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쓰 포르도이, 코르바라 시내
돌로미티 여행 3일차. 다음 행선지는 사쓰 포르도이(Sass Pordoi). 사쏘 룽고에서 1시간 정도 걸린다. 정말 말도 안 되게 꼬불꼬불한 길을 운전했다. 1.5차선 같이 좁은 길을 우리도 가고, 오토바이 부대도 가고, 자전거 부대도 가고, 캠핑카도 지나간다.
그 언덕(도 아닌 산)길을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는 자전거들을 보면 덩달아 내 다리도 터질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여행수단으로 자전거를 선택한 사람들은 무동력으로 돌로미티 구석구석을 다녀보고 싶기 때문에 자전거를 선택한 걸까? 혹은 탄소배출을 최소화하는 등 지속가능한 여행 방법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사람들인 걸까? 아니면 깨끗한 돌로미티의 자연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오르막길은 분명 죽을만큼 힘들겠지만, 내리막길은 분명 천국일 거다. 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아마 노력한 만큼 더 달콤하고, 뜨거워진 몸과 땀을 식히는 바람은 더 시원할지도.
한편, 주행하다보면 어느새 뒤편에서 엔진음을 내는 오토바이들은 자주 우리를 추월하고 싶어하는데, 마침 반대 차선에서 차가 오고 있을 때는 행여 사고가 나지는 않을지 심장이 쫄깃해진다. 바이크 라이더들은 보통 혼자 다니지 않다는 것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바이크 하나에 두 명이 타지 않은 이상 보통 두 세 대가 그룹으로 다니는 경우가 많다는 점. 돌로미티에서 운전할 때 (특히 코너에서) 주의해야할 포인트다. 한 명으로 끝이 아니다!
사쓰 포르도이 메인 주차장은 만차라서 조금 아래에 있는 다른 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케이블카 입구를 향해 가다가 그 옆에 있는 기념품샵이 눈에 들어와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자석, 펜, 티셔츠 등의 일반적인 기념품부터 나무 공예품이나 티롤 전통 의복도 있다. 나는 자석과 아직은 사용처가 떠오르지 않지만 언제 어디선가 사용할 붉은 테이블 클로스를 샀고, 엄마는 내게 돌로미티라고 적힌 어두운 녹색 티셔츠를 기념으로 사주셨다 (I Love Dolomiti는 아니다). 촉감이 부드러워서 맘에 든다. 추억할 거리 하나 추가.
커다란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도착했다. 사쓰 포르도이 정상은 해발 2,950m 정도인데, 거대한 석회암 고원처럼 위가 평평하고 옆은 깎아지른 절벽처럼 수직으로 솟아 있어서 “돌로미티의 테라스(Terrazza delle Dolomiti)“라는 별명이 있다고 한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갈 때는 차로 지나온 길이 구불구불 잘 보였는데, 정상에선 구름이 가득 차 풍경은 커녕 바로 앞의 바위도 잘 안 보인다. 바위 모습이 아주 특이하여 스타워즈 영화의 배경이 되었다고 하던데, 바람이 불어 잠시 구름이 없어졌을 때에만 어떤 느낌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기대한 것을 보진 못했지만 이것 나름대로 운치있었다. 구름 속에 있는 느낌이라니. 예전 홍콩에 외가 가족들과 여행을 갔을 때 빅토리아 피크 전망대에 올라갔던 게 생각난다. 그 때에도 두근대는 마음으로 트램을 타고 올라갔는데, 홍콩 야경이 아닌 구름만 제대로 보고 왔었다. 당시에는 허탈함이 컸는데, 이상하게 이번에는 그렇게 아쉽지 않다. 모든 것이 내 기대를 충족할 수는 없는 걸테다.
산장 반대편에 짧은 산책로가 있다고 해서 내려가봤는데, 입구쪽과 다를바 없이 구름이 가득 찼다. 아침엔 산장 앞과 뒤의 풍경이 달라서 조금 기대했는데, 여기는 아니다. 커다란 철제 십자가가 우뚝 서있고 구름 속을 검은 새들이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풍경은 화창했던 어제와는 다른 장르의 영화 속 한 장면인 듯 했다. 산신령이 나타날 것 같다가도, 구름을 찢고 알 수 없는 생명체가 튀어나올 것도 같다.
차가운 구름 속에 서있자니 살갗이 드러난 곳에서부터 추위가 엄습한다. 산장으로 들어가 에스프레소 마끼아토 한 잔에 설탕을 듬뿍 넣어 마셨다. 엄마는 아쉬우신지 이곳 저곳을 돌아보며 사진을 찍으셨다. 스타워즈 같은 SF 영화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어찌 되었든 이 조차 돌로미티에서 흔히 겪을 수 있는 에피소드일 것 같았다.
사쏘룽고와 사쓰 포르도이를 방문하는 게 오늘의 주요 일정이라,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저녁 장거리를 보고 가기로 했다. 어제 들렀던 슈퍼마켓은 너무 작아 물건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서 오늘은 다른 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아라바(Arabba)에 있는 데스파(Despar). 이층 규모의 건물로, 겉보기보다 꽤 넓어 여유롭게 쇼핑할 수 있다. 채소/과일의 신선도도 좋고 지역 특산물을 정리해둔 코너도 있었다.
토마토와 채소, 저녁에 먹을 빵도 손수 잘라 봉투에 담았다. 와인에 곁들일 멜론, 납작복숭아, 청포도, 피스타치오, 바질도 장바구니 in! 살라미와 치즈는 점원의 추천을 받아 최소 그램으로 잘라왔다. 사진을 못 찍은 게 너무 아쉬운, 기계를 통해 아주 얇게 잘리는 살라미..! 치즈는 부드러운 것과 단단한 것 중 단단한 종류로 골랐는데, 어떤 맛일지 궁금하다. 와인은 베네치아에서 맛있게 먹었던 피노 그리지오를 한 병 담고, 트러플 리조또를 만들 수 있는 키트가 있어 궁금해서 같이 담았다. 끝으로 내일 아침에 먹을 커피 캡슐과 물, 주스까지 넣으니 가져온 장바구니가 꽉찼다. 오늘 저녁이 너무 기대된다.
사 온 식료품을 얼추 정리해두고 우선은 잠시 쉬기로 했다. 엄마도 나도 강철 체력이 아니어서 잠시나마 이렇게 쉬어가는 시간이 소중하다.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것도 여행의 묘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스친 코르바라(Corvara) 시내가 궁금하여 잠시 둘러보고 오기로 했다. 숙소에서 차로 거의 5분 거리의 소도시인데, 작은 부티끄들이 곳곳에 있어 구경하기 좋을 것 같았다. 한국에 돌아가는 날이 아버지 생신이라 선물을 골라볼 수 있겠다는 기대도 되었다. 방문센터 앞에 주차를 한 뒤 상점가로 걸어가니, 비가 조금씩 흩뿌린다. 숙소에서 가져온 장우산을 나눠쓰고 돌아다니며 옷가게와 소품샵 등을 구경했다.
시내 곳곳에 놓인 별 것 아닌 장식품들이 다 예쁘다. 솔방울을 형상화한 듯한 화분, 작은 시계탑 모양의 화분 등 말이다. 깨끗한 동네 분위기를 한층 더 끌어올려주는 듯했다. 간간히 꿀, 잼, 술, 피클 등 지역에서 만든 특산품 가게도 몇 군데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특히 식사 후 마시는 디제스티보 종류가 아주 다양했는데, 일반적인 그라파 외에도 각종 허브나 과일을 넣어 향을 끌어올린 그라파 등이 있었다.
오늘의 저녁 식사는 엄마가 준비해주시기로 했다. 피노 그리지오가 메인인 와인 안주 한 상. 멜론을 잘라 프로슈토로 감고, 토마토에 모짜렐라와 바질, 올리브유를 올렸다. 아까 사온 빵과 치즈, 살라미, 올리브, 피스타치오 등을 곁들이니 먹고 싶은 것들이 전부 준비되어 아주 훌륭하다.
와인은 베네치아에서 마셨던 것 만큼 상큼하고 깔끔했다. 여행에 관련한 이야기부터 가족들, 가까운 미래의
계획 등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시간이 늦었다. 바깥에는 천둥 번개와 함께 비가 어마어마하게 많이 내린다. 식기세척기를 다 돌리고, 하루를 마무리 하려는 찰나 갑자기 집 안의 모든 불이 꺼졌다. 창 밖을 내다보니 일대가 어둠에 묻혔다. 정전! 놀랄 법도 한데 왜인지 아무렇지 않았다. 큰 문제가 아닐 거 같은 그런 느낌. 아니나다를까 금방 전기가 돌아왔다.
모든 게 어둠에 묻혔을 때, 잠시 창가에서 떨어지는 굵은 빗소리를 들었다. 저 멀리서는 번개가 번쩍 거린다.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 4일차 밤도 이렇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