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에 일상이 있습니다.
이어폰을 배고 느리게 걷는 이유.
러닝을 한 지 5개월. 부상이 찾아왔다. 나날이 기록이 좋아진 탓에 무리를 한 모양이다. 빠르게 뛰니 무릎이 시큰거리가 시작하다 이젠 걷기가 불편할 지경이다. 운동을 멈췄다. 모든 일에는 관성이 있다. 몸은 쉬라고 하지만, 마음은 관성으로 운동을 하고 싶어 했다.
뛰진 못하니, 걷기라도 해야겠다며 나섰다. 옷을 챙기고 있으니, 날 빤히 보는 이가 있다. 희망이. 우리 가족인 몰티즈다. 눈빛으로 말을 한다. "나가서 걸을 거면 나도 데리고 가라."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하네스를 채웠다. 물, 봉투, 간식을 살뜰하게 챙겨 나길 준비를 했다.
걸을 때 심심하지 않기 위해 이어폰을 찾았다. 아차 싶었다. 어딘가 두고 온 모양이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희망이의 성화에 이어폰 찾기를 그만두고 나섰다. 신이 난 희망이 뒤를 따라가며 산책은 시작되었다. 푸르른 하늘 잔잔히 흐르는 강물. 일 년 중에 이렇게 걷기 좋은 날이 있을까 싶었다.
희망이는 냄새 맡기에 여념이 없었고, 난 허전한 귀를 의식하며 걸었다. 러닝을 할 때도, 운전을 할 때도 채우던 소리가 사라졌다. 여기도 관성이다. 어색했다. 귀는 쉬지 않았다. 온갖 소리가 흘러 들어온다.
강아지가 짖는 소리,
우연히 만난 이웃이 만나 깔깔 거리며 웃는 소리,
운동하는 이들의 숨차는 소리,
힘차게 자전거를 구르는 소리,
나이가 지긋하신 부부가 손을 꼭 잡고 손자 이야기를 하는 소리,
만난 지 얼마 안 된 커플이 점심 메뉴를 정하는 소리,
물 위를 고고하게 떠다니는 오리 소리,
날카로운 눈으로 먹이를 노리다 잡아채는 왜가리 소리,
경전철이 덜컹거리며 지나가는 소리,
운동하시는 어르신이 큰 소리로 틀어 놓은 트로트 소리,
시원한 바람을 가르는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 소리.
희망이가 멈춘다. 나를 다시 빤히 보며, 잊은 거 없냐 묻는다. 아차 싶어 물을 꺼내 주니 허겁지겁 마신다. 이어폰에서 흘러 들어오던 소리보다 다채로운 소리에 덕분에 얼마나 걸었는지 잊었다. 휴대전화를 보니, 30분이 훌쩍 넘었다. 물 마시기를 멈춘 희망이에게 이제 돌아가자고 하며 왔던 길을 되짚어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깔깔거리며 이야기하는 이웃도 지나고, 아직도 메뉴를 정하지 못한 연인도 지나고, 손자 이야기를 하는 어르신을 보며 돌아간다. 이어폰을 빼고 세상을 듣는다. 거기에는 일상이 있다. 이어폰이 없어 지루하다 생각한 거리에는 소리가 가득하다.
바쁘게 살며, 일상을 놓친다. 소리를 듣는다는 핑계로 일상과 단절된다. 귀를 열어보자. 천천히 걷자. 생각보다 많은 소리가 마음으로 흘러 들어올 테다. 삶은 단거리도 아니고 마라톤도 아닌, 산책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한 점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 보단 천천히, 걷는 일. 그렇게 의도하지 않는 곳에 도착하는 엉뚱함. 귀로 스며드는 일상을 만나야 한다는 뜻 아닐까? 산책이 끝나간다. 희망이는 여전히 부족하다지만, 지쳐 보인다. 집에 가자는 말에 환히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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