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tarry Garden Jan 09. 2023

할머니가 떠나고도 슬프지 않았던 이유.

할머니의 배려

할머니와의 기억 조각


할머니가 떠나신 지 16년이 넘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무척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할머니 댁과 가까웠고, 막내아들인 아버지 덕에 자주 갔기 때문이리라. 갈 때마다 할머니는 먹을거리 준비하셨다. 어느 날은 두부, 어느 날은 사탕, 어느 날은 떡을 준비해 두신다. 당신의 마음 크기만큼 음식이 많다.


곰곰 할머니 추억을 되짚어가다 떠오르는 생각 하나가 있다. 할머니 댁에 도착하면 안방으로 간다. 텔레비전이 안방에 있기 때문이다. 시골이니 할 일이 무엇이 있으랴. 또래도 없는 그곳에서 텔레비전이 유일한 낙이다. 큰 브라운관, 우측 상단에는 돌리며 채널과 소리를 조정하는 레버가 있다. 탁탁 거리며 이리저리 돌리는 맛이 있다.


할머니와 반가움을 잠깐 나누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낮이었지만, 어두컴컴했다. 두꺼운 담요로 창문이 가려져 있다. 쿰쿰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어둠을 밀어내기 위해 버튼을 눌렀다. 딸깍! 눈앞에는 진한 갈색 덩어리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메주. 어둠 속에 곱게 자리를 잡은 녀석은 바로 메주.


진한 냄새를 피해 거실에 자리를 잡았다. 할머니가 들어가 텔레비전을 보라고 한다. 메주 때문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짜증이 섞인 말을 던졌다. 할머니는 고개를 갸웃하신다. 그럼 우선 이거부터 먹고 있으라며 떡을 주신다. 문을 열고 나가신다. 비스듬히 누어 떡을 먹고 있었다. 할머니는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오셨다. 손에는 노란색 물건이 들려있다.


비스듬히 누워있는 내 곁에 두시고는, 심심하지 않을 거라며 웃으셨다. 라디오였다.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냈다. 기억 저편에 있던 추억이 하나둘씩 떠오른다. 나도 할머니를 무척 좋아했다. 물론 표현은 잘하지 않았지만, 서로는 알고 있었다. 서로의 사랑을.


할머니가 떠나시고도 슬프지 않았던 이유.


할머니는 갑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났다. 대학 중간고사 직전에 소식을 들었다. 놀랐지만, 슬프지 않았다. 할머니의 상실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장례식장이 차려져 있었다. 건조한 병원 장례식장. 병원 특유의 냄새. 소독약 냄새가 난다. 들어선 그곳에는 오랜만에 본 친척들이 가득하다.


옷을 갈아입고, 팔에는 아무런 줄이 없는 완장을 찼다. 밤을 새웠다. 시골에서 오시는 분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삼일이 지났다. 어머니는 할머니 마지막 모습을 볼 것이냐는 질문에 나는 거절했다. 믿고 싶지 않는지, 그 당시가 무서웠는지 모르겠다.


받은 사랑이 무색하게,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눈물을 펑펑 흘리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보며, 죄책감까지 들었다. 지금까지 가끔 할머니 생각을 해도 슬프기보다는 아련한 느낌이다. 지금도 글을 쓰며 할머니를 생각하지만, 슬프지 않다. 다만, 어디에선가 나를 지켜보고,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듯하다.


곰곰 생각을 하다 닿은 단어가 있다.


"할머니의 배려"


할머니의 배려


할머니는 돌아가신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를 배려하신 모양이다. 사랑하신 만큼 말이다. 할머니 자신이 없는 곳에서 슬퍼할 손자를 보기 어려우셨으리라. 또, 나에게 슬픈 기억으로 남는 것이 싫었을 수도 있으리라. 그래서 할머니는 산뜻하게 나를 떠나시며, 배려를 하신 것 같다.


나 없는 세상에서 홀로 슬퍼하지 말라고. 사랑스러운 손자에게 마지막 선물처럼, 마치 없었던 것처럼, 슬픔을 남기지 않고 떠나신 것이리라. 마음에 생채기 하나 남지기 않고 말이다.


지금도 할머니를 생각하면 좋은 기억, 따뜻한 촉감, 즐거운 소리만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슬픈 기억이 내 추억에 들어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살아계셨을 때 보다 더 큰 사랑을 지금 나에게 전해주셨다는 생각이 커진다. 할머니의 배려.


할머니의 따뜻한 기운이 감싸는 듯하다. 할머니가 보고 싶다.


할머니가 계시는 그곳이 궁금하다. 그곳에서도 배려하시는 할머니가 보고 싶다. 



한 줄 요약: 할머니는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사랑하신다.



P.S.

할머니가 보시고는 화를 내실 수 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합리화를 했다며 말이죠. 혹시나 그러한 마음이시라면, 제 꿈에 나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오시지 않았거든요. 제가 편지도 보냈는데 말이죠.



사진: 할머니 산소에 가는 길.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멈춰 세우는 신호등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