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는 이름의 힘.
한 번 새댁은 영원한 새댁이다.
보험을 든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대비 정도? 차동자 보험도, 건강 보험도 가지고 있다. 한 분을 통해서만 온 집이 하고 있다. 차가 생기면 그분을 통해 보험이 시작된다. 보험을 챙기고 신경 쓰는 일이 힘든 탓에 외면하고 부모님에게 맡겨 둔 시간이 꽤 오래되었다. 자연스럽게 우리 집 보험을 담당하시는 분도 만난 적이 없다.
보험설계사님 이름도 모른다. 다만, 어머니가 그분을 부를 때는 "새댁"이라고 이르신다. 새댁. 본 적 없으니 상상으로 그분의 모습을 그린다. 나이는 30대 중 후반, 결혼을 한 지는 길어야 5년 짧게 잡으면 2년 정도의 여성분. 오래도록 내겐 그분의 이미지는 흐릿하게 색으로 채워 넣었다.
어느 날 어머니 요청이 있었다. 내용은 보험을 설계를 조정해야 한다. 네 것은 네가 알아서 하라는 어머니의 통지. 이제는 피할 수 없어 그러겠노라고 했다. 소환 대상은 어머니, 동생 그리고 나까지. 짧은 설명으로 충분하다는 말씀에 비좁은 시간을 내어 약속을 잡았다.
어머니와 이야기를 주고받고, 동생과 티격거리며 기다렸다. 문을 등을 지고 앉아 있던 터라 문이 열리는 소리만 들었다. "딸랑. 딸랑." 어머니가 손을 번쩍 드신다. 긴 시간 만나지 못한 새댁을 만났다. 나이가 지긋한 분이 활짝 웃으시며, 어머니에게 다가왔다.
노련하시게 설명했고, 변화한 우리 환경에 맞게 보험을 조정했다. 짧은 시간에 후다닥 일을 끝내고 나니, 일상 이야기를 짧게 하신다. 매번 전화로만 하다 이렇게 만나니 반갑다는 이야기. 다음 일정이 있으셔서, 자리를 일어나게 되니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카페를 나서셨다.
동생과 나는 눈빛을 교환했다. 당황한 건 나 혼자만은 아닌가 보다.
"왜? 새댁이야?"
우리의 질문 의도를 단박에 간파하신 어머니는 쿨한 문장으로 돌려주셨다.
"한 번 새댁은 영원한 새댁이지. 나도 아직 새댁으로 불리는 걸?"
새댁은 '새색시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한 번 있을 새댁은 영원한 새댁이 된다는 말을 곰곰 생각하다.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단어는 오래도록 유지되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옮아갔다. 시골에 방문할 때 기억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여전히 새댁이라 불리신다. 연고 하나 없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의지한 채 시골로 시집을 왔을 테다. 유교 이념이 여전히 살아 있던 그곳에서 어머니는 이름을 지우고 새댁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시간은 흘렀고, 시골은 무너져 갔다. 새로운 새댁을 들어오지 않았고, 관계는 유지된 채, 시간만이 흘렀다.
새댁이라 부르시던 아주머니는 이젠 할머니가 되었고, 새댁이라 불리는 어머니는 이제 아주머니 나이를 넘었다. 여전히 새댁이다. 어머니는 시골에만 가시면, 새댁처럼 일을 척척하시고, 활달한 기운은 거세진다. 부르는 이름이 어머니를 과거로 부른 모양이다.
어머니가 보험설계사님을 새댁이라 부르는 이유도, 기꺼이 새댁이라는 호칭에 답하는 그분도, 젊었을 시점으로 돌아가기 위한 건 아닐까? 지금 어떤 자리에 있고, 얼마나 시간이 흐른 정도와 상관없이 말이다. 추억 여러 방법으로 날 소환한다. 과거로 여행을 떠나고 싶은가? 그 시절 호칭이 그대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어머니의 새댁 시절을, 보험설계사님의 새댁 시절을 상상해 본다.