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시골의 N 잡러

농사꾼, 나무꾼, 지관.

by Starry Garden
농사꾼


시골에는 직업 선택의 자유 따윈 없다. 땅이 있으면 바로 농사꾼으로 취직(?)된다. 가업이 전수되는 것도 자동이다. 아버지가 농부이면, 나도 농부가 된다. 요즘 유행하는 'N 잡러'이기도 있는데, 바로 나무꾼이다. 나도 아버지도 N 잡러였다.


아버지가 가지신 땅은 2마지기*(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른 평수를 가지고 있으나, 그의 기억에 의하면 1마지기가 300평 내외였다고 한다. 그가 나고 자란 지역은 경상북도 북부로 산간지방이니 다른 지역보다 1마지기가 큰 평수로 계산된 것으로 추정된다)에 농부로 취직했다.


*마지기: 논·밭의 넓이를 나타내는 단위. -두산백과-


땅에는 철에 따라 빈틈없이 농작물을 심어 수확했다. 고추, 옥수수, 감자, 벼. 600평이라면 꽤 큰 땅으로 괜찮은가 싶으실 텐데, 전혀 아니다. 수확한 농작물을 시장에 내다 파는 건 말도 안 되고 가족이 먹기에도 급급했다. 돈이 되기보단 최소한 식량을 조달해주는 정도였다. 땅 상태도 돌이 절반이 있으니, 충분한 수확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물론 시간이 흘러 돌도 골라내고 평평하게 만드는 노력 끝에 꽤 괜찮은 땅이 되었지만, 그것도 나중 일이었다.


그러니 어린 자식들도 늘 논과 밭으로 다니며 일을 했다. 그리고 먹는 입을 하나라로 줄일 심산이었는지, 아니면 눈치껏 빠진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지긋지긋한 시골을 탈출하고 싶었는지 국민학교만 졸업하면 형제들은 가까운 도시로 가 돈을 벌기 시작했다. 큰 누나는 결혼을 해 나갔고, 큰 형은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한 달에 절반 정도는 객지에서 돈을 벌고 나머지 절반은 집에서 농사를 도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턴 객지에서만 생활하며 생필품을 집으로 보내곤 했다. 위로 있던 쌍둥이 형도 정해진 절차 마냥,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떠나 돈을 벌러 갔다.


그렇게 형제들이 객지로 갈수록 내가 밭으로 논으로 가는 일은 많아졌다. 그렇게 자연스레 아버지의 직업이 내 직업이 되었다.


나무꾼


지금은 식목일이 쉬는 날이 아니라 그 의미가 다소 퇴색되었지만, 그 시절 산을 아는 사람이라면 식목일의 중요성을 알리라. 산에는 드문드문 큰 나무들이 있고 깊은 산으로 가야만 작은 나무들을 볼 수 있다. 땔감은 밥을 할 때도 집을 따뜻하게 할 때도 꼭 필요한 연료가 되니, 벨 수 있는 나무는 모조리 베어 가지고 오게 된다. 그리고 땅에 깔려 있는 부러진 나뭇가지와 낙엽은 훌륭한 불쏘시개이니 빠질 수 없다. 그렇게 온 마을 사람들이 틈만 나며 산의 껍질을 벗겨대니 산들은 대부분 민둥산이다.


깊은 산으로 가도 내 마을이라는 푸근한 마음 때문일까? 아니면 놀이터가 될 만큼 잘 알기 때문일까? 두려움보다는 편안함이 앞서는 산속에 있다 보면, 참 좋았다.


작은 몸으로 나무를 지게에 한 짐 실어 나오는 날에는 뿌듯했다. 한동안 연료 걱정을 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나도 아버지도 참 산으로 많이 다녔다.


자연스럽게 두 번째 직업은 나무꾼이다.


지관


아버지의 또 다른 직업은 지관(地官)*이였다. 농사꾼과 나무꾼은 그저 삶을 유지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수확하는 족족 모두 입으로 들어가고 아궁이로 들어가니, 돈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난감하기 이를 때 없었다. 아버지의 또 다른 직업은 지관이었다.


*지관: 풍수의 길흉을 고려하여 장지나 택지를 정하는 전문적인 사람 또는 직업.


언제부터, 누군가에서 배웠는지 알 수 없으나, 내가 국민학교 고학년부터 활동을 하셨다. 처음에는 마을의 묏자리나 집의 방향을 잡아주시던 정도가 자전거가 필요할 정도로 활동범위를 넓혀가셨다. 실력이 소문이 났나 보다. 그렇게 아버지는 직업이 하나 느셨다. 그리고 나와 어머니의 농사일을 많아졌다.


실력이 있다는 소문이 얼마나 퍼졌는지, 자전거로 갈 수 없는 곳에서는 차로 모셔가기도 했다. 그리고 지관이 단순히 땅만을 보는 일은 아니었나 보다. 장례를 주관하는 일도 빈번하셨다. 어린 나에게는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참 열심히 하셨다. 일주일에 3~4일씩 집을 비우시곤 일을 하러 멀리 다녀오셨다. 땅만 파먹던 농사꾼과 산만을 깎아 대던 나무꾼보다는 꽤나 괜찮을 수익을 내셨다. 소문난 지관이 되신 후에는 육성회비 걱정을 안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아버지는 1970년대 N 잡러로 열심히 활동하셨다. 삶의 마지막인 슬픈 일을 관장하던 지관이 인간 공동체에는 꼭 필요한 직업이지만 아들에게는 물려주기 싫으셨나 보다. 농사꾼과 나무꾼의 노하우를 알려주시는 것과는 달리, 집에 오셔서 그 일을 자세히 설명하던 일도 일을 알려주시려고 하시지 않으셨으니 말이다. 아들이 더 많이 배우고 더 좋은 직업을 지니길 바라셨겠거니 짐작만 할 뿐이다.




그도 그의 아버지도 참 열심히 사셨나 보다. 농사꾼이 되었다가 나무꾼이 되기도 하고 지관이라는 직업도 가졌으니 말이다. 지금도 농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산으로 가면 편하다고 말하시며, <나는 자연인이다>를 매일 보는 그가 이해가 된다.


그가 걱정 없이 했던 일이 바로 농사이고 나무 베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대의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건 그분들도 모르는 이유가 있다.



1. 부모님의 직업은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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