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랑 이탈리아 북부 여행 #11 밀라노2

브레라 미술관, 최후의 만찬 워킹 투어

by Starrwy

[ 여행의 마지막 아침 ]


25년 이탈리아 북부 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이 오고야 말았다. 사두고 아직 못 먹은 식재료와 한국에서 가져온 컵라면으로 ‘냉털‘ 조식을 차렸다. TV를 켜 조용한 음악이 나오는 유튜브를 켜둔 채 천천히 식사를 마쳤다. 잊지 않고 커피까지 한 잔.


이제 진짜 진짜 최최종 짐을 싸야 한다. 거실에 캐리어를 넓게 펼쳐두고 짐정리를 하는 손놀림이 제법 능숙하다. 모든 방과 쓰레기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셀프 체크아웃.


한참 뒤 호스트로부터 극찬의 후기가 돌아왔다. 지금까지 여행을 하며 후기를 여러번 받아봤지만 이렇게까지 격하게 리뷰를 받은 경우는 드물어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친절인걸까?


한국어로 자동 번역된 집주인의 후기



원래는 세 개의 캐리어를 밀라노 중앙역 유인 보관소에 맡길 계획이었지만, 짐을 싸면서 이미 1차로 체력이 방전되어 그곳까지 짐들을 끌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급하게 검색해서 찾아낸 ‘Bounce’ 앱. 짐보관계의 에어비앤비 같은 건데, 숙소 바로 옆 카페에 저렴한 가격으로 짐을 맡길 수 있었다. 여행 중 짐 보관소가 멀다면, 근처 상점이나 카페의 유휴 공간을 짐 보관소로 활용하는 플랫폼(Bounce, Radical Storage 등)을 사용하는 것도 좋은 선택인 듯 하다. 엄마는 이런 식으로 짐을 맡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셔서, 요즘 세대들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셨다고 말해주셔서 뿌듯했다.



[ 브레라 미술관, 숨은 그림 찾기 ]


가벼운 몸으로 지하철을 타고 브레라 미술관(Pinacoteca di Brera)으로 향했다. 어제 사둔 1일권이 아직 유효해서 알뜰하게 사용했다. 동상이 서 있는 안뜰을 지나 입장한 미술관은 우아함 그 자체였다.




브레라 미술관에는 중세 고딕 장식부터 르네상스의 작품들이 아주 많은데, 한 제단화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바로 카를로 크리벨리의 '산 도메니코 제단화(Polyptych of San Domenico)'다. 붉은 벽면 위로 화려하게 빛나는 금빛 배경이 시선을 사로잡는데, 중앙에는 우아한 자태의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그 양옆으로는 성 베드로와 성 도메니코, 성 베드로 순교자, 그리고 카메리노의 수호성인 성 베난치우스가 엄숙하게 호위하듯 서 있다.




이 그림을 감상하는 묘미는 바로 ‘디테일 속에 숨겨진 상징 찾기'에 있다. 성경을 잘 알면 각 상징이 뭔지 알 수 있을텐데, 나는 챗GPT의 도움을 얻었다. 성 베드로가 쥐고 있는 묵직하고 정교한 황금 열쇠, 성 도미니코가 들고 있는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과 설교와 교리를 상징하는 성경 등 각 성인을 나타내는 물건들을 찾아내는 게 흥미로웠다.


이 제단화는 산 도메니코 성당을 위해 그려졌기 때문에, 도미니코 수도회의 전통적인 복장인 흰색 튜닉과 검은색 망토를 입고 있는 성인들이 그려졌다고 한다. 우측의 붉은 타이즈와 화려한 르네상스 복장을 한 남성은 성 베난치오인데, 산 도메니코 성당이 있는 카메리노 지역의 수호성인이라고 한다. 왼손에 자신이 지키는 '카메리노'시의 모형을, 오른손에는 승리와 신앙을 상징하는 깃발을 들고 서있다.


화려한 금박과 선명한 색감, 그리고 그 속에 숨겨진 정교한 이야기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여러 그림에서 각 성인의 상징과 장치들을 하나씩 발견할 때마다 마치 보물 찾기를 하는 느낌이었다.



회화 외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피에트로 마니의 조각상 '책 읽는 소녀(La Leggitrice)'. 책에 집중하느라 미간을 살짝 찌푸린 디테일이나 머리카락, 구겨진 옷의 표현이 어찌나 섬세한지, 소녀는 금방이라도 책장을 넘길 것 같았다.




[ 애증의 워킹 투어와 최후의 만찬 ]


점심으로 근처 카페에서 간단히 파니니를 먹고, 오후엔 미리 예약해둔 워킹 투어에 합류했다. 이 투어를 신청한 이유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다. 최후의 만찬 관람권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몇 달 전에 매진되기로 악명 높다. 만약 예약을 놓쳤다면, 가격은 좀 비싸지만 가이드 투어 상품을 이용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방법. 예전에 왔을 때는 다음을 기약했지만, 이번엔 또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역작 <최후의 만찬>(L'Ultima Cena)은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의 식당에 있다. 한 번에 제한된 인원만이, 그것도 단 15분 동안만 방 안에 머물 수 있다. 몇 개의 자동문이 열리고 닫히며 습도와 온도가 완벽하게 조절된 그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바깥세상의 소음은 진공 상태처럼 사라진다. 숨소리조차 내기 조심스러운 압도적인 정적이다.




"너희 중 한 명이 나를 배신할 것이다"


다 빈치가 포착한 것은 성스러운 '기적'의 순간이 아니다. 예수의 폭탄 선언 직후, 열두 제자들 사이로 번져나가는 인간적인 당혹감, 분노, 슬픔이라는 감정의 파동이다.



그림을 찬찬히 뜯어보면 다 빈치의 천재성에 소름이 돋는다. 빛 속에 있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배신자 유다는 홀로 어둠 속에 몸을 뒤로 젖힌 채 돈 주머니를 움켜쥐고 있다. 또한 벽화 속 천장과 벽의 모든 선들은 정확히 예수의 관자놀이로 모이는데, 이 완벽한 원근법은 예수가 이 혼란의 중심이자 절대적인 평화임을 의미한다고.


다 빈치는 젖은 벽에 안료를 스미게 하는 전통적인 '프레스코' 기법 대신, 마른 벽에 달걀 노른자를 섞어 그리는 ‘템페라' 기법을 선택했다고 한다. 수정이 어렵고 색이 탁한 프레스코보다 더 세밀한 묘사와 선명한 색감을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선택의 대가로 작품은 완성되자마자 습기에 부식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식당 에서의 습기와 열기로 인해 더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고.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사람들의 손길을 거쳐 복원이 되어 왔다고 가이드가 설명했다.


비록 벽면은 흐릿해지고 칠은 벗겨졌을지언정, 제자들의 역동적인 손짓과 예수의 초연한 표정은 5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강렬한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후, 스포르체스코 성, 가리발디 동상, 밀라노의 오페라 성지 라 스칼라(Teatro alla Scala) 극장, 갤러리아 등을 지나 밀라노 두오모까지 투어가 이어졌다. 이태리 억양이 섞인 가이드의 열정적인 설명은 쉴 틈 없이 이어졌고 내용은 정말 좋았지만, 문제는 날씨였다. 3시간 가까이 뙤약볕 아래를 걷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엄마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게 보였다. “엄마, 너무 힘들면 중간에 빠질까?” 몇 번이나 여쭤봤지만, 엄마는 단호하셨다. “여기까지 왔는데 끝까지 봐야지”


돌로미티의 산길도, 베네치아의 골목도 함께 걸어온 엄마.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그 고집이, 아니 그 의지가 엄마가 지금껏 삶을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오셨는지를 대변하는 듯 했다. 포기하고 싶고 너무 힘들 때 한 발 더 나아가는 엄마의 그 마음가짐이 이번 여행은 물론 엄마의 직장 생활을 완성한 진짜 원동력이었을까.




[ 밀라노 대성당, 놓치지 말아야 할 숨은 디테일 ]


직사광선이 내리쬐는 광장을 지나 성당 내부로 들어서니 한층 서늘한 공기가 우리를 감싼다. 거대한 기둥과 공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단순히 '크다'는 말로는 부족한, 압도적인 신성함. 가이드로부터 그 거대한 공간 속에서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그러나 꼭 눈여겨봐야 할 네 가지 보물을 전해들었다.


1) 전율이 흐르는 해부학, 성 바르톨로메오

오른쪽 통로를 걷다 보면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조각상이 하나 있다. 어깨에 멋진 천을 두른 근육질의 남성상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가 두르고 있는 것은 천이 아니라 자신의 벗겨진 피부기 때문.


1562년 마르코 다그라테가 조각한 '피부를 벗긴 성 바르톨로메오'는 산 채로 피부가 벗겨지는 형벌을 받고 순교한 성인을 묘사했다. 근육과 핏줄 하나하나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모습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완벽에 가까운 해부학적 지식과 예술적 광기가 동시에 느껴진다. 그 정교함에 전율이 인다.


image.png https://www.duomomilano.it/en/restoration-of-the-statue-of-st-bartholomew/



2) 빛으로 그린 성경, 스테인드글라스

어두운 성당 내부를 신비롭게 밝히는 건 단연 스테인드글라스다. 14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완성된 이 거대한 유리화들은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3) 바닥에 숨겨진 과학, 황동 태양시계

입구 근처 바닥을 유심히 살펴보면 대리석 사이로 길게 뻗은 황동 선을 발견할 수 있다. 무심코 밟고 지나갈 수 있는 이 선은 1786년 천문학자들이 설치한 해시계(The Sundial)다.


정오 무렵이 되면 천장의 작은 구멍을 통해 들어온 한 줄기 빛이 이 황동 선 위를 정확히 지나며 시간을 알린다고 한다. 선 옆에 새겨진 12궁도 별자리 문양을 보며, 시계가 없던 시절 밀라노 사람들에게 시간과 절기를 알려주었을 지혜를 엿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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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terest 와 Reddit에서 찾은 Sundial 이미지


4) 천장에 매달린 붉은 점, 거룩한 못

제단 위쪽 아주 높은 곳을 바라보면 작은 붉은색 조명 하나가 켜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곳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쓰였다고 전해지는 성유물, '거룩한 못(The Holy Nail)'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평소에는 너무 높은 곳(약 40m)에 있어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렵지만, 매년 9월 14일(성 십자가 현양 축일) 즈음에는 특별한 의식이 열린다. 밀라노 대교구장이 '니볼라(Nivola)'라고 불리는 구름 모양의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 이 못을 아래로 모셔와 대중에게 공개한다고 한다.


image.png https://www.reddit.com/r/Catholicism/comments/a52c7n/visited_milan_saw_from_a_distance_a_nail_from_t



[ 다시 한국으로 ]


투어가 끝나고 더위를 식히러 가장 가까운 카페를 찾아 들어갔다. 찬 물로 손을 씻으니 조금 살 것 같다. 자칫 일사병에 걸릴까봐 걱정이 됐었다. 엄마는 젤라또, 나는 수박 슬러시. 얼음장 같은 음료를 들이켰다. 갑작스러운 찬기에 머리가 쨍-하다.



다시 밀라노 중앙역 근처로 돌아와 오전에 짐을 맡겼던 카페에 도착. 한국으로 갈 시간이다.


원래는 공항 버스를 탈 생각이었지만, 이미 만보기를 초과한 엄마의 다리를 보니 무리인 듯하여 우버를 불렀다. 밀라노에서 우버를 부르면 일반 승용차가 아니라 주로 ‘Uber Black’ 급의 고급 세단이나 전기차가 온다. 우리 앞에 미끄러지듯 도착한 건 최신형 테슬라.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오히려 추울 정도로!) 조용한 차 안에서 공항까지 날아가듯 이동했다.


공항에 도착해 면세점 구경 대신 의자에 앉아 휴식을 택했다. 이제 비행기에 오르면 이 아름답고도 치열했던 여행도 끝이다. 베네치아의 물길, 돌로미티의 바위산, 밀라노의 뜨거운 태양까지. 엄마와 함께여서 더 빛났던 시간들.


Arrivederci, Mil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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