는 일종의 성취감. 이번 돌로미티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경험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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