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가 아직 국민학교라고 불릴 때 학교를 다녔다. 언덕에 있던 집에서 학교까지는 잰걸음으로는 15분, 느긋하게 간다면 20분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학교를 혼자 가는 일이 없었다. 8시 20분 정도에 학교를 향해 내려가면 친구들이 하나씩 붙어 대열을 이룬다. 학교에 도착해 각자의 반으로 흩어지기 전까지 재잘거리며 그 짧은 시간, 무슨 이야기를 했나 모르겠다.
수업 시작 전 교실은 어수선하다. 후다닥 내 책상을 찾아 앉고 오늘 시간표 따른 교과서를 가져왔는지 다시 확인하곤 친구들과 다시 이야기를 재잘거린다. 어제도, 그제도 몇 시간 이야기했지만, 그래도 참 재미있었다. 한 반에는 60~70명 남짓, 김해시에서 큰 학교라 몇 반인지 "하나 둘 셋.." 세다가 세기를 그만 둘 정도로 많았다. 그렇게 출석부를 든 담임선생님이 등장해서야 그 재잘거림이 사그라든다.
내가 가장 재미있던 수업은 체육. 건장한 체격을 가지신 아버지와 재빠른 몸놀림을 보이셨던 어머니의 유전자 덕분인지 운동에 재능이 있었다. 육상부에서는 초등학교 연합 대회가 있다면 나가길 권했고, 경쟁 학교와의 배구 결전에는 언제나 주전이었다. 배구를 했던 기억이 오래 남았는데, 마치 스포츠 성장 드라마이다.
내 운동의 시작은 육상부이다. 육상부라고 해서 국민학교 시절 체계적이진 않았던 모양이다. 마라톤 선수로 뽑힌 나는 100 m 선수로 출전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신발이 달라지거나, 훈련방법이 달라지진 않았다. 그저 출발점과 도착점이 약간 달리지는 차이 정도? 결과는 당당히 일등. 일약 스타까지는 아니더라도 학교에서 운영하던 운동부 선생님들 귀에 이름 석자가 남았고, 친구들에게는 며칠간 이야기가 회자되는 정도였다.
운동부 선생님들 귀에 남았던 내 이름 석자가 위력을 발휘했다. 배구부 담당 선생님이 다급히 육상부에 오더니 육상부 선생님과 몇 마디 나누곤 나를 배구부로 데려가셨다(스카우트(?)해 간 것인지, 빌려(?) 간 것인지 모르지만) 내 소속은 하루아침에 배구부로 바뀌었다.
당시 우리 학교과 옆 학교는 모든 면에서 경쟁 상대였고, 지금의 한·일 전을 방불케 했다. 지나가다 우연히 보기라도 하면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학교만을 보고 으르렁 거릴 정도였으니, 경기를 했다 하면 전쟁이었다. 그런 전장이 하나 늘었다. 바로 배구. 그러니 위기의 배구부(?)를 구할 사람을 모집하던 선생님이 나를 뽑아 가셨나 보다. 달리기만 하던 나는 배구의 '배'자도 알지 못하고 배구부 훈련장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구성된 배구부는 마치 외인부대 같았다. 각 부에서 운동 실력이 좋던 아이들이 모여 있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담당 선생님은 더 높은 곳에서 지령을 받았던 모양이다. 대학을 막 졸업하고 발령받은 분이라는 것과 다급함이 혼합되니 강한 위기감으로 선생님을 내몰았다. 선생님의 위기는 위기고 배구부원들은 재잘거리는 친구들이 늘어난 것에 즐거웠고, 수업을 약간 등한시하더라도 용인되는 분위기가 좋았다. 사실, 그 위기는 그저 선생님 몫이었다. 3개월 남짓, 위기의 선생님(?)의 열정으로 우린 배구를 배워갔다.
체계가 잡혀여서 돌아간다기 보단 일단 하고 보는 배구라 정확이 어떤 포지션이었는지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레프트 윙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가장 자신 있었던 건 서브! 모두들 내가 들고 있던 공만 보던 그 순간, 호쾌하게 때린 공이 날아가면서 내 마음도 뻥 뚫렸다. 호쾌한 만큼 서브 에이스도 나니, 선생님과 친구들의 칭찬을 한 번에 받았다. 그런 배구가 참 재미있었다.
친구들의 기량도 한층 성장했음은 물론이고, 더 끈끈해졌다. 다들 생활 수준이 비슷했던 우리는 모든 걸 나눴다. 선생님의 자비인지, 학교의 지원인지 알 수 없지만, 먹을거리가 조금이라도 생기면 우린 모여 재잘거림을 다시 시작하며 먹고, 다시 훈련을 하길 반복하니 팀워크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를 내어 놓고 위로 하며 우린 하나가 되어갔다. 고리타분하기까지 한 스포츠 성장 드라마 같지 않은가? 하지만, 우린 한 편의 드라마를 찍고 있었다.
모든 성장 드라마가 그렇듯, 이 외인부대 같은 배구부는 당당히 경쟁 학교와의 대결에서 이겼다. 이야기가 싱겁지 않은가? 사실 어디서 어떤 경기를 했는지 기억나 지 않았다. 기억의 방을 오랜 기간 탐험했지만, 그 과정의 기억만이 남아 있었다. 과정의 추억만 남아있지, 결과의 추억은 없어진 듯했다.
다만 기억에 남는 건, 승리 후 나는 배구부에 더 이상 있지 못했다. '돈'이 문제였다. 높은 곳에서의 명령과 관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던 것 같다. 한 번의 승리 후 거둬진 관심은 곧 지원 삭감으로 이어졌고 부원들에게는 청구서가 날아들었다. 청구서를 들고는 집으로 가지 못했다. 한 달 간은 선생님의 배려와 허드렛일을 하는 것으로 버텼지만, 더 이상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슬픈 스포츠 성장 드라마는 끝났다. 그렇게 1974년이 끝났다.
그녀는 도쿄 올림픽에서 여자 배구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시고 보셨다. 마지막 경기에서는 약간의 눈물까지. 이제 알게 되었다. 왜 그녀가 열성적으로, 그리고 눈물을 지어가며 배구를 보셨는지. 그녀는 배구인이었다. 우리가 도쿄 올림픽에서의 배구를 결과보단 과정을 보며 큰 응원을 보냈듯, 그녀의 이야기의 마지막도 이와 비슷하다 느껴졌다. 결과보단 과정이 더 오랜 시간 기억에 남는 걸 보면.
시간이 꽤 흐른 후 모든 기억이 그러게 남지 않을까 싶다. '결과보단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꽤나 진부한 이야기이지만, 시간이라는 풍화 작용을 거쳐 기억의 덩어리가 여기저기 깎기고 나도 남은 건 결국 결과보단 과정이다.
아들로서는 마지막 문단의 이야기를 들으며, 안타까웠다. 그런 경험이 그녀의 자녀인 우리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용인하신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대의 부모님의 국민학교 시절 가장 기억에 남은 일은 무엇인지 물어보자. 그럼 멋진 성장 드라마가 한편 재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