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 막달레나 성당, 산 죠반니 성당
5일차 아침이 밝았다. 나는 어제도 따뜻한 물을 넣은 물주머니를 끌어안고 잠들었다. 꽤 푹 잔 느낌인데 엄마는 잠을 좀 설치셨다고 한다. 시차 때문인지, 잠자리가 좀 불편하셨던 건지 모르겠다.
오늘도 내가 아침상을 차렸다. 사실 지금까지 먹었던 재료들의 재구성이다. 오늘은 계란 후라이와 빵, 과일, 요거트에 주스가 추가되었다. 나는 계란을 다른 요리와 먹는 게 아닌 이상 노른자까지 익힌 걸 선호하기 때문에 하나는 전부 익힌 계란, 엄마를 위한 다른 하나는 써니사이드업으로 준비했다. 어제 먹고 절반 남았던 주황빛의 칸탈로프 멜론은 굉장히 달고 맛있어서 자꾸 손이 갔다. 작년 토스카나에서는 납작복숭아의 매력에 매료되었다면, 이번 돌로미티 여행에서는 칸탈로프 멜론가 너무 맛있다. 어제 슈퍼마켓에서 사온 일리 커피 캡슐도 내렸다.
오늘의 일정은 한국에서 초안으로 계획하길,
1) 스파에 가거나,
2) 로젠가르텐과 카레짜 호수에 가거나, 혹은
3) 산타막달레나와 볼차노에 구경을 가는 옵션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일정을 소화하며 조금 힘에 부치면 스파에 가서 느긋하게 휴식을 할 수도 있고, 체력에 여유가 있다면 로젠가르텐 산군에서 카레짜 호수까지 걷는 코스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재미있게도 딱 중간 정도의 체력이 남아, 식사를 하며 3번 옵션 '산타 막달레나와 볼차노'에 가기로 결정했다. 산타 막달레나는 책에 의하면 서양 사람들에게 그리 유명한 지역은 아닌데 한국 관광객들 사이에 특히 인기라고 한다. 작은 성당 뒤로는 오들레 산군의 톱날 같은 석회암 봉우리, 앞쪽엔 푸른 초원이 펼쳐진 풍경이 돌로미티의 대명사 같다고. 책에 소개된 사진이 정말 그림 같이 평화로워서 한번 가보고 싶어졌다.
어제와 달리 날씨가 아주 맑다. 돌로미티의 다양한 면모를 볼 수 있어 이것 나름대로 의미있다. 가끔은 흐린 날이 있어야 맑은 날이 더 빛을 발한다는 진리 같은. 늘상 맑은 날이길 기대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지. 일상에서도 당연히 흐린 날이 있지만, 이상하게 그 흐림은 천둥 번개가 함께 몰아치는 것 같다고 여겨질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여행에서의 흐림은 일종의 백신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잠깐 흐리지만, 결국 맑은 날이 이어질 거라는 걸 깨닫게 해주는. 지금 마주한 나의 흐림은 구름 많음인지, 천둥 번개, 폭우인지? 결국은 맑은 날이 올 거다.
내비게이션 목적지를 산타 막달레나 성당 앞 주차장으로 설정하고, 오늘도 굽이굽이 커브길을 운전해간다. 차로 1시간 30분 정도를 가야 하는 거리라, 한참을 달리는데 풍광이 너무 멋진 곳이 있어 잠시 멈추기로 했다. 계곡 너머 산이 겹겹이 솟아있고 그 아래로 나무들이 숲을 이룬 모습이 웅장했다. 길가엔 보라색 들꽃이 지천으로 펴있어 더 이국적이었다. 어젯밤 비가 많이 와서인지 도로 옆 곳곳에 작은 폭포 같은 물줄기가 생겼다.
산타 막달레나 성당으로 가는 길에 산 죠반니(San Giovanni) 성당이 핵심인 유명한 뷰포인트에 먼저 들렀다. 달력이나 윈도우 배경화면에서 보던 그 모습이다. 날씨가 좋아 초록색 들판이 더 싱그러워보이고, 홀로 선 성당이 더 성스러워보인다. 예전 밥 아저씨가 그렸을 것 같은 그림같은 장면. 하얀 성당 뒤로 짙은 숲과 바위산이 펼쳐졌다. 성당 근처에 가볼 수도 있긴 하나, 지금은 저 부지가 사유지에 포함되어 있어 입장료를 내야 한다고 한다.
이 성당에서 기리는 산 죠반니(성 요한)는 세례자 요한이 아니라, 체코 출신 '네포무크의 요한'인데, 전설에 따르면 요한 네포무크는 고해성사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체코의 블타바 강에서 고문을 받고 순교한 후 익사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그는 “비밀을 끝까지 지킨 성인”, 그리고 익사 위기에 처한 모든 사람들의 수호성인, 알프스 지역에서는 여행자·농부·가축을 보호하는 수호성인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지금까지 돌로미티 어디를 가든 한국 사람들이 아주 많았는데, 책의 설명과는 반대로 한국 분들은 한 명도 못봤다. 뷰포인트엔 일본, 중국 국적의 분들이 계셔서 줄지어 풍경 사진을 찍었다.
작은 개울을 지나, 산타 막달레나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 경사가 꽤 가파르다. 60-70대 이상으로 보이는 미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가이드의 지도 하에 성당 언덕길을 함께 오른다. 비슷한 타이밍에 출발한 바람에 그들의 이야기를 귀동냥하게 되었다. 그룹을 이끄는 젊은 가이드는 조부모님이 이 동네에 사셔서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이 동네에 살았는데, 아마도 지금은 좀 더 큰 도시로 나가 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가끔 어렸을 때 살던 동네에 가면 묘한 안정감이 들 때가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저 가이드는 꽤 복받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엄마와 나눴다.
나에게도 그런 안정감이 드는 골목이 있다. 조부모님이 사셨던 동네의 산 바로 아래 있던 길이다. 내가 4-5살 정도로 아주 어렸을 때 할아버지, 동생과 함께 산책을 다녔었는데, 할아버지가 동생이 탄 유아차를 밀고 나는 그 옆을 같이 걸어갔던 장면이 생각난다. 길 한 편으로는 산이어서 나무가 울창했고 다른 한 쪽은 주택들이 있는 이면도로. 그래서 계절이 어떻게 변하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바람이 불어 숲의 나뭇잎이 시원하게 흔들리면 안정감이 더 커진다. 한참 취업이니 회사일이니 힘들었던 20대 시절,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일부러 조금 돌아 그 길을 지나갈 때가 있었다. 지금은 할머니도 이사를 가셔서 갈 일이 없어졌는데, 아주 마음이 힘들 때 가끔 생각나곤 한다.
이제 조금만 더 오르면 성당이다. 아담한 규모의 산타 막달레나 성당은 성 마리아 막달레나의 유해 일부가 이곳으로 전해졌다는 믿음 때문에 세워졌다고 한다. 맨 처음엔 14세기에 세워졌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의 모습은 18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개축된 버전이라고 한다. 유적들도 시간이 지나며 점차 새로운 양식으로 업그레이드되나보다.
하얀 벽과 분홍색 장식들, 첨탑이 잘 어우러졌다. 성당 부지에는 들어갈 수 없는 줄 알았는데 빙 돌아가니 울타리가 열려있었다. 성당 바로 앞엔 동네 분들의 묘지가 있었는데, 저 멀리는 산들이 보이고 햇빛도 아주 잘 들어서 자리가 아주 좋아보였다. 아, 이렇게 사랑하는 가족을 교회에 모시게 되면 아무리 오는 게 힘들어도 매주 와보고 싶을 것 같기도 하다.
성당 내부엔 바로크 양식의 제단도 있고, 화려하게 꾸며진 장식들이 눈에 띄었다. 성당 규모에 비해 꽤 화려한 듯 했다. 성 막달레나의 부활 목격 장면을 그린 제단화와 로코코풍 장식의 스투코 천장. 잠시 의자에 앉아 우리 가족의 건강과 나의 미래에 대해 기도를 올렸다. 엄마도 다른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기도하시는 듯 하여 먼저 조용히 성당 밖으로 나왔다.
기도까지 마치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슬슬 배가 고파 식당을 찾다가 성당으로 오는 길에 지나쳤던 호텔 Fines의 1층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날씨가 좋아 야외 테라스석에 앉았다. 음료와 빵, 티롤식 애피타이저, 샐러드, 알리오올리오 파스타가 차례로 나왔다. 빵은 누룽지처럼 꽤 단단한데 허브류가 콕콕 박혀있어 계속 손이 가는 맛이었다. 티롤식 애피타이저는 일종의 고기 완자 같은 건데, 비트, 시금치, 치즈 세 가지 재료를 메인으로 만든 거라 3개의 맛이 각기 달랐다. 샐러드는 정말 상큼 그 자체. 일단 채소 하나하나가 부드럽고 맛있었다. 알리오올리오는 두 종류의 방울토마토와 치즈 누룽지가 곁들여져 색다른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