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은 혼자 동떨어져 있는 섬 같은데, 그건 정원 덕분이다. 서점 주변을 설명하자면, 서점을 둘러싸고 있는 정원이 있고 정원을 둘러싼 아스팔트가 있다. 아스팔트와 도로를 구분하기 위한 턱이 있으며 서점 정면에는 차량 진입턱이 하나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도로를 건너가면 20년가량 되어 보이는 2층 건물이 하나 있다. 건물 일층에는 부동산과 조그마한 슈퍼가 있고 이층에는 미용실과 학원이 있다. 서점을 바라보고 왼쪽에는 20평가량 되어 보이는 빈 가게가 있다. 서점 뒤편에는 붉은 벽돌로 기둥을 쌓고 검은색 철로 만들어진 울타리가 타운하우스와 가게를 구분짓고 있다. 그리고 울타리 너머에는 타운하우스에 딸려있는 밭이 있은데, 각 밭마다 동과 호수가 적혀있는 돌이 놓여있는 것으로 보아 각 호수에 할당된 텃밭인 듯하다.
서점을 벗어나 도로를 따라 오른편으로 가다 보면 이른바 '부자동네'가 있다. 각 동은 독립되어 있고 자신이 부자라는 것을 알리 듯 높다란 담장이 있으며 리모컨으로 문을 열어 들어갈 수 있는 주차장이 있다. 주인의 성격을 나타내듯 각각의 동은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지만, 그 웅장함은 모두 비슷하다. 이 곳은 다른 곳과 다름을 강조하고 싶은 듯 입구에는 지키는 이들이 있고 흰색과 빨간색의 조합인 차량 차단기가 가로막고 있다.
다시 서점으로 돌아와 왼편으로 도로를 따라가면 서점 맞은편에 있는 건물과 동갑으로 생각되는 아파트 단지가 있다. 회전교차로를 지나야 아파트 단지를 지나갈 수 있는데, 아침마다 꽤나 북적인다.
서점은 오래된 아파트와 부자 동네를 가르는 기준점이 되는 듯 홀로 있다. 도로 건너편에 있는 슈퍼도 우리가 아는 대기업의 편의점이 아니니 늦은 밤까지는 영업을 하지 않아 오후 9시가 넘으면 그야말로 섬처럼 혼자 빛나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면 정원도 있고 고즈넉하니 좋겠다고 생각하겠지만 (물론 꽃이 피고 싹이 나는 모습을 보면 참 좋다) 나는 매일 벌레와 사투를 버린다. 아침에 출근하며 문을 열면 다리 사이로 벌레가 후다닥 지나간다. 한번 흠칫 놀라곤 등을 켜고 커튼을 걷는다. 그 순간 누군가 비행을 시작한다. 여기서 다시 한번 흠칫. 매번 보지만 적응이 안 된다.
아침에 손님을 맞이하려 청소를 하면 또 다른 친구들이 나를 맞이한다. 벌레 친구들을 보며 긍정 회로를 돌리기 위해 노력을 하는데, 그게 정신건강에 좋다. '돈벌레'라 불리는 그리마가 수많은 다리를 놀리며 갈 때는 '그래 돈벌레가 있으면 바퀴벌레가 없다니 얼마나 다행이야'라고 생각을 한다. 나도 없는 집을 가진 거미를 보고는 '그래 저 친구가 날벌레를 잡아 주니 감사하지. 그런데 여기 말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가면 안 될까?'라고 하며 조심스레 강제 이주정책을 편다.
그렇게 아침의 긍정 회로가 빠르게 돌고 나선 환기를 위해 열어 놓은 문을 닫고 책들을 쭉 살펴본다. 평소와 같은 경로를 따라 한 바퀴 돌고 종착역인 계산대 쪽을 보는데 오싹했다. 직감이 내게 무슨 일이 있다고 알리듯 소름이 돋았다. 에어컨 옆 책장의 가장 아래쪽 책이 뜯겨 있고 가까이가며 '뭐야'라고 생각하는 순간, "투다닥!" 소리를 내며 에어컨과 실외기를 연결하는 구멍으로 검은 물체가 사라졌다.
"오우 씨 뭐야!"(놀라서 소리를 지른게 아니라 내가 이곳에 주인임을 표시하는 방법이다.)
그러곤 5분간 정지. 조금 더 가까이 가보니 에어컨과 실외기를 연결하기 위해 뚫어놓은 구멍에 또 다른 자그마한 구멍이 보였다. "아... 여기로 제리가 들어왔구나..." 톰과 제리의 그 제리다(오래된 애니메이션이라 모르는 분을 위해 설명하면, 고양이인 톰과 쥐인 제리가 다투며 지내는 이야기이다). 이번에는 긍정 회로도 망가졌다보다. 아니 사고 회로가 잠시 정지했다. 그렇게 아무런 생각 없이 20분을 가만히 있었다. 혹시나 또 다른 제리가 있을까하고 말이다. 여지없이 돌아가는 부정 회로. '아니 무슨 이런 도시에 쥐야?', '먹을 것도 하나 없는 서점에 왜 들어온 거야?'라는 생각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손님이 오시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그렇게 30분이 훌쩍 지나갔다.
정신을 차리고 조치 방안을 강구했다. 그렇게 나온 결론은! 구멍을 우레탄으로 막고, 쥐덫을 놓는다! 였다. 이때는 몰랐다. 그 쥐덫이 어떻게 될지 말이다.
모두에게는 사정이 있다
그렇게 마음을 차분히 하곤 읽던 책을 꺼냈다. 꺼낸 책의 노란색 표지에는 격렬하게 엎드려 있는 분이 중간에 턱 하니 있다. 책 제목은 <더 납작 엎드릴게요>. 제목과 표지가 찰떡이다. 저자는 불교출판사 직원이었다. 특이해 보이는 불교출판사의 평범한 점심 고민, 스쳐가는 월급 이야기가 있고, 평범해 보이는 출판사의 특별한 일인 1,080배 도전, 주지스님의 이벤트, 부처님 오신 날의 전투 같은 일상이 있다. 중간쯤 읽었을까? '참 각자의 사정이 다 있구나.', '다 그들의 사정에 따라 사는구나'라는 생각의 조각들이 머리를 둥둥 떠다닌다. 조각들을 이리저리 맞추니 '그 사정을 고려하면, 다들 자신의 역할을 자기의 자리에서 해내고 있구나. 다만 우리가 모를 뿐이지.'의 퍼즐이 완성되었다.
모두에게 사정이 있겠지라는 생각이 '제리에게도 사정이 있겠지.' '여행에 관한 책을 찾는 이도 사정이 있겠지', '환경 문제를 성토하는 그이에도 사정이 있겠지'라며 마음이 한결 넓어졌다. 손님도 없으니 넓어진 마음과 머리를 떠다니다 맞춰진 조각을 글로 옮기려는 순간,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손님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라고 손님이 왔다는 걸 나는 안다는 표시를 하곤 누군지 보니, 이틀 전에 사정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강지영 씨가 왔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왔나 보다'라는 생각과 함께 오늘도 무언가를 쏟아 내더라도 나는 넓은 마음으로, 그의 사정을 이해하리라는 다짐을 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사장님 여기서 책 읽어도 되나요?"라며 전 과는 무척 다른 부드러운 음성에 나는 다른 사람 인가했다. 이때도 당황 표정은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눈은 커졌나 보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셨죠?"
뜨끔했지만 의젓한 어른처럼 "아뇨, 아뇨. 그리고 책은 읽으셔도 됩니다."라고 하니, 그녀는 창가 쪽의 자리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휴우~"라는 긴 숨을 내쉬곤 다시 글을 써 내려갔다. 그녀가 읽는 책은 저번에 사간 <78억 인구 중 나 하나 찌질해도 괜찮아>인데, 글의 힘이 강한 책이다.
누구나 마음의 방 한구석에 숨겨둔 상자가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내 경우에는 천으로 덮어 잘 보이지 않게 두었는데, 상자 안에는 또 다른 상자가 있고 그 안에는 또 다른 상자로 단단히 봉인해 놨다. 그렇게 몇 개의 상자를 열면, 자물쇠로 단단히 잠가놓은 철재 상자가 있는데, 그곳에 내 찌질함이 있다(책에서 지질함이 아닌 찌질함을 선택한건 탁월하다. 찌질함이란 자고로 강한 소리가 들어가야 그 맛이 산다). 나도 잘 들여다보지 않는 그 상자를 단박에 열어 져치는게 바로 그 책이었다. 거기서 나온 내 찌질함들을 내 눈앞에서 흔들며 '너도 찌질하다'라며 추궁당하는 느낌이다. 특히 관계에서 내가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나?라는 의문이 든다.
그래도 끝까지 읽고 나면, 내 찌질함이 다 드러나 한편으로는 속이 후련하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지. 그런 일들이 있었으니 지금의 내가 있지. 그래도 그때보단 지금이 낫지' 라며 나를 다독이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누구나 그러한 찌질한 사정이 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화창한 날씨에 고요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1시간을 꼼짝없이 책을 읽던 그녀가 자리를 정리하는 걸 보니 이제는 갈 모양이다.
그녀는 힘찬 발걸음으로 나에게 오더니 "주말에 집에만 있으면 쉬는 건 좋은데, 나를 위한 일을 하나도 못해 자책하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우울해지고요. 오늘은 독서라는 나를 위한 일을 하니 기분이 참 좋네요. 다 읽었거든요"하며 <78억 인구 중 나 하나 찌질해도 괜찮아>을 자랑스레 흔들었다.
"맞아요. 책을 읽고 나면 참 뿌듯합니다. 수고하셨어요."
"혹시 추천해주실 책 있으신가요? 사장님은 어떤 책 읽고 계시나요?"
난감하다. 서강훈 씨에게 했던 말을 녹음테이프처럼 재생시켰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게 달라 추천하긴 어려워요. 다만 지금 제가 읽고 있는 책은 <더 납작 엎드릴게요>라는 책입니다."라고 하며 책을 들어 보여줬다.
"어떤 내용이에요?"
"각자의 사정이 있다는 걸 알게 하는 책이에요. 그리고 모두들 각자의 사정에 따라서 자신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로 요약될 것 같아요."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는 "그 책이랑 하나 더 추천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잠시 고민을 하곤 "읽으신 책이랑 이 책 모두 독립 서적이니 이거 어떠세요? 워낙 유명해서 읽으셨나요?" 하며 계산대 앞에 있는 평대에 누운 <불편한 편의점>을 들어 보았다.
"아뇨, 책 표지가 이쁘네요. 읽지 않더라도 사야겠어요. 그거도 같이 주세요."라며 조그마한 흰색 핸드백에서 작은 카드지갑을 꺼냈다. "잠시만요"라는 말과 함께 빠르게 노란색 책을 찾아 계산대로 돌아왔다.
"결제해드릴게요. 영수증 드릴까요?"라고 하며 쿠폰함을 쳐다봤다.
이번에도 제 빠른 그녀는 자신의 쿠폰을 들고 있다.
"영수증 주세요. 한 번만 더 사면 할인이 되네요. 조만간 또 올게요"라는 말과 함께 카드와 영수증을 쿠폰과 교환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꼭 들려주세요."라며 책 두 권을 봉투에 넣어 봉하곤 건넸다.
무언갈 이룬 하루를 살아낸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점을 나섰다.
지금의 그녀가 쿠폰을 대하는 것과 이틀 전이 다른 건 다 사정이 있었으리라. 다시 한번 넉넉하게 커진 내마음에 대견해하며 조금 남은 책에 눈을 돌렸다.
여전히 책 추천하는 건 어렵다. 추천받은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책을 읽을까? 책에 관한 이야기를 꼭 나누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야 내가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기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