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랑 돌로미티 여행 #8 오르티세이

오르티세이, 저녁 만찬

by Starrwy


[ 오르티세이에서의 작은 휴식 ]


세체다의 풍경을 한참 동안 즐기다가 오르티세이 시내를 구경하러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왔다. 올망졸망한 주거 지역을 지나 작은 개울을 건넜다.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는 꽃화분으로 장식되어 알프스 느낌을 한껏 내뿜고 있었다. 바로 옆은 초등학교. 학교를 둘러싼 낮은 나무 울타리에 자세히보니 그림들이 그려져있다. 아마 학생들의 그림을 나무 판자에 조각으로 옮긴 것 같은데, 각기 다른 모습들이 앙증맞고 귀엽다.



오르티세이 상점가 곳곳은 크고 작은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다. 한 건물의 외벽에 암벽 등반을 모티브로 한 조각들이 있었는데, 뭐랄까 이곳의 지역 정신(?)을 보여주는 것 같아 좀 재미있었다. 암벽 등반을 하기 좋은 산들이 지천이라 도전 의식을 자연스레 자극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 밖에도 거리에 커다란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어 무엇을 표현한 걸지 상상하며 구경하는 것도 재밌었다.


난쟁이 요정(?)이 나무 조각을 하는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나무 공예품 가게에 들어갔다. 손으로 정성스레 깎은 작품들이 아주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다양했다. 조각의 가짓수가 워낙 많아 내부가 복작복작했다. 이곳에서 동생과 조카에게 줄 작은 성모상을 하나 샀다. 작은 나무 성모상은 아주 가볍지만 기품이라는 무게가 동시에 느껴진다. 정교하게 색을 입힌 작품들은 더 실감났는데, 디즈니 애니메이션 피노키오에서 피노키오를 완성한 뒤 마지막에 얼굴을 물감으로 그리던 제페토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자식을 품는 듯한 마음이었을까 싶다.




카페에서 잠시 쉬며 좋은 날씨와 오르티세이를 즐기기로 했다. 여행이 절반 정도 지나 겨우 익숙해진 물 주문. 그리고 카푸치노, 진저에일, 얼음을 엑스트라로 요청했다. 테라스에 앉아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마시니 청량함이 배가 되는 듯 하다.


그렇게 십 여 분 정도 여유를 즐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아까 세체다에서 봤던 빗줄기가 여기로 넘어온 건가 싶다. 하늘은 맑은데 비만 오는 호랑이 장가가는 날. 조금 오다가 그치겠거니 했는데 꽤 굵은 빗방울이 오래 떨어져서, 카페 직원들이 분주히 테라스의 차양을 펴거나 소파석의 쿠션을 치우거나 하는 등 이것저것 살펴주었다. 마침 우산을 차에 놓고 나왔었는데, 카페에 들어와있다니 운이 좋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 본의 아니게 이야기가 잘 들렸던 한 커플은 각자 여행을 하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어 커피 한 잔을 하러 온 듯 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로를 궁금해하는 과정이 뭐랄까, 아주 풋풋했다. 친구로 발전하든, 연인이 되든, 둘 다 아니든 여행에서 어떤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건 특별한 경험이 되는 것 같다. 알지 못했던 세계와 마주하게 되기 때문. 내향형인 내가 잘 못 하는 부분이기도 한데, 여행지에서는 어쩌면 다신 만나지 않을 사람일 수도 있겠단 생각에 속 깊은 이야기를 비교적 쉽게 꺼내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애써 가려왔던 내 안의 진짜 고민, 불안, 갈망을 마주하게 될지도. 그리고 아주 다른 세상을 알게 되고,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얻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비가 멎고, 조금 더 엄마와 수다를 떨다가 상점가를 마저 구경하기 위해 일어났다. 비교적 큰 도시여서인지 가게도 많고 사람도 덩달아 많았다. 메인 상점가의 기념품 가게에서 나는 내년 달력과 자석 몇 개를 추가로 샀다. 돌로미티에서 볼 수 있는 꽃들을 그린 달력이다. 그리고 나무로 만든 하얀 십자가도 샀다. 부드럽게 조각된 미감과 가벼움이 맘에 쏙 들었다.


상점가를 쭉 따라 내려가보니 아까 세체다를 가기 위해 주차했던 곳과 이어지는 에스컬레이터가 나왔다. 아까는 그걸 모르고 다른 방향으로 걸어내려왔었나보다. 그래도 내려가는 게 아니라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발견해서 다행이다. 에스컬레이터 입구에는 팔이 나무로 변한 소녀상이 서있다. 사진을 찍고 보니 마치 하늘을 등에 지고 있는듯 했다.




[ 저녁 만찬 ]


저녁식사는 숙소에서 스테이크를 구워 레드와인과 함께 먹기로 했다. 엄마가 한국에서부터 이렇게 이탈리아에서 직접 요리하는 걸 기대하셨던 걸 알고 있다. 오늘이 숙소에서 저녁을 만들어먹을 수 있는 마지막 밤이니, 엄마의 꿈을 펼치실 수 있게 장을 보러 가기로 했다. 그런데 밤 늦게까지 하는 서울의 마트에 익숙해서였는지, 돌로미티 슈퍼마켓의 영업시간을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그래서 숙소로 가는 길의 슈퍼마켓에 도착할 즈음엔 마감 시간인 것. 위기다. 구글 지도는 운전하며 가는 중에 시시때때로 우리가 목적지로 설정한 마트의 마감 시간이 타이트하다고 알림을 줬다. 가는 길에 있는 슈퍼에 들를까 싶었는데, 주차도 마땅치 않고, 전부 길 건너편에 있어 1차선 도로에서 차를 돌리기에도 쉽지 않았다. 엄마가 꽤 강하게 하고 싶다고 표현하신 걸 못하게 해드릴까봐 초조해졌다.



거의 유턴하듯 지그재그로 가는 길도 무사히 통과. 엄마로부터 ‘구곡양장’이라는 표현을 배웠다. 직역하면 ‘아홉 번 구부러진 양의 창자’라는 뜻인데, 돌로미티의 도로처럼 꼬불꼬불 험한 산길을 이르는 말이다. 앞에 캠핑카들이 느릿느릿 가는 바람에 속이 탔지만, 마침내 슈퍼마켓에 도착했다. 마감 시간까지는 약간의 여유가 있다.




오늘 들른 슈퍼마켓도 맨 처음 갔던 곳에 비하면 작지 않은 크기라 물건들이 많았다. 우린 가장 먼저 정육 코너로 갔다. 그런데 이런, 스테이크용 고기는 이미 다 팔리고 얇게 로스로 구워 먹을 수 있는 필렛만 남았다. 점원에 문의해봐도 남은 건 진열장에 있는 것 뿐. 고민 끝에 이걸 구워보기로 했다.



그 외에 샐러드, 물과 간단한 안주거리를 사서 숙소에 들어왔다. 내가 옷가지나 짐들을 정리하는 와중에 엄마는 벌써 요리 모드에 돌입하셨다. 핏기를 제거한 고기를 올리브유와 소금, 후추로 마리네이드해두고 샐러드용 채소를 부지런히 준비하신다. 나는 접시와 다른 부차적인 것들 세팅. 와인도 미리 열어 잔을 채우고 안주거리나 과일 들을 접시에 담았다.


엄마가 꿈꿨던 것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해냈다. 구워주신 고기는 아주 맛있었다. 곁들였던 로컬 와인은 베리류의 과실향과 적당한 산미가 고기랑도 꽤 잘 어울려, 너무나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다.




[ 식후 동네 산책 ]


식기세척기를 돌려놓고, 소화를 시킬 겸 숙소 근처에 산책을 가기로 했다. 이미 9시가 넘은 시간이라 웬만한 가게들은 문을 닫았고, 아직 영업중인 곳은 길 건너의 펍 정도밖에 없다. 다만 9시가 넘었지만 아직 환한 건 한국과 다른 점. 10분 정도 거리에 작은 성당이 있어 구경 가보기로 했다. 원래는 일요일에 시간이 맞으면 미사도 보려고 찾아뒀던 곳이지만 도착했던 날 못갔었기 때문에 조금 아쉬웠었다.


성당 앞에는 디자인이 독특한 벤치가 있다. 기대는 부분이 산을 본딴 모양으로, 회색에 가까운 나무색과 대비되는 빨간 색의 두 줄이 시선을 강렬하게 사로잡는다. 별 것 아닐 수 있는 벤치가 이렇게 멋지다니, 디자인이란 게 참 대단하다.




성당 외부에 붉은 꽃으로 장식된 작은 십자가상이 있어 짧게 묵념했다.

오늘도 너무나 멋진 하루를 보내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그렇게 5일차 밤도 마무리.




[ 6일차 아침, 숙소 옮기는 날 ]


6일차의 아침이다. 오늘의 조식은 브라우니, 치즈를 넣은 샐러드, 과일, 바게트와 살라미, 삶은 계란과 요거트, 주스. 그리고 커피까지. 남은 음식을 재구성한 거긴 하지만 간단하면서도 건강식 느낌이 나서 만족스럽다.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체력 포션, 홍삼도 잊지 않는다.



오늘은 숙소를 옮기는 날이라 부지런히 체크아웃을 준비한다. 짐도 싸고 이불도 정리하고 쓰레기도 정리. 집주인은 다른 일로 자리를 비우기 때문에 식탁에 열쇠를 놓아달라고 연락이 왔다. 남기고 가는 것이 없는지 살피고, 할 수 있는 모든 걸 제자리에 정리한 다음 문을 나섰다. 트렁크와 뒷자리에 짐을 싣고 나니 차가 꽉 찬 느낌이다. 이제 오르티세이 방향으로 출발!



이번에 렌트한 차는 하이브리드여서 그런지 연비가 좋은 편이다. 며칠을 내리 달렸는데 이제 슬슬 기름을 넣을 때가 되어 처음으로 주유를 했다. 셀프로 기름을 원하는 만큼 채우고 창구에 몇 번에서 주유를 했다고 말하면 계산을 해주는 방식이었다. 사전에 넣을 용량이나 금액을 키오스크를 통해 정할 수도 있긴 하다. 어차피 자동차를 반납할 때 기름을 가득 채워서 반납해야하고, 내일은 밀라노까지 긴 이동이 예상되므로 가득 주유했다.


다음 숙소의 체크인 시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오르티세이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어제는 못 갔던 개울 쪽으로 나왔는데, 뷰가 너무 좋다. 세차게 흐르는 개울물이 머릿속까지 시원하게 정리해주는 것 같다. 기분 좋은 하루 시작!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엄마랑 돌로미티 여행 #7 세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