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로미티 세체다
산타 막달레나의 레스토랑에서 음식 하나 하나를 음미하며 점심 식사를 마쳤다. 티롤 지방의 음식과 이탈리아 음식. 워낙 날이 좋아서 더 맛있게 느껴진 듯도 하다. 원래 계획으로는 산타 막달레나 이후에 돌로미티 서쪽의 거점도시 볼차노로 가려고 했는데, 식사를 하며 마음이 바뀌었다. 1시간 거리를 운전해서 갔다가 다시 숙소로 돌아올 때 1시간 30분 가량을 또 운전해야 하는 게 조금 버겁게 느껴졌기 때문.
대신 오르티세이에서 갈 수 있는 세체다에 가기로 했다. 오르티세이에서 숙소까지는 볼차노에서 가는 절반인 약 45분 정도 걸려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하다. 트레치메를 하이킹했던 날 산장에서 쉬며 만났던 분들이 세체다가 돌로미티에서 갔던 넘버원 스팟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영향인지 나도 엄마도 하루 빨리 가보고 싶었다.
오르티세이로 가는 길에 종종 나무 공예 전문점이 보인다. 그 중 꽤 규모가 큰 곳이 있길래 차를 세웠는데, 가까이 가보니 아쉽게도 운영중이진 않았다. 그래도 바깥 유리를 통해 내부를 볼 수 있도록 전시가 잘 되어있었다. 종교적인 의미가 담긴 성물이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듯 했다. 성모 마리아상, 예수 상, 성 가정 상 등이 크기별로 다양했다. 그 외 가장 자주 보이는 주제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장면(Nativity Scene)이다. 각 사람들과 동물들의 포즈가 다양한 건 물론, 얼굴 표정도 아주 세밀하게 표현이 되어 있었다. 아주 세밀하게 장식된 조각품에서 일종의 장인 정신이 유리 너머로 느껴졌다.
그러다가 수 십 개 이상 전시되어 있는 마리아상의 의복이 서로 다른 게 눈에 띄었다. 엄마는 옷의 색마다 종교적으로 의미하는 게 다르다고 알려주셨다. 좀 더 찾아봤더니, 푸른 망토와 붉은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 상에서 푸른 망토는 ‘하늘과 평화, 그리고 신성한 존재로서의 마리아’, 붉은 옷은 ‘인간으로서의 사랑과 고통’을 뜻하며 이게 가장 많이 보였다. 나도 어렸을 때에 내 방에 이 조합의 작은 성모 마리아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하얀 옷의 마리아상은 순결과 빛의 상징, 파티마나 루르드의 성모처럼 세상에 평화를 전하는 의미. 검정이나 짙은 남색의 마리아는 ‘슬픔의 성모’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제 성당에 갔을 때 성모님이 어떤 색의 옷을 입고 계신지를 조금 더 유심하게 볼 듯 하다.
살짝 늦은 오후 시간에 도착했더니 세체다 케이블카 주차장이 만차여서, 조금 기다렸다가 주차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오르티세이가 주변 인근에서 꽤 큰 규모의 도시여서 관광객이 다른 곳보다 더 많이 몰리는 듯 했다.
세체다 정상으로 가려면 곤돌라와 케이블카를 연이어 타야한다. 다행히 오래 기다리지 않고 곤돌라에 탈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탑승장 근처의 하늘은 밝고 환한데,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하늘이 점점 어두워진다. 먹구름이 몰리고 어렴풋 천둥 소리가 들린 듯도 한데 내가 들은 게 천둥이 맞는지 아닌지 긴가민가하다. 만약 정상이 위험했다면 케이블카 운영을 안 하겠지,라는 생각으로 일단 두 번째 케이블카도 탑승했다.
케이블카 플랫폼 바깥으로 나오니 돌로미티의 전형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풍경에 말 그대로 숨이 탁 트인다. 바위산이 뾰족한 북쪽에서는 먹구름 사이로 번개가 번쩍거리고, 천둥 소리가 계속 들린다. 우리가 서 있는 곳에 비가 내리지는 않지만 이따금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지척에서 크게 들리니, 이러다가 벼락을 맞는 게 아닌가 싶다. 저 멀리 빛의 기둥인지, 빗줄기인지 분간이 안 되는 구간이 군데 군데 보인다. 그 옆으로 거대한 칼날을 펼쳐놓은 듯 뾰족한 봉우리가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솟아있는 절벽과 암봉들을 보고 있자니, 이게 대체 어떻게 만들어졌을지, 어떻게 이 곳에 위치하고 있는 걸지 궁금해졌다.
북쪽은 먹구름 속 천둥 치는 바위산, 남쪽은 해가 쨍쨍한 푸른 풀밭인 요상한 풍경. 마치 하나의 거대한 스튜디오를 둘로 나눠 세팅한 것 같다. 지척인 곳도 이렇게 날씨가 다르니 옛날 여기 살았던 사람들은 같은 하루를 보냈어도 경험한 게 아주 다를 수도 있겠구나 싶다.
절벽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뷰포인트로 조금 더 높이 올라가봤다. 표지판에는 10분 거리라고 쓰여 있는데 경사가 어마어마하게 높아 그것보다는 더 걸렸다. 정상 근처엔 커다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상이 있었다. 아무래도 산에서 사건 사고가 많이 일어나서 곳곳에 십자가가 있는 건가 싶었다. 위에선 아래에 문제가 없는지 살피고, 아래에선 목표로 삼아 올라갈 수 있는 정신적 지주 같은.
주변 경치를 빙 둘러서 감상할 수 있는 파노라마 전망대에는 각 산맥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설명이 되어 있다. 저 멀리 있는 산맥과 퍼즐을 맞춰보듯 360도를 돌아봤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주요 산군으로는 남동쪽으로 사소룽고 산군, 동쪽으로 셀라 산군이 있다. 어제 갔던 곳들이 저렇게 생겼었구나 싶다. 실제로 그 산/봉우리에 오르는 것과 그것을 바라보는 것은 별개인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가끔씩 나의 삶도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반추해보는 과정이 필요한 것. 그 과정에서 내 전체 삶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려볼 수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