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서두르지 말라.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날을 버티는 방법.
복층에 산다. 잠에 들기 위해서는 결연한 의지가 필요하다. 아래층과 단호한 이별할 마음과 더 이상 내려오지 않으리라는 철저한 준비성이 요구된다. 정리하고 올라가 누우면 하루가 끝남을 실감하게 된다. 어두워진 커다란 창을 가린 블라인드 사이사이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불빛은 본다. 늘 같은 자리, 같은 방향으로 누워있는 탓인지 오늘이 어제인지 어제가 오늘인지 헷갈린다. 주말까지 며칠이 남았는지 헤아리곤 한다. 내일을 위해 알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눈을 감는다. 요란한 알림. 살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출근을 해야 한다는 고통에 몸서리를 친다. 누군가 귀에 속삭인다. '일어나세요 용사여. 당신이 쓸 돈을 벌어오세요.' 머리를 한 번 흔들고는 내려간다. 일상을 지키기 위해 하는 행동, 물건의 위치를 정해놓은 탓인지 잠들 때와 비슷한 감정이 스민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날이 된다. 오늘 위에 어제가 덮어 씌워진다.
아래층과 이별하고 잠자리로 오른다. 오늘은 잠들기 전에 하루를 복기한다. 같은 날이 반복된다. 즐거울 일은 거의 없고, 희미하게 화날 일이 가끔 있고, 넷플릭스를 보며 잠시 슬퍼하고, 군것질을 하며 즐거워하는 하루다. 월요일은 복사해 수요일쯤에 붙여놓아도 이질감 없는 하루가 반복된다. 인간은 간사하다. 지루한 하루의 평온은 잊고, 새로운 일이 벌어지길 바란다. 막상 삶을 뒤 흔드는 일이 벌어지면 깜짝 놀라며 다시 편한 날을 돌려달라고 기도한다. 복기에서 시작한 생각을 공상으로 가다 멈췄다. 별일 없는 하루에 감사하고 눈을 감는다.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정말 지루한 하루는 아무 일도 없는 날일까? 아니다. 전혀 아니다. 직장을 다닌다면 경력이 모이고 있고, 경험이 퇴적되는 시간이 된다.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면, 포트폴리오가 단단해지고 실력이 자라나는 시간이 된다. 어떤 일을 하고 있든 우리는 경험이라는 시간을 먹고 자라는 녀석이 커가고 있다. 물론, 내가 만든 경력이, 포트폴리오가 경험이 항상 성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승리라를 아름다운 결말에 도달하는 것도 아니다. 시대를 잘 활용하는 이들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다만, 하나 확실한 건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 시기를 기다리며 우리는 지루해 보이는 하루는 살아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 보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은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 후회라는 감정이 밀려온다면, 생각해봐야 한다. 후회란 시도한 이들에게 주어진 호사스러운 일이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우린 감정마저 흘려보낸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시간일 뿐일 테다. 반복되는 하루를 견디는 방법은 없을까? 크게 두 가지가 떠오른다. 첫 번째는 자발적으로 선택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무슨 소리인가 싶다. 생각을 바꾸는 일은 어떤 일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아니, 하나마하 하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을 바꾸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할 수 있다. “나는 가진 게 없습니다.” 싯다르타가 말했다. “당신의 말이 그런 뜻이라면 말입니다. 나는 분명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택한 것이니, 궁핍하다고는 할 수 없지요.”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문학동네, page 81)라는 말처럼 오늘 하루를 내가 그렇게 살기로 했다는 결심이 생각 변화의 시작이 된다. 생각을 바꾸는 일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두 번째는 안전하고 새로운 경험을 첨가해 보는 일이다. 방법이 있을까? 실제로 행동으로 할 수 있지만, 무척 쉬운 방법이 있다.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일이다. 책은 단박에 새로운 경험으로 안내하는 방법이다. 안다. 간접으로 경험은 한계가 있고, 책을 통해 우리가 배우는 일로는 도저히 알려 줄 수 없는 일들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 지루한 하루를 버티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상상 때문이다. 뇌는 어리석어 상상과 실제 체험을 혼동한다.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 이유다. 이를 통해 우린 작지만 배울 수 있다. 배움은 또 다른 경험으로 이어진다. 또 다른 방법인 글쓰기다. 새로운 시선을 준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일들에 우린 자동 반응을 한다. 같은 일이고 반복되는 일에 에너지를 줄이기 위해 우리 뇌와 몸은 반사적으로 일을 하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다른 시각이 필요한데, 바로 글쓰기가 방법이다. 매일 같지만, 사실 따져보면 그렇지 않다. 오늘 날씨는 어제와 미세하게 다르고, 오늘 만난 동료들은 어제와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귀를 기울이고, 글을 쓰기 위한 글감을 수집하다 보면 다른 하루를 알게 된다. 결정적으로 그 일들을 받아들이는 내가 어제와 같지 않다. 작은 변화를 섬세하게 따지게 하는 일이 바로 글쓰기가 된다. 정리하면, 생각을 바꾸고 책을 읽으며 글을 쓰는 일이 비슷해 보이는 하루 다르게 보는 방법이 된다. 그럼 견딜 수 있다.
"기다려라. 인내심은 고귀한 자의 징표다. 절대 서두르지 마라." (『아주 세속적인 지혜』, 발타자르 그리시 안 지음, 강정선 번역, page 76)라는 말이 있다. 지루한 날들을 버티면 일은 일어난다. 좋은 일이라면 두 손 두 발 들고 환영하고 그 순간을 귀하게 여지면 보내야 한다. 반대라면 지루한 날들을 버티며 생긴 힘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무리 긴 장마도 1년 동안 내릴 수 없고, 작열하는 태양도 하루 종일 나를 비출 수는 없다. 따분한 날들을 소중하게 여기며 오늘을 산다. 무료한 날들도 내가 성취한 소중한 날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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