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도, 고통도 희석되리라
슬픔도 고통에도 희석이 필요하다.
실험은 측정이 동반된다. 비싸고 커다란 기계로 하는 일도 있고, 몇 가지 시약을 섞어 알아내기도 한다. 측정을 할 때, 보통 희석하는 과정을 거친다. 내가 사용하는 기기나, 방법에 적당한 범위로 맞추기 위해서다. 너무 높은 농도는 결과에 왜곡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희석은 적당한 물과 측정 대상을 적당한 비율로 섞는 것을 이른다.
측정해야 하는 시료에 농도가 너무 높은 경우에는 단계에 따라 희석을 한다. 처음에는 10배, 10배 희석한 물을 떠 다시 10배. 그럼 100 배 희석이 된다. 때에 따라 한 단계를 더 거쳐, 1000배 희석을 하는 일도 있다. 그렇게 희석을 통해 내가 원하는 물질의 농도를 알아낸다.
희석을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바로 간섭 물질을 줄이는 일이다. 폐수에는 참 다양한 물질이 있다. 시약을 이용한 측정에는 간접 물질이 꽤 있다. 시약과 원하지 않게 반응을 하거나, 내가 원하는 물질과 반응해야 하는 물질의 반응을 방해하는 일이 있다. 해결방법은 농도를 낮추는 일이다. 희석을 통해 간섭 물질도 줄어드니, 정확도는 올라갈 수 있다.
원하는 물질을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 내가 가진 측방법에 맞는 범위로 조정하고, 측정 정확도를 높이는 일이 바로 희석이다. 하지만, 희석을 많이 하면 좋은 일일까? 아니다. 너무 높은 희석 배수, 1,000배 희석을 할 경우에는 조금의 실수로도 1,000 배가 흔들리게 된다. 10,000 배에 경우에도 정말 큰 흔들림을 겪게 된다. 그런 경우는 측정방법을 바꿔야 한다.
측정에 꼭 필요한 희석이, 우리 삶에도 필요하리라. 우리 마음에는 다양한 감정과 생각이 모여있다. 평온한 일상에서는 잊고 있던 슬픔이, 알 수 없는 계기고 부유하기도 하고, 소중한 행복이 가라앉아 찾기 어렵기도 하다. 어떤 날은 슬픔만이 내 삶에 전부 인 듯하고, 어떤 말은 행복이 내 삶 속에 한 톨도 없다고 믿게 된다.
슬픔과 고통이 급작스럽게 부유할 때, 우리는 희석이 필요하다. 적당한 수준으로 말이다.
슬픔도, 고통도 희석되리라.
우리 삶은 고통과 행복이 섞여있는 물이다. 행복을 보려고 할 때 슬픔이 간섭해 없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때로는, 작은 슬픔이 너무 진하다고 오해해 올바른 판단을 하기 어려운 날도 있다. 행복한 순간을 영원히 둘 수 없고, 슬픔과 고통에 장면을 우린 피할 수 도 없다. 다만, 슬픔이 너무 기승을 부릴 때는 적당히 희석을 하고 바라봐야 한다. 고통과 슬픔이 희석이 될까?
난 우선 걷는다. 안되면 뛴다.
희석은 물을 넣어 시료에 농도를 낮추는 일이다. 슬픔과 고통에 물을 넣듯, 산책은 새로운 생각을 넣는 일이 되고, 뛰는 일은 생각 자체를 밀어내는 일이다. 일어나서 걸어야 한다. 그냥 걷는다. 목적도 필요 없다. 그냥 걷다 보면, 걷는 일과 주변을 보게 된다.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도 슬픔과 고통이 줄어들지 않았다면, 뛰면 된다. 뛰면 생각할 겨를이 없다.
다음이 중요하다. 씻고 나서, 책을 읽어 새로운 생각을 넣고, 산책에서 얻은 생각 써내어 키워야 한다.
가벼운 글도 좋고, 무거운 책도 좋다. 고통과 슬픔이 작아질 수 있도록 깨끗한 물을 넣는 일이다. 책 읽기가 희석이 된다. 그런 뒤에 우리는 뱉어 내야 한다. 믿을 만한 친구, 가족과 함께 이야기하는 일도 좋고, 일기를 쓰고 글을 쓰는 일도 좋다. 생각을 키워내니, 슬픔과 고통이 작아진다. 그렇게 내어 놓고 나면, 희석된 내 슬픔과 고통을 마주 할 수 있다.
기억하자. 슬픔과 고통은 희석할 수 있다. 그런 뒤에야 슬픔과 고통을 알 수 있다. 각자에 방법이 있으리라, 없으면 만들어내길 바라본다.
한 줄 요약: 슬픔과 고통도 희석되어야 비로소 제대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