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전공은 환경에너지공학이다. 학사, 석사를 거쳐 박사까지 대학에서 10년을 보냈다. 한 발 더 들어간 내 전공은 하수처리와 폐수처리를 했다. 특히 미생물을 이용해 물 처리 연구에 집중했다. 다양한 학과가 있고, 다양한 전공이 있지만 내 전공을 실험을 참 많이 한다.
시간에 따라 변화를 관찰하고, 작지만 생물을 키워내며 유지해야 한다. 평일과 주말의 경계는 없고, 밤과 낮의 분리가 흐릿해지는 생활이었다. 실험실에서 산다. 거주하는 실험실에는 온갖 소리가 난다. 기계가 자신의 존재감을 보이며 윙윙 거리기도 하고, 딸깍 거리는 소리가 꾸준히 계속해서 들리기도 한다.
고요한 가운데, 반복되는 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최면에 걸리는 기분이다. 이때는 귀에 이어폰을 끼우고 소리를 단절한다. 실험을 하던 초반에는 음악을 들었다. 계속 듣다 보면? 질린다. 클래식을 들어도, 재즈를 켜도, 가요를 재생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만난 게 라디오다.
오랫동안 들었고, 좋아했던 프로그램이 있다. <유인나의 볼륨을 높여요>. 늦은 밤 우연히 만난 차분한 목소리와 까르르하며 웃는 소리에 사로 잡혀버렸다. 밤에는 생방송을 청취하고 낮에는 지난 방송을 찾아들었다. 방송이 좋았던 이유가 여럿이지만, 무엇보다 프로그램이 시작과 끝맺는 문장이 유인나 목소리로 들릴 때는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오늘~도, 보고 싶었어요! KBS 쿨 FM 볼륨을 높여요, 저는 유인나입니다."
"볼륨 가족들, 우리는 더 행복해질 거예요."
라디오를 듣다 보면, 묘한 유대관계가 쌓인다. 문자와 채팅을 통해 실시간으로 청취자와 DJ가 연결된다. DJ의 이름도 함께 짓고, 때로는 프로그램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함께 방송을 만든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때때로 친구가 되어 아픔을 공감하기도 하며, 자주 DJ를 놀리며 깔깔 거리기도 했다. 라디오는 DJ를 연예인이 아니라 친구로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모양이다. <유인나의 볼륨을 높여요>도 끝이 있었다. 관계가 끊어지는 상실감에 마음이 먹먹했다. 계속 내리는 비가 없듯, 프로그램 종료의 슬픔도 시간이 지나니 흐릿해졌다. 박사과정이 끝나고, 회사를 다니다 보니 라디오는 추억 박스에 간직하는 기억이 되었다. 먼지가 소복하게 쌓인 채, 마음 한 구석에 두었다.
날 잘 아는 여자친구가 링크를 보냈다. 유인나 유튜브다. 이름은 "유인라디오" 오프닝 영상을 눌렀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연을 읽는다. 어둡던 스튜디오가 밝아지더니, 마음을 찌르르한 시작 문장이 흘러나온다.
"오늘~도, 보고 싶었어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기분이 훅 끼쳐 왔다. DJ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웃음이 배시시 난다. 요즘 누가 라디오를 듣냐며, 재미난 콘텐츠를 추천한다 해도 라디오를 듣고 싶다. 과거로 여행을 떠난다. 귀만 열고 수다 떠는 듯한 기분으로. DJ의 멘트를 마음에 아로새겨본다.
오늘도 누군가를 보고 싶다는 말로, 내일은 더 행복해질 거라는 기도를 하는 라디오. 그동안 보고 싶던 라디오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