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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의 이상향, 제주.

쿠폰 해도 문제, 안 해도 문제

by Starry Garden
쿠폰 해도 문제, 안 해도 문제


계산대에 쿠폰함이 놓여있다. 약간의 곡절이 있는 쿠폰함인데, 보성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친구가 선물해줬다. 처음에 쓴 건 '명함함'이었다. 회색과 흰색으로 구성되어 있고 투명한 플라스틱이 뚜껑으로 달려있는 것으로 전형적인 사무실에 참 잘 어울리는데, 회사에서 쓰던 게 생각나 썼다. 개업을 축하한다는 친구는 그걸 보자마자 "야~, 적당히 해라. 여기가 회사냐?"라며 비아냥 거렸다. 비아냥 거리기만 했다면 '괘씸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네 카페에 가서 요목조목 지적해주마.'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택배가 하나 왔다. 고풍스러운 밝은 빛의 나무색으로 되어 있으며, 둘레는 태운듯한 진한 갈색이 두르고 있다. 그리고 'ㄱ'에서부터 'ㅎ'까지 칸이 나눠져 이름에 따라 쿠폰을 정리하기 편하게 되어 있었다.


택배를 받고 얼마 안 가 전화를 주는 친구에게 감사를 표했다. 카페에 가서 굳이 지적하지 않겠다는 선한 마음으로 고쳐먹었다.


쿠폰은 흰색 바탕에 위줄에는 '책', '다', '섯', '권' '-3,000원' 아래에는 '책', '열', '권', '에', '-4,000원'이라고 적혀있고 한 권을 살떄마다 Starry Garden 마크가 있는 도장을 찍어 준다.


처음에는 쿠폰을 해야 하나 하며 주저했다. '누가 그렇게 꾸준히 여기서 책을 사 갈까?'라는 의문과 쿠폰도 만들고 도장도 만들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간사한 게, 다들 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참 불안하다. 내 주저함은 한 달을 채 못가 쿠폰을 만들어 놓기에 이른 것이다.


쿠폰의 첫 줄의 '책 다 섯'을 넘어가는 고객은 2분('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대 같은 분들이 빈약한 독립서점을 살립니다. '명'이라고 쓰지 않고 '분'이라고 씁니다). '책 다'까지 찍힌 쿠폰은 꽤 많다. 그중에 절반은 고마운 친구들이다. 마지막으로 '책'만 찍고는 더 이상 오시지 않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쿠폰함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나를 덮치는 생각이 바로 내가 잘하고 있나?라는 불안이다. 하나만 찍고 안 오시는 분들은 왜 안 오실까? 내가 무슨 문제가 있었나? 아니면 책이 마음이 들지 않나? 라며 온갖 생각이 덩치를 키워 덮쳐 버린다.


덩치가 큰 녀석을 떨쳐내려고 노란색의 OXFORD 노트를 펼쳐 오늘의 공상을 적어 낸다. 한 30분 적었을까? 힘주어 무언가를 생산했다는 마음에 뿌듯함이 불안이라는 녀석을 내려놓게 했다. 이번에는 고쳐볼까 하며 빨간펜을 들자 딸랑거리며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어서 오세요."라고 문을 바라봤더니 낯이 익은 손님 한 분이 들어오셨다. 고개를 까딱하시며 책장으로 가다간다. 시간은 오후 7시가 막 넘어가고 있었다. 손님에게 인사라는 의무를 다하곤 쓴 글을 고쳐갔다. 그러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이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들고 있던 책은 <78억 인구 중 나 하나 지질해도 괜찮아>. 책을 받아 들곤 "13,200원입니다." 카드를 받아 계산하며, "쿠폰 찍어 드릴까요?"라고 말하곤 쿠폰함을 보니 벌써 그녀는 자신의 쿠폰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쿠폰에는 '책'에만 도장이 찍여 있었고 이름은 '강지영'이라 적혀있다. 받아서 찍고 있으니 그녀가 한마디 한다.


"이 쿠폰 참 쓸모없어요.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마음속으로 난 '네 사실 저도 동의합니다.'

"한국인 일 년 독서량이 한 권이라는데, 한번 할인받으려면 다섯 배는 읽어야 하는거잖아요?"

"그렇지요?"라고 답하곤 갈색 봉투를 꺼내 책을 쓱 넣고는 스티커를 하나 꺼내 봉했다. 보통 이쯤에서 말을 멈추리라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빗나갔다. 말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는 듯했다.


"그리고 이 종이, 그리고 이 쿠폰함! 모두 환경문제를 일으키는 주범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쓸데없이 종이랑 나무를 소비하는 일이니까요. 그렇죠?"

"그런 면도 있네요"라고 답하며 책을 건넸다. '아 이거 된통 걸린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이라면 쿠폰을 찍으면 안 되지. 그리고 책을 담는 봉투도 거절해야지'라는 생각이 스칠 때쯤.

그녀가 한마디 했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흠칫 놀라면 인정하는 꼴이라는 생각이 스치기도 전에 내 눈동자는 커졌나 보다. 말 그대로 간파당했다.

"아뇨, 아뇨. 각자만의 생각이 있는 것이니까요."라고 얼버무렸다.


"죄송해요. 제가 오늘 하루 종일 동료들, 상사들 말을 듣기만 하고 말을 거의 못 했거든요. 저는 하루에 할 말의 양이 정해져 있는 것 같아요. 그 말을 채우지 못하면 우울해져서.. 그만.."


아까의 기상은 어디 가고 그녀는 처분을 기다리는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나를 쳐다봤다. 나는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괜찮다고 다독여 그녀를 보냈다.


직장인의 이상향, 제주


그녀가 높여 놓은 텐션은 쉬이 내려가지 않았다. 쓰던 글을 보긴 포기하고 어제 제주에 관한 책을 사간 분 이름이 뭘까라는 궁금함에 쿠폰함을 뒤적거렸다. '책 다 섯'을 찾으니 '서강훈'이라는 이름이 적혀있다.


책을 주저 없이 추천해 줄 수 있었던 건, 나도 제주라는 이상향으로 도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였다. 제주로 가야겠다는 결심은 <서른, 두 살에 안식년을 가져보았다>였고, 제주의 내용을 채운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였으며, 제주의 여행 태도를 결정한 게 <어쩌다, 제주>였다.


마침내 나이는 서른두 살('만'으로 하고 미국나이라는 갖가지 궤변을 해서 2년간 정지된 나이이지만.)에 회사에서 치이며 살았다. 그러다 조그마한 카페와 독립서점을 겸하는 곳에서 만난 책이다. 회사에서는 숫자로 성과를 끊임없이 비교하고 거기에 맞게 승진시키고 탈락시키는 혹독한 시스템에 있었다. 동료와 편하게 한 이야기는 내게 소문으로 포장된 약점으로 돌아오기도 하니, 사람마져 믿을 수 없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시간은 늘 부족했다. '저녁 있는 삶'은 다른 나라 이야기 같았고, 좋아하던 책도 몇 달째 책상에 놓여만 있으니 우울해졌다.


운이 좋게(?) 토요일 하루를 쉬게 되었고, 그때 들렀던 곳에서 본 책이 운명처럼 가다 왔다. 서른두 살, 그리고 안식년. 내게도 안식년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경쟁에서 벗어나 제주에서 산다. 돌아갈 기약이 없이 말이다. 그렇게 게스트하우스에서 직원으로 일하며 느긋한 삶을 산다. 대략 반년을 제주에서 살던 저자는 다시 경쟁 속으로 들어간다. 아무런 문제 없이 말이다.


그때 나는 떠나고 싶었다. 집에 가서도 집을 가고 싶었고, 목적지도 없이 지금 있는 곳에서 마냥 떠나고 싶다는 마음만 풍선처럼 커져갔다. 떠나도 될까? 경쟁에서 탈락한 패배자가 되는 건 아닐까라는 걱정과 불안도 함께 커져가던 중 만난 책이 <서른두 살에 안식년을 가져보았다>였다. 그러니 제주로 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한 책이 되었다.


책에 대한 지적 허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응당 전집을 가지고 있어야 허영이 완전히 채워진다. 하지만, 그렇게 산 책 중에 다 읽은 책은 손에 꼽는다. 그래서 바꾼 전략이 전집이라 하더라도 한 권씩만 사자라는 결심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책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다.


제주를 가겠다는 결심 뒤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주 편은 꼭 가서 봐야 할 의미 있는 곳이 많다는 생각에 더 설레게 했다. 그중 '와흘당 소지' 소지 이야기가 참 기억에 남았는데, 당나무에 자신의 고민 소원을 빌고 종이에 적은 뒤 나무에 매듭을 지어 놓으면, 신께서 오셔서 읽고 들어주신다고 한다. 하지만, 글을 쓰지 못하는 분들은 어찌하나?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남에게 부탁하기 어려우니 만들어낸 특별한 방법이 있다. 원하는 소원과 고민을 생각하며 가슴에 빈 종이를 꼭 안고 있으면 적은 것과 같은 효과가 난다는 이야기다. 제주를 가게 되면 나도 꼭 내 고민을 생각하며 종이를 매어 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갈 제주의 내용이 채워지는 책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어쩌다, 제주>는 빠른 제주 여행이 아니라 느린 제주 여행을 보여주는 책이었다. 우린 제주에 내리면 여지없이 렌터카를 빌린다. 비싸더라도 제주까지 와서 출퇴근의 기분을 느끼기가 싫은 것도 있고, 빠른 기동력으로 다양한 장소를 찍어가겠다는 의도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천천한 제주 여행을 한다. 그 태도가 참 마음에 들었다. 이번에 제주로 간다면, 바쁜 여기를 떠난 의미와 일치하는 느린 여행을 하겠다는 태도를 결정하게 했다.


그렇게 세 권의 책이 제주를 나의 이상향으로 만들었다. 직장인들은 모두들 그렇지 않을까? 복작거리고, 경쟁하며 빠르게 다녀야만 살아남을 그곳과는 반대 방향에 있는 곳. '서강훈'씨도 그런 생각을 하며 읽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참, 나는 그 책을 읽고는 제주에 가진 못했다. 자고로 천국, 파라다이스, 극락, 유토피아와 같은 이상적인 장소는 못 가기 마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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