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의 시작
연구의 시작은 무엇일까? 번뜩이는 아이디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추진력? 현란하고 안정적인 실험? 아니다. 일단 환경공학에서는 아니다. 연구의 시작은 과거 연구를 읽어내는 것이다. 읽다 보면 그제야 내 연구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실마리는 보통 두 개로 나타난다.
거대한 연구 흐름 중에 빠져있는 것.
서로 다른 아이디어가 합쳐져 새롭게 보이는 것.
특히 비어 있는 부분을 찾아내는 일에는 많은 논문을 읽고, 거대한 표를 만드는 것이 효과적이다. 효과적이라고 했지 효율적이라고 말은 못 하겠다. 간단히 말하자면 '논문을 읽고 표로 정리하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럼 바로 뒤이어 두 개의 질문이 나온다.
어떤 논문을 읽어야 하나요?
얼마나 읽어야 하나요?
전문가처럼 답변하자면 이렇다.
"분야 그리고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르니 꼭 집어 말하긴 어렵습니다."
잘 모르겠다는 말을 길게 해 봤다. 그래도 내 경험과 내 분야를 중심으로 말해보겠다.
어떤 논문을 읽어야 하나요?
좋은 선배, 교수님이 친절히 알려주실 수도 있다. 또 한 분야를 오랜 기간 연구한 연구실이라면 '성경' 같이 모셔지는 논문의 목록이 있을 수도 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축복이라 생각하고 선배들이 닦아 놓은 길을 따라가면 된다. 그 길을 걷다 보면 보는 눈도 찾는 기술도 늘어나 나만의 길을 만들 수 있게 된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다거나, 사수가 없다거나 하는 이유로 말이다. 내가 있던 연구실이 그랬다. 사수는 없었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나가기 일수였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논문을 아래 5 단계를 거쳐 찾고 읽어냈다.
2. 한글 keyword를 검색해본다. 그리고 내가 연구하는 분야에서의 정확한 영어 용어를 찾아본다.
3. 찾아낸 keyword에 "review" 또는 "overview"를 입력해 논문을 찾는다.
ex) 검색어 입력 방법: 찾은 키워드 review 또는 찾은 키워드 overview
4. Review, overview 논문에서 인용한 참고문헌을 찾는다.
5. '4'에서 찾은 논문이 인용한 논문을 다시 찾아 읽는다.
논문을 3~5번을 반복해서 차곡차곡 찾아가며 읽어내는 게 내 방법이다.
2번의 한글 keyword의 정확한 영어 용어를 찾는 단계는 꼭 필요하다. 우리가 쓰던 영어와 연구분야, 전문분야에서 쓰는 용어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해당 단계를 통해서 정확한 용어와 keyword를 찾아내야 한다.
다음으로 3번의 review와 overview 논문을 찾는 이유다. 해당 논문을 작성하신 분들은 일반적으로 이른바 '권위자'이기 때문이다. 저널*에 따라 다르나 review, overview 논문은 해당 저널 편집위원회에서 '권위자'에게 요청해서 작성된다. 요청받는 분들은 한 분야를 오랜 기간 파고들고 이정표가 될 만한 연구를 하신 분이다. 그러니 연구 초보자인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내공이 있으시다. 그런 분에게 '간택' 당한 논문은 우리가 읽을 가치가 있다.
또 Review, overview 논문의 목적은 지금까지의 한 분야를 조감한다. 과거에서 지금까지의 연구는 물론이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까지 제시하기도 한다. 그 분야에 처음 들어선 우리는 권위자가 안내하는 길부터 가는 게 좋다.
*저널: 특정 주제나 전문분야를 다루는 잡지, 학술지 등을 가리키는 용어.
얼마나 읽어야 하나요?
이게 어렵다. 나는 많이 읽는 편이라 생각하는데, 논문을 쓸 때 참고문헌을 참 많이 인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저널에 따라 참고문헌을 제한하는 경우에는 최대치를 인용하고, 제한이 없는 경우에는 80~100편의 논문을 인용했었다. 내 기준으로 볼 때 논문 80편 정도다. 그 정도를 읽고 거대한 표로 정리를 하니 연구 분야가 보이고 이른바 비어 있는 부분이 보였다. 더하여, 지도교수님과의 미팅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
실전사례
내 사례를 말해보려 한다.
우선 비어 있는 부분은 무엇일까? 논문을 읽거나, 쓰거나 실험을 하다 보면 "아, 누가 이거 해놨으면 좋겠는데"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 지점이 바로 빈 부분이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누구나 한다. 하지만, 다양한 이유로 그 부분을 채우지 못하고 생각만 하며 지나간 경우가 많다.
미세조류-이른바 우리가 뉴스에서 볼 수 있는 녹조와 적조로 생각하면 되겠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름처럼 작은 것들을 말한다- 연구에서 경험한 사례다.
미세조류를 이용해서 돼지분뇨를 처리하는 연구였다. 처리가 잘 안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암모니아성 질소였다(홍어에서 나는 강한 맛과 향의 범인이고 더러운 화장실의 냄새의 용의자인 녀석이다). 암모니아가 높은 농도로 있으면 미세조류는 물론 일반적인 미생물들은 활동을 하기 어렵다. 암모니아가 '독성'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 독성을 미세조류가 활동하기 적합할 정도로 희석을 통해 낮춰 처리하는 게 전략이다. 하지만 많은 희석은 또 따른 폐수가 나오게 되니, 적정선을 찾는 게 중요했다.
이때 빈 틈이 보였다. 아무도 비슷한 조건에서의 논문을 정리해 암모니아 농도에 따라 미세조류의 활성도에 관한 연구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했다. 암모니아 농도에 따른 미세조류의 활성을 30편의 논문을 분석해 그래프로 그려 그 경향을 나타냈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범위를 설정하고 실험을 했고, 논문을 작성했다. 나만 그 부분이 필요했던 모양은 아니었다 보다. 인용이 참 많이 되었다.
연구의 시작은 논문 읽기다. 권위자가 쓴 논문인 review, overview 논문을 읽고 빈틈을 찾아내는 것이 논문 읽기의 목적이 된다. 지루한 논문을 읽어야 그 틈이 보인다. 논문을 찾는 것만큼 중요한 건 정리다. 다음 글에서 내가 거대한 표로 정리하는 노하우를 적어보려 한다.
연구를 한다는 건 지루한 일이다. 다만 빈틈을 찾은 순간, 그리고 채우는 순간에 재미있다. 연구를 시작하기 위해 논문을 찾는 모든 분들에게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