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말하지도 쓰지도 못하거든요.
함부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듣기만 하는 이유.
대학원을 다닐 때, 난 참 선명한 사람이었다. 매일 대하는 연구가 숫자를 다루고, 엄밀하게 분석을 해야 한 덕분일까?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는 대학생에게도, 대학원을 다니며 고민이 많던 후배에게도 마치 난 정답을 알고 있다는 듯 이야기했다. 가끔은 투정 부리지 말고 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니면, 그런 생각이면 오지 대학원에 오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모든 일이 선명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짧지만 사회생활을 했고, 글을 쓰며 알게 되었다. 삶에서 선명한 일이 그렇기 많지 않다는 사실. 나에게 고민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가볍지 않음을 이제는 흐릿하게 안다. 브런치 스토리를 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둔 글을 읽으면서도 희미하게 느껴진다.
말을 아무리 잘하는 사람도, 글을 아무리 잘 쓰는 사람도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온전히 전달하는 일이 무척 어렵다. 그러기에, 자신이 느끼는 선명하지 못한 일들을 불완전한 글과 말로 전달하는 일은 더욱 힘든 일이 된다. 말과 글의 한계가 있다.
또, 우린 알지 못하는 사이에 검열을 한다. 가장 친한 사람에게도, 오히려 한번 만나고 말 사람에게 조차도 말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다. 때로는 무의식이 마음을 자체 검열해 못 본 척한다. 아무리 용기를 내어도 할 수 없는 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요즘이다.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이 선명하지 못하는 생각.
말도, 글도 온전히 전달하지 못한 순간.
생각하지 못하는 순간 검열하는 지금.
생각과 순간 그리고 지금이 모이고 난 뒤, 난 함부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듣는다.
다 말하지도 쓰지도 못합니다.
생각과 순간 그리고 지금이 고르게 섞이고 나니, 어렴풋이 알게 된다. 선명했던 내가 흐릿해지고, 말로 다 하지 못하는 순간이 잦으며, 나도 모르게 검열이 빈번해지니, 내 마음을 가만히 보고 있는 시간이 부쩍 늘어난다.
그리고 깨달음 조각을 손에 하나 놓였다. 난 왜 이렇게 되었을까? 짐작 가는 바가 있다.
말하는 사람의 단어와 단어 사이에 숨겨져 있는 고통이.
글을 쓰는 사람의 문장과 문장 사이에 감춰져 있는 슬픔이.
그들도 다 말하지 못하는 아픔이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그러니 이제는 함부로 말하지 못하도 듣는 모양이다.
우린 다 말하지도 쓰지도 못한다. 누군가 이야기한다면, 그 말 사이에는 아픔이 있을 테다. 누군가 글을 써놓았다면, 그 사이에는 고난이 있을 테다. 함부로 말하기보다는 들으려 한다. 그들의 마음을 짐작하며 말이다.
한 줄 요약: 말을 다하지도, 글을 따 쓰지도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