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아버지는 장사꾼
<우리들의 블루스>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는 한동안 우리 집 TV를 점령했다.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주연급으로 가족 모두가 드라마를 꼼꼼히 챙겨봤다. <우리들의 블루스>로 이야기를 시작 한건 '만물 트럭상' 때문이다. 이병헌 배우가 연기한 이동석은 만물 트럭상이다. 1톤 트럭에 온갖 물건을 넣고는 시골 마을 구석구석을 다닌다. 마을마다 주문을 받아 물건을 가져오는 건 당연하고 마을 어르신들의 집을 고쳐주기도 한다. 그녀의 할머니가 하셨던 일이 바로 동석이가 하던 만물 트럭상 도보 버젼인 '만물 도보상'이었다.
1970년에 도로는 열악했고, 자동차 보급률은 그리 높지 못했다. 차보단 자전거가, 경운기보다는 달구지가 더 친숙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시골에는 큰마음을 먹지 않으면 시장에 나오긴 어려웠나 보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장사를 하셨다. 시장에서 공산품들을 잔뜩 사들곤 자그마한 시골마을을 돌아다니시며 장사를 하셨다. 때때로 마을에서 요청한 물건을 주문받아 3~4일 정도 후에 배달하는 형식이었다.
지고 간 물건을 다 팔지 못하면 팔 때까지 마을에 머물거나 빈손이 될 때까지 마을을 돌아다니셨다. 그래서인지 일주일에 2~3일 정도 집을 비우는 일이 일상이였다. 억척같이 일하신 건 아마 혼자 건사해야 할 자식이 다섯이나 되었기 때문이리라. 혼자 고군분투하는 걸 본 장남은 어땠을까? 얼른 어른이 되어 일을 하고 싶으셨나 보다.
흐릿한 기억 속 아버지
아버지의 20대~30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조금 있는 것 마져 흐릿한 기억이 전부인다. 내가 태어나기 전 이라 어머니를 통해 들었던 이야기와 지금은 없어진 사진 몇개 뿐이다. 흐릿한 사진 속 아버지는 군복을 입으시곤 어머니와 사진을 찍으셨으니 아버지는 군 생활을 하셨다고 짐작이 될 뿐이다. 또 꽤 오랜 시간 군 생활을 하시다가 장남이라는 이유와 동생이 입대했다는 이유로 제대를 하셨다는고 추정된다. 그렇게 제대한 나이가 30대 초반. 큰 오빠가 태어났을 때는 가족 곁에 있었기에 아마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수산시장으로 나가신 1970년까지는 대나무로 만든 물건 이것저것 팔고, 할머니를 따라다니던 도보 만물상을 하셨다.
수산시장의 아버지
깨끗한 기억의 시작은 1970년이었다. 내 나이가 8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수산시장으로 출근하셨다. 야간 통행금지* 시간인 오후 10시가 되기 전 얼큰하게 취하신 아버지는 비릿한 냄새와 함께 돌아오셨다. 항상 손에는 무언가 들려있었는데, 생선이기도 하고, 과자이기도 했다. 덤덤히 그 봉지를 두곤 내일을 준비하셨다. 담담히 들고 오던 그 봉지에 사랑을 담으셨나 보다, 지금까지 생각이 나는걸 보면.
1970년 아버지 나이 37살에 시작한 일은 수산시장 도매업이었다.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도매업을 크게 하시던 분의 직원으로 취직하셨다. 일의 시작은 누구나 그렇듯 허드렛일이였다. 사장을 따라 경매장에 같이 가거나, 경매 받은 물건을 나르기도하고, 사장이 운영하는 직영점을 청소하곤 했다. 그러한 세월이 쌓여 4년이 막 지난 시점에 아버지는 관리자로 자리를 옮기셨는데, 일은 크게 두 개로 나눠졌다. 사장이 경매로 받아온 수산물을 시장에 있는 몇 개의 점포로 분배하는 일이 하나고, 사장이 직접 운영하는 가게를 관리하는 게 두 번째였다. 믿을 만한 직원이였다 보다. 사장님은 경매 일 외에는 다른 일에 관여하길 그만 두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손재주를 닮았고 할머니의 부지런함을 받았으니, 어디에서도 주목받았으리라. 경력이 꽤 있던 분들을 모두 제치고 그 자리에 가셨으니 참 고된 삶은 사셨으리라는 짐작만 할 뿐이다.
힘든 하루를 잊기 위해서 얼큰하게 취하신 건지, 아니면 관리자로 처세를 위해서 취하신 건지 알 길이 없지만, 취해오시던 아버지는 그렇게 열심히 삶을 살아 내고 계셨다.
*야간 통행금지: 밤 시간에 일반인의 통행을 금지한 제도. 시행기간: 1945.09~1982.01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늦은 시간 퇴근하신 아버지는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 되길 기다렸다 부리나케 출근하셨다. 그렇게 벗어놓고 가신 옷의 빨래는 언제나 내 몫이었다. 어머니는 품팔이를 하기 위해 여기저기로 나가셨고, 큰 오빠는 정비 기술을 배운다며 부산 충무동으로 나갔며, 언니는 방직공장으로 갔다. 둘째 오빠는 사상공단의 국제상사가 운영하던 신발공장에 갔기에 집안 살림과 동생을 돌보는 일은 내 일이었다.
아버지 옷에 남아 있던 비릿한 냄새는 나에게도 남았나 보다. 친구들이 비린내의 범인을 색출할 때마다 나는 그저 조용히 있으며, 체육시간이 오길 기다렸다. 운동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재잘거리기를 하지만, 매번 비린내 범인 검거에는 모든 걸 포기하고 체포되는 범인 마냥 순순히 응했다. 그렇게 잡히는 날에는 아이들은 내게 "너희 아버지 뭐하시노? 비린내 난다."라며 깔깔 웃으며 놀렸다.
이제 막 분별할 아이가 무엇을 알았겠냐만은 반항을 한번 하지 않은 건 왜일까? 반항하여 사고라도 치는 날에는 아버지에게 누가 될까 걱정을 한 것일까? 아니면, '너희들은 비린내 나는 아버지로 놀릴 수 있지만, 나에게는 하나뿐인 아버지야', '그래도 비린내 나는 건 미안한 마음이다! 너희의 코를 불편한 대가로 순순히 반항하지 않고 그저 있어 줄게'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어떤 생각이었든 간에 나는 아버지를 사랑했고, 존경했으며, 한 번도 부끄러운 적이 없던 건 확실했다.
부모님은 자식을 위해 어떤 일이든 한다. 그 조그마한 눈을 맞추고, 오물거리는 입을 보기 위해서 밖에선 고된 일을 피하지 않는다. 할머니도, 아버지도 그렇게 고된 삶을 살아 내신 것이다. 그렇게 성장하는 아이들이 모든 피로를 날려 버렸으리라. 그리고 무뚝뚝하던 이 세상 모든 아버지가 그렇듯 얼큰하게 취해서야만 봉지에 사랑을 담아 올 수 있었을리라.
그 사랑을 알기에 그녀는 놀리던 아이들이 있음에도 비린내 나는 아버지의 흔적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나 보다. 우리의 부모님은 어떻게 먹고 사셨을까?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떤 일을 하셨을까? 그 시설 그 고된 일을 기꺼이 하신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질문을 해보자.
1. 부모님의 직업은 무엇이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